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18화 (119/197)

118.

아버지와 난 따로 자리를 옮겨, 5층에 있는 그의 개인 응접실로 향했다. 물론 그 자리에는 킬리언과 아이닝도 함께였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소파에 앉으니, 아버지는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로 우리 셋을 바라봤다.

곧 그의 입이 열렸다.

“우선…….”

아버지가 운을 떼자 킬리언이 살짝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난 조용히 킬리언의 손등을 토닥이며, 아버지에게 할 말을 정리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아버지의 추궁에 어떻게 대답할지 머리를 빠르게 굴리는데, 그의 입에서는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네시아를 무사히 데려오느라 수고 많았다. 킬리언 전하께도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별말씀을요.”

“네시아 앨턴 양이 크게 다치지 않아 정말 다행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말이라 잠시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대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난 습관처럼 가지런히 입꼬리를 올렸고, 킬리언 역시 특유의 단정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우리를 보며 아버지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킬리언 2황자 전하께서는 정말 정령사인 겁니까?”

그 말에 난 킬리언을 바라봤다. 이에 관한 건 나보다 당사자가 말하는 게 더 신뢰가 가기 때문이다.

킬리언 역시 이걸 알았기에 차분히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제 사정으로 계속 비밀로 하고 있었으나, 전 불의 정령과 계약한 정령사입니다.”

“그럼 정말 그 옆에 있는 정체 모를 생명체가 정령이란 말입니까?”

사막여우의 외형을 모르기 때문인지 아버지는 아이닝을 향해 의구심 섞인 시선을 계속 보냈다.

그걸 알아챈 아이닝이 꺄하항 웃으며, 킬리언의 품에서 쏙 빠져나왔다.

“정체 모를 생명체 아닌데! 난 아이닝인데! 아이닝은 불의 정령인데!”

그러고는 허공을 뛰어다니며 아버지의 얼굴 주위를 맴돌았다.

“벨라디 아빠는 벨라디랑 똑같이 생겼다! 킬리언네 가족이랑 완전 다르다!”

그런 아이닝을 보며 아버지는 인상을 쓰셨다.

“정령이 이렇게 촐싹댄다고? 셰넌은 이러지 않았는데.”

확실히 셰넌은 아이닝보다 훨씬 차분한 성격이지.

그 말을 들은 아이닝은 맑은 종소리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꺄하항! 벨라디 아빠도 벨라디처럼 자연 친화력이 빵점이래요! 그래서 아무것도 못 느낀대요!”

아이닝이 제자리에서 폴짝이며 외쳤다.

“셰넌보다 아이닝이 더 오래 살았는데!”

그렇게 말하며 사막여우는 자신이 정령임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사방에 불꽃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아버지는 잠시 몸을 굳히셨으나, 이내 천천히 중얼거렸다.

“정령이 맞긴 한가 보군.”

아버지가 저렇게 말할 만했다. 아이닝이 날리는 불꽃은 전혀 뜨겁지도, 그렇다고 물건을 태우지도 않았으니까. 그저 자리에 머문 채, 활활 타오르고 있을 뿐.

‘마치 환상처럼.’

그러나 아버지도 나도 환상으로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 정도의 환상 마법은 마탑주가 와도 불가능해.’

그러니 이건 마법일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순순히 인정하셨다.

“2황자 전하께서는 정말 정령사였군요.”

그 말에 킬리언이 멋쩍게 웃으며 서둘러 아이닝에게 손짓했다.

“그만하고 이리 와, 아이닝.”

킬리언의 부름에 사막여우는 불길을 훅 걷었다. 그러자 집무실에서 타오르던 불들이 한순간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아이닝은 한달음에 킬리언의 품에 안기며 웃었다.

“봤지! 봤지! 벨라디 아빠는 바보! 바보!”

아버지를 놀리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아버지는 그걸 보며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정령은 훈련을 못 시킵니까?”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그 질문에 킬리언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그쯤에서 난 킬리언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당신은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킬리언이 정령사임을 증명했으니, 이제는 아버지와 내가 단둘이 대화를 나눌 시간이었다.

킬리언도 내 말의 의미를 눈치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저에 대해 전부 말해도 돼요.”

“알겠어요. 오늘 정말 고마워요, 킬리언.”

킬리언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이닝도 해맑게 내게 인사했다.

“벨라디, 안녕! 또 만나!”

“잘 가, 아이닝.”

킬리언은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인 후, 아이닝과 함께 황궁으로 돌아갔다. 이제 집무실에는 아버지와 나만 남게 됐다.

“그럼 이제 말해 봐라.”

아버지는 고요한 눈빛으로 날 주시했다.

“왜 킬리언 황자가 정령사인 걸 네가 아는 건지. 그리고…… 황실 보물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그리리카 선황의 다이아몬드를 왜 그가 사용하고 있는지.”

‘왔구나.’

난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머릿속으로 계속 정리했던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보고했다.

킬리언과 처음 만났던 순간, 그의 손을 잡았던 이유, 황후의 죽음과 그녀의 다이아몬드를 갖게 된 사정. 마지막으로, 그동안 내가 해 왔던 일들까지.

물론 거기서 원작과 감시자에 대한 것들은 교묘하게 숨겼다.

이건 아직 차례가 아니었다.

‘그래도 잘됐어.’

난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아버지가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을 때, 이렇게 밝히는 게 나아.’

또 누가 알겠는가. 저 호의가 언제 사라질지.

어차피 아버지가 앨턴의 가주로 있는 한, 영원히 비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킬리언의 말처럼 지금이 적절한 타이밍일지도 모른다.

난 목소리의 강약을 조절하고 적절한 감정을 내보이며,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내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그에게 털어놓았다.

아버지는 이런 나를 보며 내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전 황태자를 몰아내기 위해, 킬리언 2황자와 동맹을 맺은 거예요.”

곧 내 이야기가 끝났다.

아버지는 생각이 깊어졌는지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난 그 침묵을 달게 받으며, 곧 있을 그의 질책에 어떻게 반응할지 계산했다.

‘아버지를 잘 설득하면서도 큰 충돌은 없어야 해. 아버지는 제일 먼저 나의 경솔함과 독단적인 판단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거야. 그렇다면 난…….’

그때, 아버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 모든 걸…… 정말 너 혼자 계획했단 말이냐?”

“예, 아버지.”

“……어째서?”

정말로 의아해하는 목소리였다.

“어째서 이런 상황이 될 때까지 나에게 말하지 않았지? 앨턴의 후계자가 되고 싶다고?”

그 물음에 빠르게 굴러가던 머리가 순간 삐걱거렸다.

아버지의 추궁은 예상했고, 그에 대한 다양한 반응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설마, 나에게 저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

‘멜도르를 후계자로 삼고, 놈에게 모든 지원을 쏟았으면서…….’

그렇게 서서히 이 가문에서 나라는 존재를 지워 낸 것이 아버지와 어머니면서, 왜 말을 하지 않았냐고?

아버지는 자신이 벌인 만행을 잊은 듯, 연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런 큰일을 내게 감쪽같이 숨겼느냔 말이다.”

“…….”

“그때 난 너에게 임시 가주의 자리를 주고, 마법 루비를 맡겼다. 그건 내가 어느 정도 너에게서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야. 그러니 그 3년이라는 시간 안에 조금이라도 나와 상의를 했다면…….”

그 말을 듣는 순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 뚝 끊기는 소리와 함께, 불쑥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제가 어떻게 아버지를 믿죠?”

“뭐?”

난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상의? 저희가 언제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나눠 본 적 있나요?”

내 말에 아버지가 입을 다물었다.

난 그런 그를 보며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제가 가주가 되고 싶다고 말을 꺼내면, 아버지는 헛된 꿈 꾸지 말라며 절 무시했을 거예요. 어쩌면 제 약혼을 서두르셨을지도 모르죠.”

“비약하지 마라.”

“비약이 아니에요. 아버지가 그동안 절 어떻게 취급했는지 뻔히 아는데, 제가 그 정도 반응 하나 예측하지 못하겠어요?”

이쯤에서 어긋난 감정을 다시 되돌려야 한다는 걸 알았다. 여기서 아버지를 탓해 봤자, 결국 상대적 약자인 내게 불리하니까.

그러나 참 얄궂게도, 그동안 꾹 참아 왔던 울분을 수습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면 임시 가주와 마법 루비. 그 두 가지를 저에게 넘겼으니, 전 과거를 전부 잊고 무조건 아버지를 신뢰하면 되는 건가요?”

“내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난 그저……!”

아버지의 핑계를 듣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그의 말을 끊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제게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가르쳤죠. 동생의 것을 탐내면 안 된다, 누나로서 양보해라, 투정 부리지 말고 착한 아이로 있어라!”

“벨라디 앨턴.”

“그런데 어떻게 해요, 욕심이 나는걸……! 동생의 것이 원래 내 것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고, 누나로서 양보하고 착한 아이로만 지내도 나한테 돌아오는 게 단 하나도 없는데!”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수없이 날 거부하고 외면했으면서 이제 와서 상의? 가능성?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어릴 적 언제나 내게 관심이 없고 무심했던 아버지의 얼굴이 지금과 겹쳐 보였다.

“내가 아무도 의지할 수 없도록 방치한 건 결국 아버지 본인이면서……! 당신 마음이 바뀌었다고 과거를 그렇게 잊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여기까지 소리쳐 놓고서, 난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아버지에게 큰소리를 내는 건 후계자 수업에서 제외됐던 어릴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만큼 지금의 난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 사람에게만큼은 이런 감정적인 모습을 절대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다 문득 킬리언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없어졌다고,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해도…… 가슴 한구석에 겹겹이 쌓여 가는 게 감정이잖아요.

아니야. 정말로 난 괜찮았어.

아버지를 봐도, 과거를 떠올려도 아무렇지도 않았어.

‘그런데 왜 갑자기…….’

내 마음을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 역시 많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한순간 눈앞에 아른거렸던 과거의 아버지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러나 가슴속 한 곳에 그때의 모습이 진득한 흉터로 남아 있다는 걸,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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