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36화 (137/197)

136.

“벨라디.”

킬리언이 다급히 일어나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 있나요? 표정이 너무 안 좋아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안색을 살폈다. 난 고개를 돌려 그의 걱정스러운 눈을 피했다.

“미안해요, 킬리언. 지금 제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이만 돌아가 주셨으면 해요.”

“어디 아픈가요?”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오늘 못한 회의는 내일 보충하도록 하죠.”

지금 내 속은 여러 가지가 엉켜 엉망이었다.

기분은 더없이 바닥으로 처박혀 있었고, 표정 관리도 잘 안 될 만큼 두통도 심해졌다.

이런 꼴을 킬리언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난 무의식적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으며 말했다.

“그러니 일단 돌아가 줘요.”

“제가 당신을 도우면 안 될까요?”

그 물음에 난 아래에 두었던 시선을 올려 킬리언을 바라봤다.

평소 내 의견이면 두말없이 따랐던 그였으나, 지금 킬리언의 얼굴은 어딘지 결연했다.

“머리가 아픈 거죠? 저 요즘 아이닝에게 정령의 치유 마법을 배우고 있어요. 외상만 치료할 수 있는 일반 마법과 다르니 한결 편안해질 거예요.”

“킬리언.”

“요즘 당신이 많이 무리하고 있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벨라디, 이리로.”

킬리언은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내 손을 잡은 후, 소파로 이끌었다. 그 행동에 난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킬리언, 난 괜찮아요. 그러니 그냥 혼자 있게 해 줘요.”

“웬만하면 당신의 말을 따르고 싶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날 소파에 앉히고는 내 발치에서 무릎 꿇었다. 그러며 간절한 눈빛으로 날 올려다봤다.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도저히 혼자 둘 수 없어요.”

킬리언이 날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줬다.

“특히 당신은 남에게 의지하려 하지 않으니까. 이번만큼은 제가 고집을 부리고 싶어요.”

“…….”

“그러니 미안해요. 당신 말은 잘 들어주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해서.”

그 말과 동시에 킬리언의 손에서부터 무언가가 내게 흘러왔다.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나, 아주 따뜻하면서 산뜻한……. 그러면서도 낯선 기운이 날 감싸는 기분이었다.

“이건…….”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기운에 내 손이 자동적으로 움찔거렸다.

그러자 킬리언이 날 다독이듯 깍지를 꼈다. 그와 내 손가락이 서로 얽혔다.

“이게 자연 친화력이에요.”

내가 거기에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에 킬리언이 속삭였다.

“정확히는 자연 친화력으로 만든 정령의 치유 마법이죠. 조금 생소하겠지만,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그 말에 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확실히 킬리언의 말대로였다. 느껴지는 자연 친화력이 배배 꼬여 있던 내 속을 차분히 풀어 주는 것 같으니까.

마치 날 위로하려는 것처럼.

‘그래, 지금 날 바라보는 킬리언의 저 눈처럼.’

정령의 마법 덕분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난 그를 마주 봤다.

내가 스스로의 나약함에 괴로워하던 잠깐 동안, 그는 오롯이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그 시선이 어릴 적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온기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나를 제일 먼저 선택해 줄…… 그런 온기.’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보여 주었던 것처럼. 어머니가 멜도르에게 보여 주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 누구의 첫 번째도 될 수 없었던 난, 결국 포기해야만 했던 그것을…….

‘킬리언이 가지고 있어.’

시기가 참 얄궂다.

지금의 난 타인을 첫 번째로 여기게 되면 끝내 허무해질 수밖에 없다는 걸 뼈저리게 체감했고, 그렇기에 나 자신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내 욕망, 내 꿈, 내 미래.

‘어머니와 가족들을 몰아내고 피워 낸 나의 가장 소중한 것들.’

이것이 내가 찾아낸 옳은 길이었다.

또한, 외부 요소 때문에 내가 흔들리는 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진작 킬리언의 마음을 눈치챘지만…… 일부러 눈을 돌렸다.

그러는 사이, 그의 감정은 어느덧 너무 선명한 색을 띠어서 더 이상 모르는 척하기 힘들어졌다.

“킬리언.”

나도 모르게 나지막한 목소리가 나왔다.

조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를 마주 보고 바로 잡아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이야기해야, 그와 서먹해지지 않을까?

“난…….”

그때였다.

“우리는 공통의 목적을 위해 손을 잡은 동맹이에요.”

킬리언이 싱긋 웃었다.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벨라디.”

“…….”

“난 절대 당신을 방해하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을 계속해서 연습했던 것처럼.

‘킬리언도 내 속내를 읽고 있었구나.’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킬리언이 힐끔 날 살폈다. 그러고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모든 걸 이루고 나면…… 내게 기회를 줄래요?”

어느새 내게 흘러오는 정령의 마법이 서서히 멈췄다. 날 감싸던 따뜻한 기운이 사라지자, 묘한 아쉬움이 들었다.

‘아쉽다니…….’

오늘 한 번 도움을 받았을 뿐이다. 이런 것에 익숙해져서 좋을 것 없어.

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부러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당신의 감정을 이용할 수도 있어요.”

“그럼 언제든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거군요? 오히려 기뻐요.”

“모든 걸 다 이룬 후, 기회를 준다는 보장도 할 수 없고요.”

“…….”

“킬리언, 보답도 기약도 없는 희생은 스스로를 마모시킬 뿐이에요.”

내가 직접 겪었으니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진심으로 뱉은 충고였으나, 킬리언은 그저 사르르 눈을 접으며 미소 지을 뿐이었다.

“괜찮아요, 벨라디.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그걸 어떻게 확신하죠?”

“당신은 제가 이제껏 만났던 이들 중 가장 상냥한 걸요.”

그렇게 말하는 킬리언의 표정이 더없이 순수했다. 그 때문에 나는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내가 아는 벨라디 앨턴은 자신의 테두리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누구보다 상냥하고 다정하니까.”

킬리언은 말하는 내내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을 다시 고쳐 잡았다. 그리고 내게 조금 더 다가왔다.

“전 당신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 있죠?”

그건 물음이 아닌, 확인이었다.

그렇기에 난 물끄러미 킬리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계속 킬리언과도 적당한 거리감이 필요하다고 여겼는데.’

어쩌면…… 온전히 내게 의지하는 그를 봤던 그 순간부터 늦은 걸지도 모르겠다. 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자 킬리언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변했다.

***

여름의 열기와 함께 제국을 덮쳤던 증기 기관차도 차츰 자리를 잡았다.

철도 공사는 순조롭게 이어져 어느덧 북부의 큰 도시는 전부 증기 기관차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은 시범 운행 중이라 상업적인 이용은 더 기다려야 하지만.’

제국민들은 그 기다림조차 즐기고 있었다.

북부의 사람들 모두 증기 기관차가 지나가면 손을 흔들며 좋아했고, 심지어 일부러 이 시범 운행을 보기 위해 북부로 관광 오는 이들도 늘어났다.

증기 기관차와 철도는 그렇게 제국민들의 일상에 녹아들고 있었다.

아직 한 해가 다 지나지 않았지만, 난 단언할 수 있었다.

‘올해 제국의 가장 큰 이슈는 다른 무엇도 아닌 증기 기관차가 될 거야.’

그렇게 바쁘게 하루를 보내니, 곧 선선한 가을이 찾아왔다.

이번 가을에는 큰 행사가 찾아왔다. 바로, 3년에 한 번 열리는 가을 사냥 대회.

내가 정령검을 받았던 여름 사냥 대회는 황제가 개인적으로 진행하는 친목회 느낌이었다면, 이 가을 사냥 대회는 격이 달랐다.

‘제국의 오랜 전통이자, 황제에게 명예를 인정받을 몇 안 되는 기회니까.’

덕분에 전국의 날고 기는 사냥꾼들은 전부 이 대회에 참가하지.

사실 내가 임시 가주가 되고 난 후에도 한 번, 가을 사냥 대회가 열렸었다.

하지만 난 그때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마법 루비 투자자들과의 약속이 너무 많이 잡혔었거든.’

사실 가을 사냥 대회처럼 전국 단위로 귀족들이 모이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여흥을 즐기기보다는 임시 가주로서 투자자들과 관계를 돈독히 하며 입지를 다지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때 내가 얼마나 아쉬웠는데.’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이제는 아버지가 돌아오셨고, 내 입지도 그때처럼 열심히 다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번 대회는 무사히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대회만을 기다렸을까.

드디어 다가온 당일.

난 어깨에 두른 사냥용 총 가방끈을 고쳐 매며 웃었다.

“우승은 내가 가져가겠어.”

히이이이이이잉~!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알렉산더도 콧김을 푸르릉 뿜으며 의지를 다졌다.

그리고 옆에서 말을 몰던 모스틴은 알렉산더와 나보다도 더욱 활활 불타오르며 외쳤다.

“당연하지! 이번 내기에서 네가 우승한다에 올인했으니까, 무조건 이겨야 해!”

귀족들은 암암리에 가을 사냥 대회에서 누가 우승할지 돈을 거는 게임을 즐겼다.

모스틴은 그중 날 선택했다고 아까부터 어필하는 중이었다.

“우리 미리미리 버그만 영식에게 유감을 표하자고. 저 영식이 원래 유력한 우승 후보거든.”

모스틴은 그렇게 말하며 떨어져 있는 무리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여러 영식들이 모여서 위풍당당한 얼굴로 말을 몰고 있었다.

그중 갈색 모자를 쓰고 있는 자가 그 유명한 버그만 후작가의 삼남이었다.

“그래, 지금까지 연달아 우승했다지?”

“맞아. 이번에 또 우승하면 3회 연속으로 명예 졸업이야!”

모스틴이 눈을 빛내며 날 바라봤다.

“하지만 이번에는 벨라디 네가 참가했지! 오랜만에 앨턴이 부활했다고 전국적으로 아주 떠들썩해.”

그렇게 말하던 모스틴은 턱을 쓰다듬으며 새삼스럽게 말했다.

“그러고 보면 너희 가문도 대단하다. 앨턴 공작가 때문에 한 참가자가 연속 3회 이상 우승하면, 그 후 수상에서 제외된다는 ‘명예 졸업’ 규칙이 생겼잖아.”

“그게 없었다면 우리 앨턴이 매번 우승했을 테니까.”

사실 당연한 말이었다. 제국 최고의 무가인 북부의 앨턴을 육체적으로 이길 수 있는 가문이 감히 어디가 있다고.

‘아버지도 젊을 적, 3회 이상 우승을 기록한 명예 졸업자지.’

당연히 나도 그 뒤를 이을 거고.

안 그래도 모스틴의 말처럼 내가 이번 가을 사냥 대회에 참가한다는 소식에 사교계는 아주 뜨거웠다.

저번 사냥 대회에서는 지켜보기만 했던 내가 과연 어떤 실력을 가지고 있을지, 아무리 앨턴이지만 그래도 여자인데 우승은 할 수 있을지, 버그만 영식은 과연 1위 자리를 지키는 데 성공할지.

이런저런 뒷말이 오가고 있었다. 물론 난 그걸 즐겼다.

‘오히려 대회에 참가하지 않은 시온에게 부탁했지. 나 대신 내기에 돈을 걸어 달라고.’

누구에게?

나에게.

그냥 하는 것보단 내기를 거는 편이 더 불타오르니까. 그렇게 후후 웃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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