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황태자비 궁 구석에 위치한 뒷마당. 이곳은 황궁 하녀들이 몰래 땡땡이를 치는 비밀 장소 중 하나다.
“룰룰루~.”
도로시는 한 여자를 질질질 끌며 그곳에 도착했다. 그러곤 나무 그늘 아래 있는 돗자리 위에 그 여자를 눕혔다.
돗자리 옆에는 이 여자가 마셨던 음료수 컵이 놓여 있었다. 물론, 도로시가 사전에 수면제를 넣어 놓은 음료수였다.
“이번 임무도 쉽게 성공~.”
이제 벨라디 님의 칭찬도 내 것~.
그렇게 흥얼거린 도로시는 깊이 잠든 여자의 얼굴 위로 쓰고 있던 안경을 씌워 줬다. 애초에 도로시의 안경이 아닌, 이 여자의 안경이었기 때문이다.
“아, 이것도 다시 줘야지~.”
도로시는 입고 있던 앞치마 주머니를 뒤적여 열쇠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돗자리에 널브러진 여자의 주머니에 고이 넣어 주었다.
이건 상급 하녀들에게만 지급되는 열쇠로, 황태자비의 방과 귀한 손님용 방을 제외한 모든 방을 열 수 있었다.
또한, 방금까지 도로시가 아주 잘 사용한 열쇠이기도 했다.
“랄랄라~.”
도로시는 자신의 치마를 팡팡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걸로 완전 범죄가 완성됐다.
도로시가 이 여자로 변장하는 동안 여자를 잘 숨겨 놓았고, 모든 일이 끝난 후에는 원래 있던 자리에 곱게 돌려놓았다.
그러니 의심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여자도 곧 일어나, ‘내가 언제 잠들었지? 피곤했나?’ 하면서 아무것도 눈치 못 채겠지.
도로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 마당을 벗어났다. 그러곤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다시 확인했다.
지금은 쓰러진 하녀가 아닌, 도로시 본인의 얼굴이 드러난 상황이었기에 최대한 눈에 띄면 안 됐다.
물론, 유동 인구가 아주 많은 황궁에서 하녀복을 입은 평범한 여자에게 신경 쓰는 이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도로시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녀의 예민한 귀에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황태자비 궁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와~, 아직도 피아노 강습 중인가 보네~?’
그 엘린이라는 여자가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로시는 대략 1시간 전, 마차 안에서 나눈 엘린과의 대화를 상기했다.
-이렇게 같이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가다니~, 두근거리죠~?
-쉬, 쉿. 황궁 병사들이 언제 이 마차 안을 점검할지 몰라요. 항상 불시로 찾아와서……! 아무리 투명 마법을 써서 그쪽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목소리는 가려 주지 않잖아요.
-걱정 마시라~! 기척이 느껴지면 바로 입을 다물 테니까~. 아, 그러고 보니 작은 부탁이 있는데에~.
-부탁이요?
-오늘 황태자비의 피아노 강습 시간을 조금 오래 끌 수 있을까요~?
-예? 글쎄요……. 황태자비 전하께서는 정해진 일정이 어긋나는 걸 싫어하셔서.
-하지만 오늘은 결전의 날이잖아요~. 벨라디 님의 명령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 시간을 조금 더 벌면 좋을 것 같은데~.
-……벨라디 님의! 맞아요, 오늘은 결전의 날이죠. 한번 노력해 볼게요.
-좋아요~! 우리 둘 다 벨라디 님을 위해 힘내 봐요~!
그 말에 엘린은 다부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벨라디의 구체적인 계획은 전혀 몰랐으나, 엘린은 그녀가 자신을 황태자비에게 붙인 이유가 오늘을 위해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엘린은 눈앞을 바라봤다.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첫 만남부터 투명 마법을 쓴 상태라, 얼굴도 이름도 몰랐다.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과연, 그 벨라디 님의 오른팔다웠다.
‘그러니까 나도…… 나도 열심히 해야지!’
벨라디 님을 위해서……!
자기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에 벨라디에 대한 작은 충성과 동경이 생긴 엘린이 각오를 다졌다.
덕분에 엘린이 최대한 황태자비를 붙잡는 동안, 도로시는 수월하게 임무를 끝낼 수 있었다.
‘으음~, 사실 강습 시간을 굳이 늘릴 필요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벨라디가 도로시에게 정해 준 시간이 딱 1시간이었다.
그동안은 황궁의 마력 감지 기록을 전부 꺼 놓을 테니, 황궁 내에서 마음껏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명심해, 도로시. 딱 한 시간이야.
벨라디의 낮은 목소리가 도로시의 귓가에 노래하듯 스쳐 갔다.
도로시는 조용히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아~, 벨라디 니임~. 도로시, 시간을 넉넉히 남기고 임무를 성공했어요~.’
애초에 임무는 쉬웠다. 벨라디가 모든 밑그림을 미리 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황태자비의 방도 깔끔하게 비워 두셨지~, 침실로 들어갈 비밀 통로도 알려 주셨지~, 황태자비의 개인 금고 비밀번호도 꿰뚫고 계셨지~.’
사실 하루 중, 황태자비의 방이 비워지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치밀하게 짜여진 일정으로 시녀든 하녀든 꼭 한 명씩은 그 방에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자연스럽게 말이다.
황태자비가 이렇게 자신의 방을 신경 쓰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패러그린 후작의 차명 거래 내역서를 황태자비가 보관하고 있을 줄이야~.’
후작은 혹시 모를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본인의 약점이 될 서류를 믿을 만한 아들, 딸들에게 분산하여 맡겼다.
그중 황태자비는 후작의 가장 큰 성공작으로, 그녀에게는 제일 중요한 서류를 맡긴 참이었다.
그게 바로 후작의 차명 거래 내역서였다.
패러그린 후작이 마물의 부산물을 밀수했다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
황태자비는 자신이 이 증거를 맡게 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 서류를 본인의 침실에 꽁꽁 숨겼다. 또한, 그녀는 결혼 전 활발했던 사교계 활동을 ‘황족의 품위’라는 말로 포장하여 중단했다.
그러고는 본인의 방에서 잘 나가지 않고, 어지간하면 정해진 일정대로만 행동했다. 이 과정에서 꽤나 신중히 움직였기에, 황제와 황태자는 물론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몰랐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곤.
‘위대하신 벨라디 님의 눈을 어찌 속이리오~.’
놀랍게도 도로시의 사랑, 벨라디는 이를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황태자비에게 엘린을 붙여 예정에 없던 피아노 강습을 만들어 냈다.
원래의 황태자비였다면, 변동된 일정에 맞춰 사람을 재배치해 침실을 지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몇 년 동안 무탈하게 서류를 숨겨 오기도 했고, 최근 황태자와의 다툼도 심해진 터라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게 틈을 만들었고, 벨라디는 이 틈을 노려 도로시에게 특별 임무를 내린 것이다.
‘특명! 황태자비가 숨겨 놓은 패러그린 후작의 차명 거래 내역서 사본을 만들어라~!’
도로시는 벨라디가 알려 준 대로 상급 하녀의 열쇠를 이용해 굳게 잠겨 있는 황태자비 궁 창고 중 하나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비밀 통로를 이용해 황태자비의 침실에 잠입했다.
또한, 침실에 은폐된 개인 금고를 찾아 비밀번호를 누른 후, 마법 보석을 이용해 재빨리 사본을 만들었다. 그리고 모든 걸 완벽하게 되돌렸다.
애초에 도로시는 이런 일의 전문가로, 흔적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벨라디 님은 정말 대단해~. 어떻게 이런 정보들을 전부 꿰뚫고 계신 거지~!’
황궁의 비밀 통로도 그렇고, 황태자비의 금고 비밀번호도 그렇고!
심지어 그 금고는 마법으로 열 경우, 무조건 흔적이 남는 고위 보호 마법이 걸려 있어서 반드시 번호로 열어야만 했다. 그런데 벨라디는 이를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참 이상한 일이었으나, 이미 벨라디를 본인의 우상으로 생각하는 도로시는 모든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맞아~, 우리 벨라디 님이 하늘 아래 모르는 게 있을 리 없어~!’
벨라디 님은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속옷 색깔도 알고 계실걸~!
그렇게 속으로 방방거리며 황태자비 궁 밖으로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도로시의 눈에 태평하게 정원에서 티타임을 즐기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얘! 내가 홍차에 설탕 넣지 말랬지! 체중이 늘면 네가 책임질 거니?!”
“죄, 죄송합니다.”
그녀는 황태자비의 사촌이자 시녀로, 황궁에 자주 드나드는 인물이었다. 또한 사교계에서 벨라디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덕분에 북부에 있는 도로시도 저 사촌을 알고 있었고, 한 번쯤은 크게 혼쭐을 내주고 싶었다.
‘상전인 황태자비는 열심히 피아노 연습이나 하는데, 본인은 잘 노는구나~.’
그러나 아무리 그녀가 얄미워도 지금은 상대할 수 없었다. 도로시가 다음을 기약하며, 더욱 기척을 죽이려던 때였다.
반짝-.
여름의 햇빛이 파라솔 그늘을 침범했고, 사촌의 목걸이에 빛을 반사시켰다.
“어우, 해가 들어오잖아!”
“죄송합니다!”
하녀들이 서둘러 파라솔의 각도를 조절해 햇빛을 차단했다.
곧 시야에서 목걸이가 사라졌으나, 도로시의 날카로운 감각은 그 목걸이에 무언가가 있음을 알려 주었다.
‘으음~?’
도로시는 잠시 고민하다 코너 정원수에 몸을 감추고 사촌을 관찰했다. 자세히 살펴보자, 사촌의 목걸이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로켓 목걸이…….’
그 순간, 사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원에서 드문드문 들리던 피아노 소리가 멈춘 것이다.
“어머! 강습이 끝났잖아! 왜 진작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전하께 혼나면 너희들도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하, 하지만 말씀드려도…….”
“어디서 말대꾸야! 잔말 말고 빨리 이거 치워! 다른 하녀들은 어디서 뭘 하는 거야!”
농땡이를 피우던 사촌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궁으로 들어가기 위해 움직였다. 마침, 도로시가 있던 방향이었다.
도로시는 재빠르게 걸음을 옮겨 그쪽으로 다가갔다. 덕분에 의도한 대로 사촌과 도로시가 정원 계단에서 어깨를 부딪쳤다.
“아야!”
“죄, 죄송합니다!”
도로시가 재빠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사촌은 인상을 팍 찡그리며 소리쳤다.
“감히 누구 어깨를!”
“정말 죄송합니다! 급하게 움직이다가 그만! 용서해 주세요!”
도로시는 얼굴을 보이지 않게 열심히 사과했다. 그 태도에 사촌은 혀를 쳇 차더니,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지금은 내가 바빠서 그냥 넘어가는 줄 알아!”
사촌은 그렇게 말하며 계단을 마저 올랐다.
도로시는 본인의 주먹에 곱게 숨긴 로켓 목걸이를 자연스럽게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본의 아니게 물건을 훔치게 된 것도 죄송합니다~.’
그러고는 슬쩍 하녀들을 바라봤다. 하녀들은 자기들끼리 정신없었다.
만약 황태자비가 강습을 끝내고 창밖을 봤을 때, 이 테이블을 본다면?
사촌이 또 농땡이를 피운 걸 눈치챌 테고, 그럼 누구보다 자신들이 고달파지는 게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이미 전적이 있었기에, 그녀들의 손놀림은 더욱 빨라졌다.
덕분에 사촌과 도로시의 해프닝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를 안 도로시는 스르륵 기척을 죽이고 자연스럽게 정원을 나섰다.
벨라디에게 칭찬을 들을 일이 또 생기고 말았다.
자신은 이렇게 유능하니, 과연 스스로를 벨라디의 오른팔이라 지칭할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