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참고로, 제플린은 아직까지 내 찬양을 늘어놓고 있었다.
“전 벨라디 님을 가르쳤다는 그 영광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겁니다……! 물론, 다시 한번 벨라디 님과 대련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지금의 벨라디 님은 또 얼마나 높은 경지에 도달하셨을지 떠올리면……!”
난 가만히 그의 주접을 듣다가, 천천히 그를 불렀다.
“제플린 빈센드.”
그의 이름을 부르자 제플린은 순식간에 수다를 끊었다. 그러고는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예, 벨라디 님.”
한순간 나에게 집중하는 모습이, 과연 내 첫 번째 부하다웠다. 난 그를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철도 개통식이 끝나면, 오랜만에 대련 한번 하자.”
내 말에 제플린이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일전에 벨라디 님께서 기사들과는 하지 않으시겠다고…….”
“넌 평범한 기사가 아니지.”
난 제플린이 환희에 차오를 말을 잘 알고 있었다.
“스승이 제자의 실력을 확인하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바로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상기시키는 것.
내 말에 제플린의 암청색 눈이 서서히 커졌다. 그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곧 심장을 부여잡았다.
“으윽! 너무… 너무 기뻐서 괴롭습니다, 벨라디 님! 다시 생각해도 믿기지 않아요, 제가 벨라디 님의 스승이라니!”
그렇게 말하는 제플린은 표정 관리에 실패한 채 헤죽헤죽 웃었다.
난 그걸 보며 조용히 손등을 내밀었다. 그러자 가까이 다가온 제플린이 조심스럽게 내 손등을 잡고 자신의 이마에 살포시 가져다 대었다.
완전한 복종의 의미였다.
“내게 했던 맹세,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벨라디 님. 당신이 천하를 호령하는 그날까지, 설령 그 길이 지옥이라고 해도. 끝까지 믿고 보필하겠습니다.”
제플린은 원래 아버지의 수하였으나, 원석을 키우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날 골랐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지금의 난 원석이 아닌 이미 완성된 보석이 되었다.
이 타이밍에 아버지가 수도로 돌아왔기에, 다시 충성을 되새길 필요가 있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있으니… 그날 했던 다짐이 떠오르네.’
제플린이 맨 처음 내게 무릎을 꿇고 충성을 바치던 날.
그때의 난 그 누구도 날 무시하지 못할 위치에 올라서겠다고 결심했다. 원작의 첫째처럼 말이다.
‘그 집념으로 만들어 낸 가장 큰 발판이…… 곧 완성이야.’
그 파급력이 내게 가져다줄 영향력이 떠올랐다. 내 입가에는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쳐졌다.
***
제플린을 기사단으로 돌려보낸 후, 난 아버지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와 따로 할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집무실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문을 두드렸다.
똑똑-.
“공작님, 벨라디 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와라.”
하인이 공손히 문을 열었다. 난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가며 아버지께 인사했다.
“좋은 오후입니다, 아버지.”
“좋은 오후다, 벨라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구나.”
아버지는 그렇게 대답하며 조금은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한 번 감정을 폭발시킨 이후로, 그는 나에게 자주 웃어 주려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만큼 거리를 지켰다. 확실히 이전보다 날 배려하는 모양새가 눈에 띄었다.
‘전에는 자기 멋대로 나에게 다가오려 했으니까.’
……차라리 그때가 더 나았을지도.
그럼 장단을 맞춰 주며, 알아서 거리를 조절하면 그만이었다. 늘 내가 해 오던 방식대로 말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변화를 선택했고, 그게 고스란히 내 눈에 밟혔다. 아버지의 진심을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은 나로서는 곤란한 일이었다.
‘난 아버지와 가까워질 생각이 전혀 없거든.’
그러니까 쓸데없는 노력 하지 않으시는 게 서로에게 편할 텐데…….
이런 내 마음을 모를 아버지는 보고 있던 서류를 마저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집무실 소파로 나왔다.
“앉자.”
“네, 아버지.”
난 아버지의 미소에 입꼬리를 올리며 화답한 후, 그의 옆 소파에 앉았다.
이것도 눈에 띄는 변화였다. 원래 난 아버지와 말을 하려면, 상사에게 보고하듯 책상을 사이에 두고 서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아버지는 내가 집무실에 오면 무조건 소파에 앉혔다.
‘아니야. 이런 행동에 일일이 의미 두지 말자.’
그러지 않아도, 난 언제나 생각에 파묻혀 살아야 하는 사람인걸.
난 뻔히 보이는 배려를 외면하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곧 철도가 완공돼요.”
“흠,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됐구나. 여름이 끝날 무렵이라 예상했는데.”
“예상외의 도움이 있었어요.”
“도움?”
“킬리언 2황자가 남모르게 움직이고 있었더군요.”
사실 난 킬리언의 도움을 크게 바라지 않았다. 그저 마법 다이아몬드를 이용해, 완성된 증기 기관차를 편리하게 이동시켜 준 것으로 충분했지.
그런데 이 남자, 조금이라도 나에게 도움이 되겠다며 은밀히 동부의 귀족들을 설득하고 다닌 모양이었다.
‘정말……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킬리언은 자신이 모은 동부의 세력을 움직여 증기 기관차에 긍정적인 여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동부의 영향력 있는 가문을 찾아가 황제의 뜻을 밝혔다고 한다.
‘그들이 황태자에게 발설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말이야.’
그가 막 데커딜 제국으로 돌아와 북부의 손을 잡겠다며 날 고른 것처럼.
그건 일종의 도박이었다. 그리고 킬리언의 베팅은 이번에도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가 고른 가문들 모두, 증기 기관차를 반대하지 않겠다며 비밀스럽게 의견을 알린 것이다.
‘킬리언이 동부 연합 내의 갈등을 정확히 이용한 거지.’
동부는 황족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고, 그만큼 황태자에게 호의적이었다. 황태자 역시 그걸 알기에 동부를 그저 방치했고.
그러나 놈이 지속적으로 남부와만 어울리는 모습은 오랜 지지층을 흔들기 충분했다. 킬리언은 정확히 그런 가문들만 쏙쏙 골라, 황제라는 카드를 보여 준 셈이다.
‘황태자의 의견에 반대를 할 명분으로 말이야.’
덕분에 동부의 강한 결집력은 아무도 모르게 금이 가고 말았다.
이렇게 보면, 킬리언도 통찰력과 관찰력이 참 남다른 인간이었다.
“강력한 반대 세력 중 하나가 꺾인 걸 알았으니, 마음 편하게 속도를 올릴 수 있었어요.”
내 설명에 아버지가 작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도 지금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킬리언 황자가 수완이 좋구나.”
“맞아요, 아버지.”
난 그렇게 대답하며 본론을 꺼냈다.
“이제 개통식만 남았는데……. 그와 관련해서, 아버지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뭐지?”
난 그에게 조용히 내 계획을 읊었다. 내 말을 다 들은 그가 흥미로운 기색을 보였다.
“재미있겠구나.”
“즐거운 시간이 될 거예요.”
내가 세운 계획 중 즐겁지 않은 것이 없거든.
물론 나 한정으로 말이다.
***
그날은 날이 아주 화창했다. 푸른 하늘과 높이 떠 있는 구름이 꼭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또한, 한적한 더미 영지에서 이례적으로 귀족들이 잔뜩 모였다. 그들은 관중석처럼 마련된 자리에 앉아 저마다 수다를 늘어놓았다.
“도대체 그 ‘증기 기관차’라는 게 뭐라고 이렇게 난리인 걸까요?”
“신문으로 보니까 아주 길게 생겼던데요.”
“전 너무 투박해서 별로였어요. 거기다 석탄을 이용한 운송 수단이라 옷이 쉽게 더러워진대요.”
“끔찍해라!”
“애초에 안전하긴 한 걸까요? 그리리카 선황 시절에도 폭발 사고가 있었다면서요!”
“저도 들었어요. 앨턴 공작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사실 전 이 개통식도 오고 싶지 않았어요.”
“맞아요, 수도도 아니고 저희가 직접 북부까지 와야 한다니! 텔레포트 진에 마차가 몰려서 대기만 몇 분을 했는지 몰라요.”
그 말에 한 귀부인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새로운 앨턴 공녀를 이 자리에서 소개한다는 말만 아니었어도…….”
그 말에 너도나도 목소리를 높여 동조했다. 관중석에 섞여 그걸 가만히 듣던 더너스는 조용히 생각했다.
‘제플린을 따라 하고 싶지는 않지만…… 벨라디 님은 정말 천재 중의 천재가 아닐까?’
한동안 북부에 있던 더너스였으나, 그에게도 나름 연락망이 있었다.
더너스는 그걸 통해, 벨라디와 네시아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이 사교계에 팽배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벨라디가 철도에 집중하느라 그 소문을 수습하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묘한 죄책감마저 들었다.
‘내가 더 일을 잘했다면…… 벨라디 님이 다른 일에 집중하셨을 수 있었을 텐데.’
바바는 이런 더너스에게 괜한 자책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게 영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골치 아픈 일은 또 있었다.
바로, 개통식을 방해하는 황태자 측의 움직임이었다.
그들은 증기 기관차가 최종 완성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들이 당했다는 걸 그제야 인지한 것이다.
‘정말로 벨라디 님이 성인이 되고 나서야 증기 기관차를 준비했다고 믿은 건가.’
다들 노련한 정치꾼들이라 들었는데, 참 순진한 생각이었다.
하여튼 본인들이 늦었다는 걸 깨달은 황태자 측은 부랴부랴 방해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벨라디에게 협박이 안 통하는 걸 알기에 그들은 수도 사교계에 집중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증기 기관차가 위험하고 더럽다며 소문을 퍼트렸다. 또한, 남부에 기반을 둔 신문사에 부정적인 기사들을 찍어 내도록 강요했다.
거기다 개통식의 초대장이 날아온 날에는 귀족들에게 은근한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가뜩이나 수도가 아닌 낯선 북부에서 열리는 행사이기에 부정적인 인식이 심했다.
여기에 황태자 측의 압박도 가해지니, 귀족들은 다들 개통식에 참석하지 않을 거라고 떠들었다.
그러나…….
“벨라디 앨턴 양도 정말 고단수예요. 새로운 공녀를 이렇게 이용하다니!”
“이러려고 일부러 공개하지 않은 걸까요?”
“그럴 수도 있어요. 모두 궁금해 발을 동동 구를 때까지 숨겨 놓았다가, 결정적일 때 짠! 내미는 거죠.”
“어머, 아무리 입양아라도 이제 가족인데……. 동생을 도구처럼 이용하는 건가요?”
“역시 그 소문이 사실인가 봐요. 양딸을 질투한 친딸.”
“하긴, 앨턴 공작님과 벨라디 앨턴 양의 사이가 썩 좋지는 않지요.”
귀부인들은 그렇게 말하며 쭈욱 좌중을 둘러봤다. 개통식에 마련된 자리는 모두 만석이었고,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북부의 귀족들이 많이 참석했음을 감안해도 이건 예상 이상이었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였다.
“다들 말만 안 온다고 하고, 알음알음 참석했네요…….”
한 명이 그렇게 말하자 같이 흉을 보던 귀부인들이 쫘악 부채를 폈다. 그러고는 자신의 얼굴을 살며시 가렸다.
더너스는 그걸 보며, 다시금 놀라움을 느꼈다.
‘벨라디 님의 예측이 정확히 맞아떨어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