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21화 (122/197)

121.

마침 날이 좋았다. 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약속 장소인 정원으로 향했다.

깔끔하게 관리된 정원에는 천막과 테이블, 의자가 가지런히 준비돼 있었다. 하녀들도 공손히 고개를 숙인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약속 시간이 다 됐기에, 난 네시아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곧 로버가 익숙한 얼굴들을 이쪽으로 안내했다.

“벨라디, 오랜만이다!”

큰 키의 금발을 가진 남자가 내게 반갑게 인사했다. 나 역시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서 와, 모스틴.”

그런 모스틴의 옆에는 네시아 또래의 남자아이가 있었다. 아이가 날 보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벨라디 누나.”

그 모습에 난 모스틴을 맞이했을 때보다 더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류스펠.”

내 말에 류스펠이 사르르 웃었다.

류스펠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키가 많이 큰 상태였다. 덕분에 훨씬 의젓해 보였다.

그때, 네시아가 조용히 물었다.

“언니, 저분들은 누구예요?”

“프레도 공작가의 형제야.”

“아~, 프레도 공작가.”

내 대답에 네시아가 눈을 깜빡이며 류스펠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처음 보는 자기 또래의 아이가 무척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류스펠 역시, 아닌 척 네시아를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난 씨익 웃었다.

‘원작에서도 네시아와 류스펠은 첫 만남부터 호감을 갖지.’

물론 지금은 서로가 처한 상황이 원작과 달라졌으나, 사람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오늘을 기점으로 저 둘은 친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모스틴은 그렇게 말하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자동적으로 류스펠은 네시아의 맞은편에 앉게 됐다.

난 모스틴과 류스펠에게 네시아를 소개했다.

“이제 우리 앨턴가의 막내가 된 네시아야.”

내 소개에 네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난 후, 예법에 맞춰 부드럽게 인사했다.

“네시아 앨턴입니다.”

그레이스 백작 부인에게 확실히 배웠는지, 동작은 우아하고 자연스러웠다. 그 모습에 모스틴이 씨익 미소 지었다.

“만나서 반가워, 네시아. 난 벨라디 친구 모스틴 프레도라고 해.”

“류스펠 프레도입니다.”

네시아와 류스펠의 시선이 다시 맞닿았다.

네시아는 류스펠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고, 류스펠은 홍조를 띤 채 네시아의 시선을 가만히 받았다.

그 순간, 나와 모스틴도 눈길을 교환했다. 모스틴이 눈빛으로 물어 왔다.

‘저거 무슨 분위기냐?’

나도 눈으로 대답했다.

‘좋은 분위기지.’

그러자 모스틴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먼저 네시아를 소개받을 줄 몰랐네. 앨턴 공작님께서 그동안 꽁꽁 숨겨 놓으셨잖아?”

“그래도 교우 관계는 넓혀야 하니까.”

프레도 형제를 초대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심리적으로 불안해하는 네시아에게 또래 친구가 있으면 좋을 거라는 설득이 아버지에게 정면으로 먹힌 덕이었다.

류스펠의 형인 모스틴이 나와 절친인 것도 한몫했다.

‘거기다 아버지도 언제까지 내가 네시아에게만 신경 쓸 수 없다는 걸 잘 아시지.’

그러니 이 만남은 순전히 네시아와 류스펠을 위해 성사된 것이다.

눈치 빠른 모스틴은 이를 금방 알아채고는,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며 둘 사이의 긴장을 완화시켰다. 나도 거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했고.

덕분에 차 한 잔이 다 비워질 무렵에는 슬슬 둘만 있어도 좋을 만큼 분위기가 풀렸다.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정원에 꽃이 만개했을 때지. 어때, 네시아? 류스펠에게 그걸 구경시켜 주는 건?”

내 말에 네시아가 류스펠을 바라봤다.

“프레도 공자. 꽃 좋아하시나요?”

“……네, 좋아합니다. 앨턴 양.”

“그럼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언니 말대로 지금 정원의 꽃이 아주 예뻐요!”

네시아는 해맑게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류스펠도 조심스럽게 일어나 네시아의 곁으로 향했다.

“이쪽이에요, 프레도 공자!”

“류스펠이라고 불러 주세요.”

“이름으로요? 그래도 괜찮나요?”

“그럼요. 대신 저도 네시아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요?”

“와! 좋아요!”

아이들은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며 정원 쪽으로 사라졌다. 그걸 보며 모스틴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야, 꽃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좋다고 졸졸 따라가네.”

“이 기회에 좋아질지도 모르지.”

“서부 연말 연회에서 류스펠에게 소개해 주고 싶다던 아이가 저 애야?”

“맞아.”

난 하녀가 다시 따라 준 차를 마시며 흔쾌히 대답했다. 내 말에 모스틴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저 애 진짜 소름 돋을 정도로 너희 어머니랑 닮았다. 핏줄이 아니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야.”

“뭐……. 나도 신기해.”

사실 전혀 신기하지 않지만.

그때, 모스틴이 조금은 진지한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신문은 봤어?”

그 말에 난 들고 있던 찻잔을 탁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그럼. 진작에 확인했지.”

안 그래도, 우리 가문을 직접적으로 공격한 그 간 큰 신문사를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 중이었거든.

난 얼마 전부터 수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그 기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떠올릴 수 있었다. 제목은 이랬다.

「앨턴가 자매의 핏빛 싸움! 양녀를 질투한 친딸의 납치 사주?!」

그 내용은 더욱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앨턴 공작가의 ‘장녀’가 가문의 ‘양녀’를 납치했다는 의혹이 수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현재 사교계는 앨턴 공작가의 갑작스러운 입양, 그리고 그 양녀의 납치 미수 사건으로 한창 시끄럽다. 거기에 사건의 범인 후보로 앨턴가의 장녀가 떠오르자,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본 신문사는 어렵게, 납치를 사주받았다는 남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 달 전,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키 큰 여자가 어린아이를 납치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그 여자가 제공해 준 것이라며 검은색으로 도배된 마차와 숲속의 낡은 가옥을 안내했다. 또한, 여자에게 받은 거액의 금액도 거리낌 없이 본 신문사에 공개했다.

남자는 이를 밝힌 이유로 “납치 시도의 처벌보다, 앨턴가의 보복이 더 두렵기 때문”이라 밝혔다.

사상 초유의 앨턴 공녀 납치 미수 사건. 유력한 용의자인 앨턴가의 장녀는 현재 수도 저택에서 자숙 중이라 알려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엉망진창이던데.”

모스틴이 디저트를 먹으며 말했다. 난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교묘하게 법도 피해 갔지.”

귀족의 이름을 함부로 쓰면 귀족 모독죄로 처벌받는다. 이름과 작위를 함께 적으면 이중 처벌도 가능했다.

그렇기에 신문사들은 귀족에게 불리한 기사를 쓸 때 장녀, 후계자, 막내 등등 우회하는 표현을 주로 사용했다.

그렇게 쓰면, 최악의 상황에서 재판관에게 선처를 바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은 이런 상황 자체를 피해 가려고 하지만.’

특히 우리 가문 같은 고위 귀족과의 싸움은 더더욱.

그러나 딱 하나, 믿을 수 있는 뒷배를 가진 경우는 제외였다. 모스틴도 이걸 알기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태자 전하가 그 신문사를 은밀히 후원하는 건 알고 있는데……. 왜 벨라디 널 공격했을까? 심지어 그렇게 조잡한 증거들로?”

그렇게 중얼거린 모스틴이 팔짱을 끼며 날 주시했다.

“거기다 요즘 사교계 분위기, 너도 알지?”

“알다마다.”

최근에는 다시 사교계에 두문불출하지만, 귀는 언제나 열려 있으니까.

사교계에서는 이 기사들을 토대로 날 향한 악의적인 소문들이 떠돌고 있었다.

신문의 기사는 사실이며, 한동안 내가 나타나지 않은 것도 전부 네시아를 경계하느라 그런 거라나, 뭐라나.

그리고 소문의 출처는 황태자비 측으로, 너무 뻔한 연출이었다.

‘이렇게 티를 내니, 황태자가 처음 구상했던 그림이 뭔지 예상이 가네.’

분명 황태자는 네시아를 빼돌릴 수 있다고 자신했을 것이다. 그러니 미리 증인이나 증거들을 마련해 놓았겠지.

‘신문 기사에 적힌 것들은, 네시아의 납치에 성공했다면 대번에 신빙성을 얻고 사실처럼 여겨졌을 테니까.’

당사자를 손에 넣었으니, 증거 조작이 얼마나 쉬웠겠어?

그리고 확실히, 네시아를 공격한 괴한들의 전력은 상당했다.

‘정확히는 그 괴한들이 섭취했을 마물 부산물의 효과가 말이야.’

앨턴가의 호위 기사들과 멜도르만으로는 네시아를 지킬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니 그날은 정말로 아이가 납치당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가 미처 몰랐던 게 있지.’

바로, 네시아에게 정령의 힘이 있다는 것.

정령의 기운으로 꽁꽁 숨은 아이는 아버지도 나도 찾기 힘들었다. 아마 같은 정령사가 없었다면, 누구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북부에 있어야 할 내가 너무 빠르게 수도로 돌아왔으니, 황태자의 예상은 보기 좋게 틀어졌다.

‘그래도 이대로 어영부영 상황이 넘어가면 너무 아까우니까 일단 준비해 놓은 증거라도 뿌려 대는 건가.’

일시적으로나마 내 평판을 망칠 생각으로?

그래도 나름, 그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다.

딱히 진실에 관심 없는 작자들은 옳다구나 그 소문들과 기사들을 퍼뜨리고 부풀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작가의 친딸과 양녀의 대립 구조. 재밌잖아.’

사람들의 이목을 충분히 살 만하지.

그렇게 내가 네시아를 달래고 철도에 집중하는 사이, 소문은 점점 덩치를 키웠다. 모스틴은 지금 그걸 걱정하는 것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생각이야? 공작님은 뭐라고 안 하셔?”

“아버지는 원래 소문과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 분이니까. 이상한 소문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니, 그저 놔두라고 하시네.”

괜히 앨턴가가 나서면 일만 더 커진다는 것이 아버지의 판단이었다. 그건 어느 정도 맞았다.

‘황태자 측도 그걸 알고 일부러 날 자극하는 거지.’

그들은 내가 저 신문사나 기사에 나온 증인이라는 남자를 처리하는 순간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납치 때 쓰려던 마차나 가옥을 주시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야 ‘앨턴의 보복이 시작됐다. 역시 무언가 있는 것이다.’라는 여론 조작을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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