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27화 (128/197)

127.

그녀가 이곳에 참석해서 나를 임시 가주라고 지칭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두 인지했기 때문이다.

‘이건 명백히 황제가 증기 기관차에 흥미를 보이고 있다는 뜻이거든.’

헤라 황녀는 그 누구보다 황제가 애지중지하는 막내딸이다.

그런 막내딸의 첫 수도 바깥나들이 장소로 북부의 철도 개통식을 선택했다는 건, 그 자체로 의미하는 바가 컸다.

귀족들도 그것을 알기에 헤라 황녀의 등장으로 놀라워했던 것이다.

‘거기에 날 앨턴 양이 아닌, 임시 가주로 지칭했지.’

이것 역시, 황제가 얼마나 진지하게 이 연회를 바라보는지 알 수 있는 척도였다.

그렇게 귀족들 사이로 폭탄을 터트린 헤라 황녀는 천천히 연회를 둘러봤다. 그러더니 곧 밝게 웃으며 증기 기관차를 바라봤다.

“저것이 그 유명한 증기 기관차로군요. 과연, 위용이 남달라요!”

헤라 황녀의 당돌한 반응에 난 씨익 미소 지었다.

저걸 보니 아이도 자신의 존재가 황제를 대변하고 있음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그걸 알면서도 저리 여유로운 태도라니.’

과연 원작에서 왜 황제가 헤라 황녀에게 작위를 주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난 황녀에게 살갑게 웃으며 말했다.

“가까이 가서 보시겠어요?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답니다.”

“흥미롭군요. 가요, 오라버니!”

헤라 황녀는 팔짱을 낀 킬리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모습에 킬리언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내 안내에 따라 증기 기관차를 구경했다. 물론, 이런 우리의 모습도 그대로 기자들의 카메라에 담겼다.

“흠, 그러니까 증기 기관차는 이런 원리로 움직이는 거군요? 증기로 이런 동력을 낼 수 있다니……. 마법보다 더 신기하네요. 그렇죠, 오라버니?”

“그래, 그리리카 선황께서도 종종 그렇게 말씀하셨지. 이 세상엔 마법보다 더욱 신기한 것이 많다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걸 보니, 원작처럼 지금 둘의 사이도 나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킬리언이 오랫동안 외국에 있다 와서 걱정이었는데, 다행이군.’

그럼 네시아와도 잘 지내겠어.

마침 이 자리를 통해, 나는 네시아에게 헤라 황녀를 소개시켜 줄 생각이었다.

난 아이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때마침 증기 기관차의 두 번째 칸에서 네시아와 류스펠, 그리고 또래들이 우르르 내렸다.

“가고 싶은 역에 증기 기관차가 정차하면, 이렇게 내리면 돼요! 지금은 입구와 땅의 높이 차이 때문에 임시로 턱이 있지만, 역이 완공되면 계단을 만들어서 더 간편해질 거라 했어요!”

“와! 방금 내릴 때 조금 불편하다고 생각했는데, 잘됐군요!”

“전부 저희 언니가 고안한 거예요!”

그 말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피식 입꼬리가 올라갔다.

네시아는 본인이 솔선수범해서 또래들에게 증기 기관차를 안내하는 중이었다.

‘어쩐지, 개통식 전부터 나한테 물어 보는 게 많더라니.’

네시아가 증기 기관차를 자랑스러워하는 게 선명히 보였다.

그게 어쩐지 재밌어, 가만히 아이들의 대화를 구경했다. 이런 날 눈치채지 못했는지, 네시아는 목소리를 조금 더 높였다.

“거기다 증기 기관차가 달리면 주변 풍경이 확확 바뀌어요! 말이랑 마차보다 빠르고, 흔들리지 않아서 창밖만 구경해도 시간이 빠르게 간답니다!”

“오오, 말보다 빠르다니!”

“저도 타 보고 싶군요! 부럽습니다, 앨턴 양!”

친구들의 반응에 네시아가 턱을 높게 들었다. 아주 뿌듯한 모양이었다.

“와…….”

그걸 구경하는데 옆에서 작은 감탄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내리니, 헤라 황녀가 어느새 네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보다 빠르다니. 그럼 평균 속력이 어느 정도라는 걸까? 그 속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건가?”

헤라 황녀도 네시아의 말을 들었는지, 그렇게 중얼거렸다.

황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아직 어려 몰랐지만, 지금 보니 호기심이 왕성한 모양이었다.

‘네시아랑 잘 어울리겠네.’

난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를 불렀다.

“네시아.”

내 말에 친구들과 조잘조잘 떠들던 네시아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날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언니!”

네시아는 새로 사귄 친구들과 류스펠에게 양해를 구하고, 도도도 내게 달려왔다.

그러곤 습관처럼 안기려다, 헤라 황녀와 눈을 마주하고는 잠시 멈칫거리더니 힐끔 날 올려다봤다.

난 그런 아이를 보며 말했다.

“오늘 연회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신 분들이셔. 이분은 킬리언 앨러만 데커딜 황자님.”

내 말에 킬리언이 네시아를 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앨턴 양.”

킬리언은 건강한 네시아를 눈에 담으며 안심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네시아는 패닉에 빠져 있을 때 킬리언을 본 터라, 그를 기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는 조금 높은 텐션으로 입을 열었다.

“네시아 앨턴입니다. 오늘 연회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이 초롱초롱한 게 킬리언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그에게 상당한 호감을 느끼는 듯했다.

아무래도…… 본능적으로 킬리언에게 정령의 향기를 느꼈기 때문 아닐까?

난 킬리언의 옆에 있는 헤라 황녀도 소개했다.

“이분은 헤라 앨러만 데커딜 황녀님이셔. 네시아 너와 나이가 같아.”

“반가워요, 앨턴 양. 이렇게 처음 만나는군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헤라 황녀님! 네시아 앨턴이에요!”

네시아는 긴장이 많이 풀렸는지 헤라 황녀에게도 친근하게 인사했다.

예법에 살짝 어긋났으나, 헤라 황녀는 그게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앨턴 양, 들어보니 증기 기관차에 대해 많이 아시는 것 같은데. 제게도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앗, 제가 그래도 될까요? 증기 기관차는 언니가 더 잘 아는데…….”

그렇게 말하며 네시아는 힐끔힐끔 날 바라봤다. 말과 다르게 헤라 황녀와 어울리고 싶은 눈치였다.

‘이쪽도 첫눈에 서로 호감을 가진 모양이고.’

난 그걸 보며 후후 웃었다.

“나보다 네 설명을 더 듣고 싶으신 거야. 헤라 황녀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오렴.”

“네!”

네시아는 환하게 웃으며 헤라 황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꽤나 대담한 행동에 잠시 헤라 황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곧 네시아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았다.

“가요, 황녀님!”

“좋아요.”

네시아는 헤라 황녀를 데리고 류스펠 쪽으로 다가갔다.

난 그런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건투를 빌었다.

‘헤라 황녀의 궁금증을 잘 해소해 주려면 고생 좀 할 거다, 네시아.’

그러니 힘내 봐.

그때 내 옆에 있던 킬리언이 조용히 속삭였다.

“황녀라는 지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람을 가려 사귀는 아이인데…… 헤라가 단번에 손을 허락한 아이는 처음이네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친해질 운명이거든요.”

“운명이요?”

킬리언이 의문을 띠며 날 바라봤다. 난 굳이 대답하지 않고, 그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원작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으니까.’

“저희는 저쪽으로 가요.”

슬슬 목이라도 축일 겸, 음료가 놓인 곳으로 가려는데, 킬리언이 내게 가까이 붙었다. 그리고 은밀히 속삭였다.

“벨라디, 일전에 친화력 폭주에서 아이를 구한 보답…… 계속 생각해 봤어요.”

듣기 반가운 말이었다. 나도 목소리를 낮추며 답했다.

“잘했어요, 킬리언.”

난 갚아야 할 것들을 절대 잊지 않거든. 그게 은혜든, 원수든 말이야.

특히 킬리언에게 갚아야 할 보답은 그를 만날 때마다 가슴 한편에 무겁게 남아 있었다.

“원하는 것이 떠올랐나요?”

난 그렇게 말하며, 천연덕스럽게 킬리언과 팔짱을 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우리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발걸음을 돌렸다. 마치, 긴 증기 기관차를 구경시켜 주듯이. 음료를 마시는 것보다 그게 더 귀족들의 접근을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킬리언도 자연스럽게 나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예, 괜찮으시다면 당분간 헤라 황녀를 맡아 주셨으면 해요.”

그 말에 난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맡으라고 함은?”

“되도록 자주, 헤라 황녀를 황실에서 내보내야 할 것 같아요. 앨턴 공작가에서 그 역할을 맡아 주면 좋겠어요.”

킬리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난 분위기를 읽고, 눈치 없이 이쪽으로 오려는 귀족들을 힐끔 주시했다. 내 시선에 다가오려던 놈들이 모두 깨갱거리며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사이, 킬리언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형님이 헤라에게 일방적으로 그릇된 생각을 주입하는 것 같아요.”

“또 그쪽이 문제군요.”

“하아.”

킬리언이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언제부터인가 헤라의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말도 없어지고, 웃는 횟수도 줄고. 그래서 폐하와 황후께서 걱정이 많았는데……. 얼마 전, 헤라가 제게 그러더군요. 자신이 마갈라 제국으로 시집을 가면, 우리 제국이 더 큰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느냐고.”

그 말에 난 혀를 쯧 찼다.

“익숙한 수법이네요.”

황태자가 킬리언을 반강제로 유학 보냈을 때, 비슷한 결의 말을 했었다. 킬리언이 마갈라 제국으로 가야, 모두가 좋아진다고.

그 망할 자식은 똑같은 수를 헤라 황녀에게도 두고 있던 것이다.

‘심지어 킬리언 때보다 더 비열하게.’

킬리언을 속전속결로 보내 버렸다면, 헤라 황녀에게는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주입한 듯싶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구김살 없이 사랑받으며 자란 아이가 먼저 저런 이야기를 꺼냈을 리 없었다.

‘그것도 마치, 저게 본인의 의견인 것처럼 말이야.’

“헤라 황녀가 폐하께도 저 이야기를 꺼냈나요?”

내 말에 킬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에게 했던 것처럼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습니다. 거기다 폐하께서는 그 말을 기특하다며 가볍게 넘기셨어요. 하지만 전 다르게 생각합니다.”

“옳은 판단이에요. 이런 상황에서는 예민하게 반응해서 나쁠 것 없어요.”

현 황제는 자식들의 혼사에 대해 그들의 자유를 존중했다.

그리리카 선황도 늦은 나이에 혼인했고, 자신 역시 좋아하는 여인과 재혼했던 것이 그 이유였다.

‘덕분에 황태자는 남부와 결혼할 수 있었고, 현재까지 킬리언의 약혼도 진행되지 않았지.’

더불어 원작의 헤라 황녀도 성인 직전까지 약혼자가 없었다.

이 점을 고려해 헤라 황녀의 결혼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는데…….

난 힐끔 증기 기관차 창을 바라봤다. 우연히 타이밍이 맞아, 내부에서 네시아와 함께 웃고 있는 어린 헤라 황녀가 보였다.

“당신이 말하는 바는 알겠어요. 그렇지만…… 헤라 황녀를 데리고 있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그것만으로 황태자의 계략에서 헤라 황녀를 지켜 낼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나와 같이 두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던 킬리언은 속삭이듯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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