137.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버그만 영식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사냥 신동이라 불리며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기대에 걸맞게 처음 출전한 가을 사냥 대회, 그리고 그다음 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고.
‘그렇게 명예 졸업을 노리고 있었는데.’
앨턴의 이름을 가진 내가 참가했으니, 얼마나 신경 쓰일까?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 때문에 꿈이 다 일그러지겠네.’
그렇다고 져 줄 생각은 전혀 없지만.
이런 내 속내를 읽었는지, 삼남은 꽤나 사나운 눈초리로 날 노려보고는 휙 고개를 돌렸다.
나도 그런 삼남에게서 쓰윽 시선을 돌려 뒤쪽을 바라봤다.
삼남의 사냥을 보좌할 기사들의 말에는 짐이 한가득 실려 있었다. 전부 야영에 필요한 것들이었다.
모스틴도 나와 같은 것을 봤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우승을 하려면 야간 사냥을 해야지.”
가을 사냥 대회는 총 3일에 걸쳐 진행된다. 첫째와 둘째 날은 황실이 미리 선정한 숲에서 밤을 보내며 사냥에 집중한다.
마지막 날은 정해진 시간 안에 집결지로 돌아와 사냥 대회의 우승자를 선정하고, 대회를 마무리하는 야외 연회가 크게 열렸다.
이때 숲에서 밤을 보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황실이 중간에 마련한 베이스캠프를 이용하는 것.
‘또 하나는 숲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각자 야영을 하는 것.’
대회에 참가한 귀족들은 대부분 편안한 베이스캠프를 선택했다.
하지만 만약 우승을 노리고 있다면, 야영은 필수였다. 그래야 시간도 절약하고, 야행성 짐승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행성 짐승에게는 추가 점수가 붙거든.’
물론 야간 사냥은 매우 위험한 행위다.
사람이 자주 다니는 숲이 아니라 가로등도 설치되어 있지 않고, 지형도 평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저하게 검증된 안전장치들이 미리미리 숲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황실이 주도하는 역사적인 행사에서 인명 피해라니, 그건 말도 안 되니까.’
사냥에 사용될 총에는 무조건 사람에게 쏠 수 없는 마법이 걸려 있거나,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 모두 보호막이 걸려 있는 마법 보석을 착용하는 등.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철저히 준비된 환경이었기에, 다들 온전히 사냥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벨라디.”
모스틴이 날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자연스럽게 모스틴을 바라보자, 그가 슬쩍 내 뒤쪽으로 눈짓했다.
“너희 아버지는 어떻게 설득한 거야?”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조금 떨어져서 따라오는 앨턴가의 기사들이 보였다.
그들이 타고 있는 말에도 버그만 후작가의 기사들처럼 야영용 짐이 한가득 실려 있었다.
모스틴은 그걸 보며 말했다.
“솔직히 사냥 대회 참가는 쉽게 허락하셨을 거라 생각했어. 그래도 야영은 반대가 심했을 게 뻔한데.”
가을 사냥 대회 야영은 불편하기로 악명 높으니까. 나도 베이스캠프에서 자려고 했고.
모스틴은 그렇게 말을 덧붙였다. 확실히 프레도 기사들의 짐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난 그런 모스틴을 보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애초에 물어보지도 않았어. 이젠 내 행동 하나하나에 아버지의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어졌거든.”
“정말?”
모스틴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앨턴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귀족 가문들은 가주의 말이 곧 법이니까. 따라서 아무리 후계자여도 가주의 눈치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난 오래도록 아버지에게 순종적인 딸이었지.’
그건 임시 가주가 된 후로도 마찬가지였고.
모스틴 역시 이를 알고 있기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어떻게? 너희 아버지, 원래 너한테 엄청 엄격했잖아.”
그 물음에 난 숲 근처에 위치한 황실 별장에서 머무르고 있을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와는 그날 이후로 상당히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일단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았고, 아버지도 이런 날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가늠을 못 잡은 탓이었다.
‘거기다 내가 습관적으로 짓던 미소를 완전히 버렸거든.’
그 미소는 아버지에게 의젓하고 착한 딸이 되고 싶었던 내가 필사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전생을 자각한 뒤에는 신뢰를 얻기 위해서 유지했고.
하지만 더 이상 그가 날 내치지 못하다는 계산이 나왔으니, 미소는 무의미해졌다.
덕분에 최근 난 아버지에게 보여 준 적 없던 무뚝뚝한 태도를 고수할 수 있었다.
‘기본적인 예의는 갖추나, 딱 그뿐.’
그 이상의 어떠한 제스처도 대화도 시도하지 않았으니까.
아버지는 한순간 돌변한 날 보며 적잖이 당황해했고, 현재까지 계속 내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추가로 내가 너무 바쁘기도 했고.’
그래서 아버지가 애써 티타임이나 산책을 제안해도 깔끔하게 거절할 수 있었지.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일이었다. 본인 일에 집중하느라 언제나 날 거절하던 아버지가 어쩌다 저런 꼴이 되었을까.
‘전세가 완벽히 역전됐네.’
물론 나에게는 더없이 편리한 일이었다.
덕분에 내가 야영을 하겠다고 통보해도, 아버지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으니까.
‘애초에 그 양반이 나에게 간섭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됐지.’
아버지가 먼저, 나를 남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했잖아?
난 그렇게 자문하며, 모스틴에게 싱긋 웃어 줬다.
“자세히 알고 싶어?”
여유로운 내 미소를 관찰하던 모스틴 역시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표정 보니까 어떻게 된 건지 알겠다! 드디어 네가 칼을 뽑았구나?”
“오래 기다렸지.”
소꿉친구로서, 그동안 내가 무슨 취급을 받았는지 전부 알고 있던 모스틴은 긴말하지 않고 그저 호탕하게 웃었다.
그렇게 그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잘 정돈된 길이 끝났다.
앞서가고 있던 황실 기수가 깃발을 높이 들며, 행진을 멈췄다.
“이곳이 이번 사냥 대회의 기점입니다! 3일 후 정오까지 이곳으로 모이시면 텔레포트로 한 번에 황실 별장으로 이동할 예정이니 늦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또한, 베이스캠프는 저 앞에 보이는 나뭇가지의 리본을 따라가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기수는 몇 가지 유의 사항을 더 읊었다.
어차피 다 알고 있는 것들이라, 난 모스틴과 이야기를 마저 주고받았다.
“남서쪽에 사냥감이 더 많다고?”
“당연하지. 여기가 서부의 숲인데, 내가 모르겠어?”
모스틴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사냥 대회 장소로 서부의 숲이 선정된 것부터 내게는 행운의 징조였다.
‘서부의 후계자가 내 편이니까.’
물론, 이 숲은 황실의 소유였다.
작년에 많은 후보 중 이곳이 사냥 대회 장소로 확정되고부터는 공정성을 위해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됐다.
‘하지만 숲은 넓지.’
그렇기에 이 숲의 일부분은 옆 영지에까지 뻗어 있었는데, 마침 그 영지를 관리하는 가문이 모스틴의 최측근 가신이었다.
‘덕분에 모스틴도 이 숲에서 몇 번 사냥을 했고.’
그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참고로 이렇게 정보를 얻는 것이 반칙은 아니었다.
‘귀족 사회는 이런 인맥조차 하나의 실력으로 치거든.’
그게 아니면, 왜 귀족들이 허구한 날 만나서 친분 다지기에 바쁘겠어?
우승을 노리는 사냥꾼들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아까부터 은근슬쩍 이쪽을 관찰하고 있었다. 버그만 영식은 아예 노골적으로 모스틴을 주시하고 있었고.
모스틴은 그 시선을 의식하며 짓궂게 웃었다.
“아~, 느껴진다. 날 향한 동년배들의 뜨거운 시선이. 역시 인기가 많은 것도 피곤해.”
“모스틴, 나 외의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 줄 거야?”
“으음, 친분이 있는 영식들에게는 약간?”
그 말에 내가 빤히 모스틴을 바라보자, 모스틴이 너스레를 떨며 내 어깨를 팍팍 쳤다.
“와, 이 욕심쟁이!”
그러더니 목소리를 확 낮추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너한테는 내 머리에 콩알만큼 있는 정보들까지 전부 쥐어짜서 표시해 줬잖아.”
그 말대로였다.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짐 중에는 모스틴이 미리 표시해 준 핵심 지형 지도가 버젓이 있으니까.
‘난 쩨쩨하게 정보 한두 개 듣는 거로는 만족 못하는 사람이거든.’
그래서 대회 전부터 모스틴을 닦달해 기어코 이 지도를 완성시켰지. 내가 그의 생명의 은인임을 열심히 생색내며 말이야.
이게 있으니 난 남들보다 더 수월하게 사냥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모스틴이 자기의 친우들에게 몇 가지 말해 주는 것 정도는…….
“좋아, 나만 너무 유리한 것도 재미없으니까 눈감아 줄게.”
“그래. 너무 감사합니다, 벨라디 님.”
그렇게 시시덕거리며 말장난을 할 때였다.
한참 유의 사항을 떠들던 기수가 드디어 기다렸던 말을 외쳤다.
“그럼 나팔과 함께 가을 사냥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옆에 있던 황실 기사가 힘차게 나팔을 불었다.
뿌우우우우우우-!
그 소리를 듣자마자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말을 몰았다.
나 역시 알렉산더의 고삐를 쥔 채 남서쪽으로 달렸다.
“그럼 3일 뒤에 보자, 모스틴!”
“믿는다, 벨라디!”
히이이이이잉!
수많은 말들의 울음소리가 숲속 사방을 덮쳤다. 난 날 따르는 3명의 기사들과 함께 거침없이 숲 안쪽으로 향했다.
‘지도에 따르면, 남서쪽 깊숙한 곳에 인적이 없는 호수가 있어.’
물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짐승들도 모이는 법.
애초에 야영을 하려면 식수 확보가 필수이기도 했다.
난 빠르게 달리며 힐끔 뒤를 돌아봤다. 기사들은 한 명의 낙오도 없이 줄을 맞춘 채 알렉산더를 따라오고 있었다.
‘좋아.’
이번에 고른 기사들은 일부러 사냥에 능숙한 이들로 뽑았기에, 제플린과 더너스는 제외되었다.
그들은 실력이 뛰어난 기사이자 감시자였지만, 사냥 면에서는 다른 기사들이 더 뛰어났기 때문이다.
‘애초에 더너스는 특별 임무를 보내서 이 제국에 없기도 하고.’
거기다 지금 난 멜도르가 선물로 준 붉은색 사냥용 장갑을 낀 상태였다.
‘원작에서 첫째가 가을 사냥 대회의 마지막 우승을 차지할 수 있게 도와준 핵심적인 도구.’
비록 지금의 나와는 상황이 다르지만, 그게 뭐 중요한가.
이 장갑에 박힌 보석에 얼마나 유용한 마법을 넣었는지가 중요하지.
‘이렇게까지 했는데, 내가 우승을 못 하면 그건 앨턴으로서 수치야.’
“멈추지 않고 안으로 들어간다!”
내 명령에 뒤따르던 기사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예, 벨라디 님!”
시작부터 느낌이 아주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