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24화 (125/197)

124.

사실 더너스는 북부로 돌아온 벨라디에게 곧바로 사죄했다.

자신이 충분히 보필하지 못해, 수도의 소문을 수습하지 못하신 것 같다고 말이다.

그 말에 벨라디는 아주 호탕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더너스. 그건 내가 일부러 놔둔 거니까.

벨라디는 의도적으로 사교계를 방치했다고 말해 줬다. 저들이 자신과 네시아의 부풀린 소문을 듣고, 충분히 궁금해할 수 있도록.

그래서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북부로 찾아오도록 말이다.

-사람의 호기심은 어지간한 압박으로는 막을 수 없거든. 특히 자극적인 소식에는 더더욱.

그런 벨라디의 말은 현실이 됐다. 오만한 수도 귀족들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이 개통식에 참석하고야 말았다.

더너스는 이 현상이 참 웃기면서도 신기했다.

한편, 개통식에 참석한 귀족들은 그들 나름대로 특별 관중석을 보며 위안으로 삼았다. 더너스는 다른 무리의 수다에 귀를 기울였다.

“저기 보십시오. 남부 연합에서 그렇게 가지 말라고 소리치더니, 아글라 공께서 직접 참석하셨군요.”

벨라디가 따로 마련한 특별석에는 모스틴 프레도와 함께 시온 아글라가 앉아 있었다. 귀족들은 그걸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 참. 이렇게 되면 남부도 더 이상 뭐라 압박할 수도 없겠네요.”

“뭐, 어느 순간부터 동부 연합 중 일부가 하나둘 발을 빼고 있으니. 남부 혼자 우스운 모양새가 됐습니다.”

“하하하, 맞습니다. 저기 아글라 공 말고도 드문드문 남부 귀족들이 보이기도 해요.”

“저들도 새로운 공녀가 궁금한 모양입니다.”

“크흠! 전 딱히 앨턴가의 자매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원래부터 전 증기 기관차라는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한편, 시온은 사람들이 저를 보며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애초에 그는 정치나 세력 다툼에 큰 관심이 없었고, 순수하게 친구의 새로운 사업을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학술회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북부로 넘어온 것이고.

수도에 가 봤자, 가족의 반대만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런 뒷이야기가 얽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벨라디는 이런 긴 관중석을 어디서 구한 걸까? 자체적으로 제작한 거려나?”

“오, 시온. 저기 펜스 너머 보여? 바닥에 깔린 게 철도라는 건가 봐. 네가 투자한 철광석이 다 저기에 쓰였겠네.”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니 좀 신기하다.”

시온이 저를 향한 시선을 눈치 못 챈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어머어머! 들었어요? 시온 님이 신기하다며 안경을 올리셨어요!”

“귀여우셔라!”

“그나저나 시온 님 자리에 햇빛이 너무 강하게 내리쬐는 것 같아요!”

“아아, 천막이 소용없네요. 시온 님의 백옥 같은 피부는 반드시 지켜야 되는 보물인데!”

시온이 개통식에 참석한다는 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그의 광적인 팬들이 주위에 대거 포진했기 때문이다. 그들 덕분에 시온은 다른 귀족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생겼다.

참고로 벨라디는 이것까지 계산하고 자리를 배치했다. 시온이 순수하게 자신을 축하해 주러 올 것임을 알았고, 그런 그가 쓸데없는 말로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모스틴도 이걸 알았기에, 시온이 저쪽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도록 계속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벨라디는 어디에 있는 거지?”

“그러게. 앨턴 공작님도, 멜도르도 안 보이네.”

특수 제작 된 관중석에는 사용인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샴페인 같은 음료를 전달하고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특별한 음식도 없었고, 흔한 악단도 없었다. 주최자의 모습조차 보기 힘드니, 참 이상한 연회였다.

초대받은 귀족들이 새로운 형태에 조금 질릴 타이밍이었다.

뿌우우우우-!

먼 곳에서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죠?”

다들 의아함에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때였다.

“저기 좀 보세요!”

누군가 척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러자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곳을 바라봤다.

저 멀리서 검은 점이 가까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저게 뭐예요?”

“어머, 땅이 울리는 것 같은데?”

다시금 경적 소리가 울렸다.

뿌우우우우-!

카강카강카강카강.

선로에 맞춰 바퀴가 빠르게 회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점이 연기를 내뿜으며 점점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점잖게 앉아 있던 귀족들은 처음 보는 풍경에 너도나도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모두 앉아 있었다.

“저거! 그 증기 기관차 아닌가요!”

“어유, 시끄러워!”

“세상에 저렇게 커다란 게 움직이다니!”

증기 기관차의 소리가 무척 컸기 때문에 사람들은 말을 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했다.

“가까워진다!”

“끝이 없어요! 너무 길어!”

“생각보다 훨씬 빠르군요!”

“저기에 사람과 물건을 태운다는 건가요?!”

“어쩜! 무서워라!”

“전 좀 멋진 것 같은데요!”

증기 기관차가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그만큼 흥분도 빠르게 치솟았다.

“얼른 준비해!”

“놓치기 전에 찍어!”

“지금이 증기 기관차를 한 번에 담을 때라고!”

특별 제작 된 관중석 한가운데에는 뻥 뚫려 있는 공간이 있었다. 각 신문사의 기자들은 그곳에 서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서둘러 미리 설치한 사진기의 각도를 조정한 후, 증기 기관차의 모습을 찍기 시작했다.

팡! 팡!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관중 소리에 묻혔다. 기자들은 지금 진심으로 벨라디에게 감사해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 이 자리를 안내받았을 때에는 기분이 무척 더러웠다.

물론, 평민인 자신들이 귀족과 같은 좌석에 앉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안내받은 이 공간은 의자조차 둘 수 없었다. 각 신문사마다 들고 온 사진기를 설치하면, 자리가 너무 좁아졌기 때문이다.

자신들도 나름 초대를 받아 온 건데, 이건 너무 대놓고 차별하는 것 같아 마음이 상했다.

물론, 이건 몇 분 전 상황이고. 지금은 전혀 달랐다.

벨라디가 별도로 자리를 마련해 준 덕분에 그들은 마음 편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간혹 사진기의 빛이나 소리를 싫어하는 귀족이 있어 언제나 신경 써야 했는데, 지금은 자기들끼리 모여 있으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 이 장소는 질주하는 증기 기관차와 그걸 보며 흥분한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을 수 있는 명당이었다.

“특종이다!”

“인간의 손으로 저런 걸 만들어 냈다니!”

“저건 역사를 바꿀 거야!”

기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외치며, 사진을 찍고 수첩에 기사를 써 내려갔다.

이런 기자들의 외침은 사람들의 흥분을 더욱 끌어올렸다. 귀족들은 어느새 너도나도 환호하며 기관차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빠르게 달리던 기관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역 부지에 다다른 것이다.

뿌우우우우우-.

증기 기관차는 마지막 경적 소리를 내며, 정차했다.

그 순간, 사람들은 왁자지껄 떠들던 아까와는 상반되게 침묵을 선택했다.

멀리서 보던 증기 기관차와 가까이에서 본 증기 기관차의 느낌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무언가를 생전 처음 봤다.

그 크기에서 나오는 위용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짙은 검은색에 각각의 칸이 연결된 긴 몸체.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한순간이었다.

신문에서 미리미리 증기 기관차를 봤던 귀족들은 금방 낯선 외형에 적응했다. 그리고 하나둘, 자기들끼리 증기 기관차를 가리키며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첫 시연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자 더너스를 비롯해 좌중에 섞여 있던 앨턴가 기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혹여나 누군가 난동을 부릴 경우 제압하기 위해 숨어 있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음 임무를 할 차례였다.

기사들은 재빠르게 증기 기관차의 첫 번째 칸 입구로 다가가 그 주위 펜스를 치웠다. 그러자 증기 기관차의 객실 칸 문이 서서히 열리고 아래로 간이 계단이 내려왔다.

그 모습을 본 귀족들의 수군거림이 커졌다.

“문이 자동으로 열리네요!”

“어머, 누가 안에 있어요……!”

“설마 여기 없는 앨턴 공작가의 직계들이?”

그 예상을 깨고, 제일 먼저 나온 건 멋지게 차려입은 악단이었다.

악단들은 발맞춰 입구에서 나오며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고요했던 역에서 경쾌한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그걸 듣고 나서야, 여기가 개통식 겸 소개 연회라는 걸 기억해 냈다. 다들 증기 기관차에 정신이 팔려 새로운 앨턴 공녀를 잊은 것이다.

그만큼 증기 기관차의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악단들은 수없이 연습한 대로 관중석을 크게 빙 돌며 행진했다. 그러더니 곧 정해진 구석 자리에 차례로 착석해 음악을 마저 연주했다.

이런 퍼레이드 형식은 3년에 한 번 있는 건국제를 제외하면 보기 힘들었다. 귀족들은 이런 생소한 볼거리에 즐거워했다.

그들이 악단에 집중하고 있을 때, 기사들이 두 번째 칸의 펜스를 치우자 또 다른 문이 열렸다.

그러자 귀족들이 감탄했다.

“각 칸마다 문이 따로 달려 있군요!”

“신기한 구조예요!”

“저 문은 아까보다 더 큰데요?”

곧이어 하인들이 적당한 크기의 테이블을 들고 내렸다. 그들 역시 오늘을 위해 많은 연습을 했다.

착착 신속하게 정해진 위치에 테이블을 설치한 하인들이 외워 둔 동선으로 자리를 피했다. 뒤이어 내린 웨이터들 역시 음악에 맞춰 쟁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쟁반에는 냉장 마법이 담겨 있는 마법 루비가 햇빛에 반짝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덕분에 음식은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그 신박한 아이디어에 귀족들이 감탄했다.

“맙소사, 저 귀한 루비를 고작 쟁반에 설치한 건가요?”

“음식의 신선도를 위해서?”

“앨턴 공작가가 마법 루비로 온 대륙의 돈을 끌어모았다는 말이 사실인가 봐요.”

“애초에 마법 루비 광산을 가지고 있는데 저 정도 사치도 못 부릴까.”

“전 오히려 새로운데요?”

“이것도 벨라디 앨턴 양의 생각일까요?”

흔한 연회가 아닌, 처음 보는 퍼포먼스에 귀족들은 다시금 흥분하기 시작했다.

증기 기관차에 부정적이던 한 귀부인이 말했다.

“아아, 과거 그리리카 선황의 겨울 연회를 처음 봤던 제 할머님이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건 오랜만이에요.”

이제 관중석의 귀족들은 그 누구도 앉아 있지 않았다. 대신 모두 서서, 다음에는 뭐가 등장할까 기대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웨이터들이 물러났고, 기사들은 이제 세 번째 객실 칸의 펜스를 치웠다. 그리고 문이 열리기 직전, 기자들이 미친 듯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들은 직감한 것이다. 지금이 바로, 이 연회의 하이라이트라는 걸.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