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20화 (121/197)

120.

아버지가 아무리 다정하게 말을 걸고 달래 봐도 네시아는 요지부동이었다.

뒤에서 그걸 지켜보던 난 한숨을 쉬었다.

‘하아, 또 죄책감이 생기네.’

따지고 보면 네시아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그래도 긍정적인 아이이니, 한숨 자고 나면 기운을 차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태가 내 예상보다 심각했다.

난 책임감을 느끼며, 네시아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네시아.”

자연스럽게 아이를 부른 순간이었다.

“언니?”

네시아는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휙 걷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퉁퉁 붓고 생채기가 남아 있는 얼굴로 아이는 날 주시했다.

“언니!”

그러고는 맨발로 뛰쳐나와 내 품 안에 뛰어들었다. 얼떨결에 네시아를 안아 든 난 잠시 눈을 깜박였다.

‘뭐지……?’

본능적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도 살짝 놀란 얼굴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주변의 하녀들과 주치의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해했다.

내 뒤에 있는 로버만이 짝짝짝 박수를 치며 말했다.

“역시! 네시아 아가씨는 벨라디 님이 필요한가 보군요!”

그러니까, 왜 하필 나를?

***

정신을 차린 네시아는 내게 달라붙은 이후, 한시도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괴한의 습격이 아이에게 큰 트라우마를 안긴 게 분명했다.

“네시아, 난 북부로 돌아가야 해.”

내 말에 얌전히 안겨 있던 네시아가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그러고는 겁에 질린 얼굴로 날 바라봤다.

“저도 북부로 갈래요.”

“네시아.”

“언니랑 떨어지기 싫어요. 무서워요.”

“괜찮아, 네시아. 이 저택은 그 어디보다 안전해.”

내 위로도 소용없었다. 네시아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원작을 통해 아이의 고집이 상당하다는 걸 알았기에, 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냉정하게 쳐내지도 못하겠네.’

그러다 아이가 내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면 곤란하니까.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일단은 수도 저택에 남아 있기로 했다. 북부에 있는 영상석으로 로미에게 상황을 알리니, 로미는 흔쾌히 알았다고 대답했다.

-겁에 질린 아이 옆에는 부모가 있어야 하죠.

-난 네시아의 부모가 아니야.

-벨라디 님은 부모 이상으로 의지가 되는 언니니까요. 아, 방금 말은 공작님께 비밀로 해 주세요.

로미는 그렇게 후후 웃었다.

그 모습에 난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 후, 영상석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수도에 있는 로미의 가족들을 북부로 초대한다는 초대장을 보냈다. 타지에서 혼자 고생할 그녀를 위한 선물이었다.

그 외에도 더너스와 바바, 그리고 도로시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내 설명을 들은 도로시는 특유의 늘어지는 말투로 징징거렸다.

-으앙~, 싫어요오~! 이제야 벨라디 님을 바로 곁에서 모실 수 있다고 도로시가 얼마나 좋아했는데에~! 벨라디 님 돌아와요! 도로시 옆으로 돌아와 줘요오~!

감시자들 중에서 가장 자유분방한 도로시였기에 가능한 투정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다루기도 쉬운 편이었다.

-내 애마인 알렉산더를 잘 돌보면 상을 주지.

-꺄아~! 벨라디 님이 주는 상~! 도로시, 열심히 할게요~.

이와 대조되게, 더너스와 바바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질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벨라디 님.

-낄낄낄, 인기 많은 주인은 바쁠 수밖에 없지. 암-.

다행히 나 없이도 잘 돌아가게 시스템이 정비된 터라, 공사는 탈 없이 굴러갔다. 그래도 내가 아예 확인을 안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난 네시아를 재운 한밤중에 텔레포트 진을 이용해 북부로 향했다. 그곳에서 공사 상황을 점검하고, 추가적인 사항들을 지시했다.

그리고 일감을 들고 수도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상당히 살인적인 일정이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진작 과로로 쓰러졌을 것이다. 기초 체력이 월등히 뛰어난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지만.

‘게다가 원래 난, 장애물이 많을수록 그걸 뛰어넘는 것에 짜릿함을 느끼는 사람이거든.’

오히려 지금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수고한 몫은 전부, 네시아를 탄생시킨 셰넌에게 돌려받을 예정이니까.

‘이자까지 쳐서 두둑하게 말이야.’

수도에 남아 편리한 점도 있었다. 바로, 네시아와 멜도르를 공격한 괴한들의 정체를 실시간으로 조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급소를 공격해도 정신을 잃지 않았다, 이 말이지?”

“맞아, 마법도 별 소용 없었어.”

부러진 오른팔에 큼지막한 깁스를 한 멜도르가 침대 헤드에 기대며 투덜거렸다.

“그놈들…… 고통도 느끼지 않았고,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제정신도 아니었어. 게다가 근력도 어지간한 사람보다 몇 배는 더 강했고.”

멜도르의 증언은 괴한을 상대했던 다른 기사들과 정확히 일치했다.

난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역시 각성 상태였나.’

그때, 멜도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누나.”

“응?”

“이건 나만 확인한 게 아닐 테지만…….”

멜도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와 눈을 마주했다.

“아무래도 그 괴한 중에 황실 소속 기사가 포함된 것 같아.”

“그걸 어떻게 알아?”

“놈들이 검을 쓰는 자세만 봐도 딱 티가 나지.”

멜도르는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었다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습관은 전부 드러나니까. 분명 괴한들 중 일부는 황실 근위 기사단의 고유 기술을 사용했어.”

그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증언도 잘 참고할게.”

멜도르만큼 검술 이론을 빠삭하게 아는 이도 드물었다. 거기다 몇몇 기사들도 멜도르와 같은 주장을 했다.

나 역시 황태자의 개였던 전 호위 기사를 봤으니,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근거였다.

‘이제 생포한 괴한들의 증언을 들으면 될 텐데.’

전 호위 기사를 비롯해, 생포한 놈들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사실 대부분의 괴한들은 심각한 상처를 밤새 방치하다 사망했기에, 살아남은 이들이 몇 없기도 했다.

잔인한 말이지만, 그렇게 사망한 괴한들의 시체는 전부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다. 마물의 부산물을 오남용했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이었다.

‘덕분에 이번 사건에 부산물이 사용된 건 확실해졌지.’

사실 이 부작용은 널리 알려진 것이 아니었다. 나도 북부에서 기록을 꼼꼼히 확인하지 않았다면, 무슨 영문인지 도통 몰랐을 것이 뻔했다.

‘텅 빈 지하 감옥을 보고 황망해했던 아버지처럼.’

아마 황태자 측도 부작용을 다 알고 있었겠지. 그러니 무턱대고 그렇게 많은 수의 괴한을 보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남은 자들을 잡아 심문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하고 말이다.

‘시체가 녹아 버리면, 저절로 뒷수습이 되니까.’

난 아버지에게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며, 킬리언이 그 부산물을 추적하고 있다 알렸다. 내 말에 아버지는 이번 사건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겠다고 결정했다.

원래 귀족들은 납치 피해 사실을 쉬쉬했다. 여아라면 더더욱.

후에 어떤 구설수에 휘말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물의 부산물이 얽혀 있으니, 그냥 눈 감을 수 없었다.

거기다 이 일을 수면 위로 끄집어 올리면 킬리언이 움직이기 편해진다.

‘이제는 정말로 킬리언의 역할이 중요하겠어.’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는 동안, 침대에 앉아 있던 네시아가 포크로 사과를 콕 찍었다. 그러고는 멜도르의 입에 가져다 댔다.

“오빠, 아-.”

“야, 내가 먹겠다니까 왜 이래? 귀찮게 하지 마.”

“아-.”

“……아.”

멜도르가 마지못해 입을 벌리자, 네시아가 사과를 넣어 주며 웃었다. 그걸 본 멜도르는 사과를 우물거리며 부끄러운 듯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난 약간 안심했다.

‘그래도 멜도르가 끝까지 네시아를 지키려 했다지.’

그 덕에 네시아는 멜도르 곁에서 그나마 경계심을 놓았다. 그리고 더 친근하게 멜도르에게 다가가는 중이었다. 멜도르 역시 이런 네시아가 싫지 않은지, 튕기는 척하며 전부 받아 줬고.

아버지는 이 모습을 섭섭해하면서도 뿌듯한 눈으로 바라봤다.

-형제끼리 우애가 좋으면, 그걸로 됐다.

‘우애라…….’

솔직히 난 네시아가 하루빨리 안정을 되찾아 내게서 떨어지길 바라는 입장이다. 아무리 네시아를 신경 쓰기로 했어도, 내가 직접 일일이 돌보겠다는 뜻은 아니니까.

언제까지 네시아의 응석을 받아 줄 수는 없잖아?

그래서 오늘, 특별한 손님을 초대한 참이었다.

내가 일어나자 네시아에게 딸기를 받아먹던 멜도르가 날 올려다봤다.

“벌써 가게?”

“오늘은 손님이 오거든.”

“손님? 누구?”

“너도 잘 아는 애들.”

멜도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몸조리 잘해. 마법사에게 팔은 중요하니까.”

“나도 알고 있어.”

멜도르가 살짝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괴한의 습격을 막지 못한 것에 자존심이 많이 상한 듯싶었다.

난 멜도르를 위로할 겸, 손을 뻗어 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손길에 멜도르의 눈이 커졌다.

“…뭐야?”

“내가 원한다면, 머리를 내어 줄 의향이 있다며.”

난 일부로 서부 연합의 연말 연회에서 멜도르가 했던 말을 인용했다.

멜도르 역시 그걸 눈치채고는 얼굴을 붉혔다. 내가 자신의 말을 기억하고 있어 기쁜 한편, 그때 자신의 발언을 창피해하고 있는 게 티가 났다.

“오빠, 얼굴이 빨개요.”

네시아가 키득키득 웃었다. 멜도르는 그런 네시아를 힐끔 흘겨봤다. 그러면서도 얌전히 있는 게, 창피함보다는 기쁜 마음이 큰 모양이었다.

그렇게 멜도르의 마음을 달래는데, 멜도르가 날 올려다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나, 나한테 생각해 보라고 했던 부탁들…….”

그 말에 난 눈에 이채를 띠었다.

“결정했니?”

“조금 신중하게 생각하고 싶어. 시간을 더 줄 수 있어?”

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집 강한 멜도르가 저렇게 나온다는 건, 조만간 내 부탁을 전부 승낙할 징조였으니까.

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편할 때 말해. 계속 기다릴 수 있으니.”

내 말에 멜도르는 살짝 굳어 있던 표정을 풀며 웃었다.

그렇게 할 말을 다 한 후, 난 놈의 배웅을 받으며 방을 나왔다. 네시아도 서둘러 날 따라왔다.

“언니! 같이 가요!”

네시아는 해맑게 웃으며 내 허리에 매달렸다. 그러며 방긋방긋 미소를 지은 채, 얼굴을 비볐다.

“벨라디 언니이-.”

난 네시아의 애교를 잠시 내려다보다, 별다른 반응 없이 걸음을 옮겼다.

네시아는 이런 나라도 좋은지, 헤헤거리며 손을 잡아 왔다. 요새 네시아는 내 손을 잡는 걸 가장 좋아했다.

‘이쯤 되면 그냥 자기 욕망을 챙기는 것 같기도 하고…….’

첫날 만들어진 공포심은 이미 소멸한 지 오래다. 네시아는 이제 완전히 마음을 열었다.

사실 그런 네시아에게 약간의 거부감은 남아 있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기에 굳이 밀어 내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런 티 나는 부정이 아닌, 적절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거리감이 필요했다.

‘그럼 역시, 새로운 관심사를 줘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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