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난 잠시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황태자가 내 성별을 주목했다고?’
난 빠르게 다음 글을 읽어 내려갔다. 윌리엄의 노트는 무척 얇았기에 다 읽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용을 전부 파악한 난 천천히 노트를 덮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이걸 마지막 죄책감이라고 표현했군.’
여기에는 윌리엄이 황태자 측의 회유에 넘어간 후, 본인이 들키기 전까지의 일들이 적혀 있었다.
다만 일기처럼 매일매일 적은 것이 아닌, 기억을 끄집어내 그때그때 급하게 휘갈긴 것이 눈에 띄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랬다.
부인의 유산과 석연치 않은 죽음.
자꾸 찾아오는 패러그린 후작.
점점 정신이 멍해지는 자신.
‘무엇보다 앨턴가를 향해 치솟는 알 수 없는 분노.’
그렇게 불안해하던 윌리엄은 결국, 이유 모를 분노에 사로잡혀 황태자의 편에 서게 된 것이다.
기록의 마지막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태어나지 못한 내 아이와 부인의 죽음이 모두 앨턴의 계략이라는 패러그린 후작의 말이 귓가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그럴수록 앨턴이 원망스럽다.
모든 것을 잃은 나와 다르게, 본인들의 아이를 상상하며 행복해하는 그들의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다.
그러니 난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와서야, 내가 뭔가에 홀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금에서야.
그렇기에 급히 몇 가지의 기억들을 이 노트에 적는다.
이것이 무사히 발견된다면, 황태자와 패러그린 후작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남기며.」
‘누가 누굴 조심하라는 거야?’
마지막 글귀를 떠올리며 난 냉소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야 과거의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퍼즐이 맞춰졌다.
윌리엄은 어느 순간 마물의 부산물을 섭취하고 세뇌당한 것이다. 그리고 황태자의 꼭두각시가 된 거지.
‘그래도 나에 대한 걸 제외하면, 황태자에게 큰 정보를 전달한 것 같지는 않군.’
하긴, 배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발각당하고 체포되었다 하니까.
여기서 중요한 건 윌리엄이 아니다. 그는 어차피 무대에서 퇴장한 사람. 이 이상의 사연을 더 파악해서 무얼 할까.
그보다는 황태자가 나의 출생을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대목에 집중해야 했다.
‘왜 놈이 내 성별을 확인하려 했을까.’
어차피 이틀 정도만 기다려도 알 수 있었을 텐데, 그새를 못 참고.
거기다 윌리엄의 기록에 따르면, 내 성별을 알게 된 황태자는 다음으로 이런 지령을 내렸다.
「그 아이가 올바른 공녀로 자라도록 예의 주시할 것.」
올바른 공녀라…….
어이없는 건 둘째 치고. 마물의 부산물까지 이용해 첩자를 심어 놓았으면서 저건 너무 사소한 지령 아닌가.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돼.’
이제 갓 태어난 신생아를 황태자가 경계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하나의 가설을 제외하면 말이다.
‘설마 황태자가…… 내게도 손을 뻗었던 건가?’
이제껏 원작을 전부 비튼 황태자. 그리고 이 원작에서 가장 크게 비틀린 건 다른 뭣도 아닌 내 성별이었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그가 관여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까 윌리엄을 이용해 내 동태를 살피려 한 거야.’
그 외에도 꾸준히 앨턴가에 첩자를 심으려 한 거고.
그렇다고 황태자가 빙의자다? 그건 확신할 수 없었다.
마침 원작에 대해서도 의문인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난 소설의 후반부를 읽지 못했어.’
아니, 읽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내 기억에서 익숙한 듯 낯선 장면들이 드문드문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번 황태자비의 개인 금고도 그 경우야.’
분명 내가 원래 알고 있던 부분에선 황태자비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따라서 내가 알고 있는 황태자비는 벨라디 앨턴으로서 알고 있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근래의 난, 결박당한 채 감옥으로 끌려가는 황태자비와 그녀의 방에 숨겨진 패러그린가의 비밀 서류를 봤던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미래의 일인 건 확실했다.
‘일단 그걸 이용해서 도로시에게 더 수월하게 임무를 맡겼지.’
하지만 그 장면들은 도대체…….
이제껏 난 원작을 일종의 평행세계라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빙의하지 않았다면 펼쳐졌을 또 다른 세상.
그러나 이제는 단순히 그렇게 치부하면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또한, 황태자가 어떻게 원작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그동안 너무 바빠 우선순위에서 미뤄 뒀는데.’
그놈이 내 근본적인 출생을 가지고 놀았다면, 말이 다르지. 기분이 아주 더럽잖아.
‘이걸 킬리언과 공유해, 말아?’
그렇게 잠시 고민하는 사이, 마차는 저택에 도착했다.
난 노트를 스티아에게 맡긴 후 유유히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은 어느새 자정이었다. 슬슬 킬리언과 만날 시간이라 곧장 내 방으로 향하려는데, 1층 로비에서 날 붙잡는 목소리가 들렸다.
“벨라디. 지금 어디에 갔다 오는 거지?”
그 말에 난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바라봤다. 아버지가 뚜벅뚜벅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 늦은 시간에 어딜 다녀오냔 말이다. 아무런 말 없이.”
아버지는 이 로비에서 내가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본인의 말투에서 날을 세우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난 그런 아버지에게 덤덤히 말했다.
“잠시 볼 일이 있어서 다녀왔어요. 아버지께 보고드릴 사항은 아니니, 마음 쓰지 마세요.”
“그럼 최소한 호위 기사는 데리고 갔어야지. 밤이 깊었는데 고작 하녀 한 명만 대동하고.”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내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스티아를 노려봤다. 스티아는 아무런 말 없이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녀가 단순한 하녀가 아닌 감시자, 그것도 수장 대리라는 걸 아는 아버지는 스티아의 침묵이 매우 탐탁지 않은 듯했다.
그는 그 시선을 그대로 내게 옮겼다. 그러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열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걸 보며 난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아버지가 진작 사람을 물린 건지, 넓은 로비는 2층까지 텅 비어 있었다.
난 대기하고 있던 스티아에게 속삭였다.
“먼저 올라가 있어.”
“예, 벨라디 님.”
스티아가 아버지에게 조용히 인사한 후, 신속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침묵을 유지하던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로시는 보셨나요?”
내 도발에 아버지가 미간을 찡그리셨다.
“……제플린 빈센드와 스티아 워커는 처음부터 노리고 네 수하로 만든 건가?”
그가 무겁게 물었다. 난 아버지가 생략한 주어를 떠올리며 쉽게 인정했다.
“맞아요. 처음부터 노렸어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거지?”
“글쎄요, 제가 후계자의 자리를 원했던 때부터?”
내 말에 아버지의 손이 움찔거렸다. 난 그걸 보며 물었다.
“제가 알아서 기분 나쁘신가요? 가주만 알아야 할 그들을 제 마음대로 이용하고 있었으니.”
“벨라디 앨턴.”
문득, 갑자기 저 이름이 너무 생소하게 들렸다.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급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을 정리했다.
원작 속 장남의 이름은 뭐였지? 이상하게 그것만큼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 많은 것들을 선명히 기억하는데, 그것만 일부러 지운 듯이.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난 너에게 못난 아비지만, 이건 가주로서 짚고 넘어가야겠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비밀을 네 멋대로 이용하는 건 옳지 않아. 명백한 월권이다.”
그 말에 머리가 아픈 와중에도 실소가 나왔다.
난 아버지의 붉은 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알아요. 일부러 그런 거예요.”
“뭐?”
“못난 아비 밑에서 자란 딸이 얼마나 훌륭하겠어요. 똑같이 못난 사람이 된 거지.”
내 말에 아버지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넌….”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이라고요?”
난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확실한 증표를 내주세요.”
“증표라고?”
“감시자들에게 아버지 입으로 직접, 절 후계로 삼겠다고 공표하세요.”
내 말에 아버지의 눈이 순간 커졌다.
난 이제 그런 아버지를 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건 일전에 감정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들춰 보였던 실수와는 달랐다.
지금은 그저……. 그래, 불쾌하고 짜증이 났다.
“그렇게 하기는 싫으신가요?”
“그게 아니라.”
“그럼 그렇게 하세요. 그게 아버지가 제게 줄 수 있는 도움이에요.”
난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토록 원하셨잖아요, 당신이 내 도움이 되기를.”
“…….”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그저 혼란스러운 기색만 역력했다.
난 그런 아버지를 잠시 바라보다 자조했다.
“만약 제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당신은 못난 아비가 아니라 듬직한 아버지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 말에 아버지가 인상을 찡그렸다.
“딸이라서 참 죄송하네요.”
순간, 그가 지금 크게 상처받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게는 아버지가 남긴 상처가 아직도 흉터로 남아 있는데. 아무리 없애고 싶어도, 차마 지워지지 않는 형태로.
머리는 여전히 지끈거리며 날 괴롭혔다. 난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걸음을 옮겼다.
“피곤해서 먼저 올라가 볼게요.”
아버지를 지나쳐 계단을 올랐다. 그는 딱 굳은 채, 이런 날 붙잡지도 못했다.
난 빠르게 4층으로 향했다. 아버지와 멀어졌지만, 두통은 점점 심해졌다.
이는 필시, 지금 내 심정과 연관이 있으리라.
‘비참해.’
난 계속 아버지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 줬고, 그의 죄책감에서 기인한 호의를 기회로 삼았다.
그래서 전생을 자각한 후에도, 그리고 감정이 봇물처럼 터졌을 때도 아버지에게 계속 웃을 수 있었지.
오로지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계산적으로 잘 행동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저런 비꼬는 말이 서슴없이 나왔다. 그러고도 별로 큰 걱정이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은 내가 이렇게 나와도, 아버지가 날 내치지 않을 걸 아니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긴 계산 끝에 그렇게 새로운 결과가 나왔거든. 그것이 더없이 날 비참하게 만들었다.
결국 난 아버지의 쓸데없는 애정에 기대 또 그에게 감정을 표출하고 만 것이다.
‘아버지는 내게 고작 체스 말에 불과해.’
그러니 그에게 무감각해지고 싶은데.
그가 어떻게 나오든 이성적이고 냉정해지고 싶었는데.
‘난 왜 이렇게 약한 걸까…….’
그렇게 입술을 깨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있던 킬리언과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