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일단 이렇게 있으면 안 돼.’
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좀 흥분한 것 같으니, 먼저 들어가 볼게요.”
난 아버지가 붙잡을 새도 없이 빠르게 집무실을 나왔다.
복도로 나오자, 언제 소식을 들었는지 스티아가 고개 숙여 내게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벨라디 님.”
아버지의 집무실은 방음이 매우 잘 됐기에, 스티아가 내 목소리를 들었을 가능성은 현저히 적었다. 스티아의 표정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괜히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야, 진정해.’
이런 생각만 하다가는 여유를 되찾는 시간이 느려질 뿐이다.
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표정은 어느덧 원래의 나로 돌아와 있었다.
“가자.”
“예.”
난 발걸음을 옮기며 속으로 다시 되뇌었다.
‘그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들키면 안 돼.’
난 더 완벽하고, 더 당당한 모습만 보여 줘야 해. 그래야 여자지만 후계자로서 손색이 없다고, 세상에 인정받을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아까 했던 행동 하나하나의 효율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감정적으로 나온 건 예상치 못했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동요를 끌어낸 건,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아버지의 감정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하지만, 날 향한 죄책감이 사라진 건 아닌 듯싶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러니 다음을 생각하자, 다음을…….’
아버지의 말투와 표정, 내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다음을 예측했다.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해야만 안심할 수 있었다.
새삼, 오늘은 잠을 이루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
다음 날, 난 곧바로 아버지를 찾아가 사과했다.
“전날은 제가 무례하고 건방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직은 아버지와 척질 수 없었다. 또한 내가 한순간의 감정을 참지 못하고 일을 벌였으니, 빠르게 수습하는 게 정답이었다.
난 진지하고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께 실망을 안겨 드려 할 말이 없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
“벨라디.”
아버지는 생각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날 불렀다.
거기서 난, 그가 아직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다행이군.’
어제 일로 아버지가 날 괘씸하게 여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앨턴을 등지기에는 너무 많은 걸 이곳에 배팅한 상태였다.
최악의 경우, 원작의 정보를 이용해 아버지를 협박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아버지를 협박하는 건 내키지 않는단 말이야.’
이런 상황이었는데, 아버지의 기분이 생각보다 괜찮으니 나도 모르게 안도감이 들었다.
그사이, 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오히려 난…… 너에게 고맙다.”
아버지는 조금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한 네 마음을 말해 줘서 정말 고마워. 뒤늦게나마 너에게 잘해 주고 싶어, 내가 순서를 잘못 짚었다. 덕분에 깊이 반성할 수 있었어.”
아버지의 말에 난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버지가 내게 고맙다고 말하다니…….’
수고했단 말은 몇 번 들어 봤지만, 고맙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난 생소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제 일로 생각이 정말 많아진 건가.’
그것이 내게 어떤 이익으로 돌아올지 가늠을 잘해야 했다.
잠시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데, 아버지가 날 응시했다.
“어제는 정말 미안했다. 네 말대로 아무도 의지하지 못하도록 만든 건 다름 아닌 나인데…… 속상한 마음에 말을 쉽게 한 것 같아.”
심지어 사과까지 해?
어제를 계기로 날 향한 죄책감이 더 깊어졌나?
“그리고.”
아버지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난 본능적으로 그가 과거의 일까지 전부 사과하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아버지. 앞으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 딸이 되도록 더욱 노력할게요.”
저 사과까지 받으면 내게는 선택지가 생기고 만다.
아버지를 용서하고 화해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지만 그 무엇도 내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용서한 척하면 후에 연을 끊을 때 명분이 없고. 그렇다고 받아 주지 않으면, 그건 그것대로 애매해지니까.’
그래서 난 그의 사과를 받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옅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넌 이미 내 기대에 충분히 부응했다. 그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운 딸이야.”
딱히,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아버지는 어제의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은 눈치였으나, 난 일부러 말을 돌렸다.
“킬리언 황자 건을 멋대로 결정한 것도 죄송해요.”
내 말에 아버지는 잠시 침묵하셨다. 그리고 잠시 후, 진지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벨라디, 정말 킬리언 황자가 황태자에게 복수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거냐.”
“네, 아버지.”
난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킬리언 2황자는 분명 황태자를 실각시킬 거예요.”
그렇게 되도록 내가 최대한 도울 생각이었다. 애초에 원작에서도…….
여기까지 생각하던 난 잠시 한쪽 눈썹을 까딱거렸다.
‘원작에서도…… 킬리언이 황태자를 쫓아냈던 것 같은데.’
그런데 그게 언제지?
잠깐 고민했으나, 지금은 아버지의 앞이라 깊이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확신을 담아 말할 뿐이었다.
“어차피 황태자와 전 같은 길을 갈 수 없어요.”
“너무 이른 판단일 수 있다.”
“황태자는 이미 절 적으로 인지했어요.”
난 아버지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네시아와 멜도르를 습격한 괴한들의 배후가 황태자일 가능성이 높아요. 거기서부터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죠.”
아버지도 이 말에는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는 입을 다물고, 날 응시했다. 난 그런 아버지에게 나름의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번에도 절 믿어 주세요, 아버지. 언제나처럼 결과로 증명할게요.”
“……그래, 넌 능력 있는 아이지.”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한참이나 날 응시했다. 그러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셨다.
“혹여 킬리언 황자와의 일이 실패해도, 뒷일은 걱정하지 마라. 그건 내가 책임지고 수습할 테니.”
그런 일 따위 일어날 리 없으나, 난 그저 가지런히 입꼬리를 올렸다.
“네, 아버지. 감사해요.”
‘휴우, 그래도 이렇게 산 하나를 넘었군.’
중요한 과제를 하나 끝낸 기분이었다.
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소파에 앉은 자세를 바꾸었다. 그러며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를 전환했다.
“네시아와 멜도르는 좀 괜찮나요?”
“네시아는 아직 잠들어 있고, 멜도르는 깨어났다고 하는구나.”
“찾아가 보셨나요?”
“아직이다.”
“아, 제가 너무 이른 시간에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가 보질 못하셨나 보네요.”
결국 밤을 새우고, 날이 밝자마자 아버지를 찾아온 것이다. 그러니 그도 멜도르를 볼 틈이 없었을 테다.
“마침 저도 멜도르의 상태가 걱정되는…….”
내가 여기까지 말한 참이었다.
똑똑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로버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님! 로버입니다!”
“들어와라.”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로버가 서둘러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 있는 날 확인하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벨라디 님도 여기 계셨군요. 네시아 아가씨께서 깨어나셨습니다!”
그 말에 아버지가 소파 상석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태는 괜찮은 건가?”
그렇게 물어보고선, 아버지는 로버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걸음을 옮겼다. 아이가 깨어났다는 말에 걱정이 앞선 모양이었다. 나도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로버는 우리 뒤에서 서성이며, 살짝 머뭇거렸다. 그 모습에 아버지는 잠시 로버를 바라보다, 아무 말 없이 걷는 속도를 높였다.
로버에게 듣기보다는 본인이 직접 확인할 생각인 듯싶었다.
난 잠시 고민했다.
‘지금 내가 네시아를 볼 필요는 없지.’
아이는 이제 안전하니까.
거기다 네시아와 아버지의 다정한 모습도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결정을 내린 난 아버지와 보폭을 맞추던 발을 멈췄다. 그러자 그가 뒤를 돌아 날 바라봤다.
“벨라디?”
“아버지, 전 그만 북부로 돌아갈게요.”
“지금? 그래도 네시아는 한 번 보고 가는 게 어떻겠나.”
“네시아가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 괜찮아요. 중요한 공사를 앞두고 급하게 온 거라, 그쪽 상황이 걱정되네요.”
“흠…… 알겠다. 일이 걱정되면 어쩔 수 없지.”
한때 일벌레였던 아버지였기에, 내 심정을 금방 이해한 듯했다. 그 말에 난 고개를 숙여 인사하려 했다.
그때였다.
“자, 잠시만요!”
로버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원래라면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로버는 급했는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벨라디 님께서 네시아 아가씨께 한 번 가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그게…… 네시아 아가씨께서 겁을 많이 먹으셨습니다.”
그 말에 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달래 줘야지.”
“그렇긴 한데…… 저희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 드려도 이불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안 하십니다. 숨소리도 안 들리게 계속 웅크리고 계세요.”
그 말에 아버지는 인상을 팍 쓰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네시아를 향한 걱정이 치솟은 모양이었다.
로버는 당황하며 나와 아버지의 뒷모습을 번갈아 바라봤다. 난 그런 그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왜 내가 가야 한다는 거야?”
“아! 주치의가 말하길 이건 정신적인 문제라, 본인을 구조한 벨라디 님을 보면 네시아 아가씨가 빨리 안정을 찾을지도 모른다고 했거든요!”
“주치의가 쓸데없는 말을 했군.”
말은 이렇게 했어도, 네시아가 겁을 먹고 이불에서 나오지 못하는 게 꼭 내 탓 같았다.
잠시 고심하던 난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그래, 당분간은 네시아에게 신경 쓰기로 했으니까.’
철도 공사 건은 보좌관으로서 전반적인 진행 과정을 다 아는 로미가 있으니 괜찮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일단 가 보자.”
내 말에 로버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예, 벨라디 님!”
그렇게 그와 난 2층 네시아의 방으로 향했다.
방 안은 평소 네시아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차 있었다. 아이의 시중을 드는 하녀들, 주치의, 그리고 아버지.
“네시아, 이제 정말 괜찮다. 한번 나와 보렴.”
아버지는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네시아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아버지의 말에 옆에 있던 하녀들도 조심스럽게 동조했다.
“맞아요, 네시아 아가씨.”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지켜 주실 거예요.”
“그 무서운 놈들도 혼내 주실 거고요!”
그러나 이불 뭉치는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