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15화 (116/197)

115.

“헉!”

무언가 멈춰야 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멜도르는 가까스로 달리던 다리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투두둑-.

그 즉시, 흙과 자갈이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멜도르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럽게 발을 뻗었다. 멜도르의 다리가 허공을 맴돌았다.

이 앞으로 디딜 수 있는 땅이 없었다.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가파른 경사면을 만난 것이다.

동시에 지척에서 누군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네시아 앨턴! 여기 있나!”

괴한은 분명 두 사람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움직임에 망설임이 없었다.

둘의 기척을 읽고 무작정 검을 휘두른 것이다.

그 모습에 소년은 재빠르게 마력을 모았다. 그리고 그가 눈을 감고도 사용할 수 있는, 어머니의 얼음 마법을 날렸다.

“끄으으윽……!”

멜도르를 덮치려 했던 괴한이 검을 든 채 그대로 굳었다.

멜도르는 이 순간 떠오른 마법이 어머니의 얼음 마법이라 정말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 얼음 마법은 어머니가 특별히 개발한 것이라 마력 사용이 매우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 딱이었다.

거기다 얼음은 괴한의 몸을 굳혀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멜도르는 한순간 괴한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소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깐, 저 자세는…….’

그러나 오랫동안 이럴 수는 없었다.

이 소란 때문에 멜도르와 네시아를 가려 주었던 마법이 풀린 탓이다.

괴한들이 둘을 발견하고는 이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멜도르는 얼음 마법을 연사하며 마구 달렸다.

“으흑.”

네시아가 이제는 소리를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

멜도르는 자신의 품 안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최고로 멋진 소풍을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오히려 최악의 소풍에 아이를 데려온 셈이 되었으니, 최소한 끝까지 네시아를 지켜 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놈들이 왜 네시아를 노리는지,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인질로 삼으려는 거면, 소공작인 내 몸값이 더 높을 텐데!’

그렇기에 더더욱 아이를 놈들의 손에 빼앗길 수 없었다.

피슝!

“크악!”

멜도르가 날린 얼음 마법에 쫓아오던 괴한의 몸이 다시금 굳었다.

그러나 소년은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마력이 상당히 흔들리고 있음을.

그 증거로 아까와는 달리 얼음 마법이 괴한들을 완벽히 구속하지 못했다.

그들은 얼어붙은 다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팔로 기어서라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광경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그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어지러워.’

경사면을 만났다는 건, 분명 앨턴가의 숲을 벗어났다는 의민데.

지금 멜도르는 방향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무작정 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야까지 흐릿해지니,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었다.

멜도르의 속도가 한순간 느려졌다.

“악!”

그 순간 네시아의 비명이 멜도르의 정신을 깨웠다. 어느새 그들을 따라잡은 괴한이 멜도르의 품에서 웅크리고 있던 네시아의 손목을 낚아챈 것이다.

멜도르는 가까스로 그 괴한의 얼굴에 마법을 날렸다. 다행히 괴한은 순식간에 떨어졌다.

‘이대로는 안 돼.’

멜도르는 본인의 한계를 처절하게 실감했다. 또한, 이 한계를 인정해야만 네시아라도 구할 수 있었다.

멜도르는 판단을 내리기 무섭게 네시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시, 싫어!”

네시아가 기겁하며 멜도르의 품에 다시 안기려 했다.

멜도르는 침착하게 그런 아이를 떼어 놓고, 가슴께에 달린 마법 루비 브로치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그러자 보호막이 형성돼 네시아를 둘러쌌다.

네시아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울면서 소리쳤다.

“제가 잘못했어요! 버리지 말아요!”

아이의 절박한 목소리와 필사적인 몸짓에 멜도르의 얼굴이 죄책감으로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러나 이대로는 안 됐다.

“정신 차려, 네시아 앨턴!”

멜도르의 외침에 그에게 팔을 뻗던 네시아의 몸이 딱 굳었다.

멜도르는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다가오는 괴한들에게 마법을 날렸다.

마지막 남은 마력을 쥐어짜는 것이었다.

“혼자라도 도망가!”

“으으…….”

“지금 난 널 지켜 줄 수 없어! 대신 방어막이 널 계속 보호할 거야!”

그 말을 증명하듯, 마법 루비에서 형성된 붉은 보호막이 은은하게 빛났다.

사실 저 보호막은 최후의 보루였다.

아까까지는 멜도르가 직접 네시아를 지킬 생각에 보호막을 펼쳐 주지 않았다. 마력이 충돌하면 서로 골치 아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저 보호막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 멍청아! 잡히기 전에 얼른 가라고!”

네시아는 그렁그렁 눈물을 흘리며 멜도르가 턱짓한 방향을 바라봤다. 어둠만이 가득한 숲이 네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정체 모를 두려움이 네시아를 스쳐 갔다.

“나, 나 혼자 있기…….”

“크윽!”

네시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 괴한의 공격을 받은 멜도르의 얼굴에 상처가 났다.

그걸 보고 나서야 네시아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달려, 네시아! 도망가!”

멜도르의 외침이 숲 안에 울렸다.

네시아는 그 말을 들으며 괴한들에게서 벗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네시아 앨턴이 도망간다!”

“잡아라! 네시아 앨턴을 잡아!”

곳곳에서 나타난 괴한들이 무자비하게 네시아에게 손을 뻗었다. 우악스러운 그들의 손길은 모두 보호막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캉! 캉!

그러자 그들은 보호막을 깨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다행히 보호막은 아주 튼튼해 그 공격들을 다 막아 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끔찍한 몰골과 기이한 눈빛만큼은 가려 주지 않았다.

그동안 네시아는 멜도르 덕분에 괴한들을 정면에서 보지 않았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그 무서운 형상을 볼 때마다 두려움에 힘이 쭉 빠졌다.

차라리 포기하고 싶었으나, 네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도망가야 해!’

기사들과 멜도르의 희생을 무의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됐다. 네시아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두려움을 억누른 채,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 순간, 무의식중으로 정령의 기운이 네시아를 감쌌다. 달리던 아이의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고, 기척 역시 숲의 풍경에 녹아들어 갔다.

무섭게 추격하던 괴한들이 아이를 놓치는 건 순식간이었다.

“네시아 앨턴이 사라졌다!”

“찾아라! 네시아 앨턴을 반드시 데려가야 한다!”

괴한들의 외침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허억허억.”

절대 잡히면 안 돼.

그러니까 최대한 멀리.

그것만 되뇌며 숨이 차오를 만큼 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 네시아는 정신을 차렸다.

아이는 천천히 달리던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멈춰 서서 가만히 주변을 둘러봤다.

‘…….’

아까의 소란이 거짓말인 듯, 고요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에서 방어막의 빛만이 은은하게 앞을 밝혔다.

동시에 네시아의 머리에 강렬한 기억이 터져 나왔다.

-나 두고 가지 마! 버리지 마!

-도헤미아, 미안하다.

-한 입이라도 덜어야 우리 가족이 살아.

-그러니까 진작 죽지, 왜 태어나서……. 네 희생은 잊지 않을게.

눈보라가 치던 밤의 숲, 절벽에서 떨어진 은발의 아이가 위를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세 명은 냉정히 시선을 거두었다. 곧 그들이 들고 있는 횃불의 작은 불빛마저 사라져 버렸다.

남은 건 어둠뿐.

-제발! 이제 밥 안 먹을게! 말도 잘 들을게! 이 숲에 나 혼자 두지 마! 엄마! 아빠! 오빠! 제발!

“으윽.”

네시아는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붙잡았다. 분명 자신 것이 아닌 기억이 아이를 괴롭혔다.

‘난 모르는 일이야. 난 이런 적 없어.’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고 자랐는데.

셰넌도 네시아를 아껴 주었고, 공작님과 북부 성의 식구들도 네시아를 소중히 여겼다. 수도 저택에서도, 그리고 멜도르도 네시아를 귀여워했다.

그러니까 저런 처참한 기억은 네시아의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전부 헛것이야.”

네시아는 그렇게 몇 번이고 중얼거렸지만 헛수고였다.

멜도르의 체온이 자신에게서 떨어졌을 때 느꼈던 정체 모를 두려움. 그 두려움이 슬금슬금 발밑에서부터 아이를 타고 올라왔다.

네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어두운 숲이 너무나 싫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무서워…….”

열심히 달리느라 멈췄던 눈물이 다시 차올랐다. 네시아는 느껴 보는 낯선 감정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목이 메었고, 어지러웠다.

한참을 아무것도 못 하고 주변을 둘러보던 네시아는 엉금엉금 수풀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 가만히 웅크려 몸을 숨겼다.

“무서워…….”

괴한들에게 추격당하던 때 느꼈던 긴장감과 근본이 달랐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네시아의 목을 조여 오는 공포심에 아이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누가 좀 구해 줘.’

네시아는 눈을 꾹 감았다.

“엄마……. 아빠……. 오빠…….”

아이는 자기가 뭐라고 중얼거리는지도 몰랐다.

그저 치밀어 오르는 기억에 잠식당할 뿐이었다.

***

북부 성에는 난방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돌로 만들어진 커다란 벽난로는 낭만을 위해 아직 보존되고 있었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을 보며 난 킬리언과 진지하게 철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였다.

“뜨핫!”

난로의 불 속에서 마음껏 찜질을 하던 아이닝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뛰쳐나왔다. 그 탓에 재가 조금 흩날렸으나,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무슨 일이니? 너무 뜨거워?”

내가 난로에 마른 나무를 너무 많이 넣었나?

확실히 평소보다 불이 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때, 내 옆에서 같이 차를 마시며 철도 공사 표를 바라보던 킬리언이 웃었다.

“하하하, 벨라디도 참. 아이닝은 불 자체인데 불이 뜨거울 리가요.”

“흠……. 그건 그렇죠.”

약간 물고기에게 ‘물속은 숨쉬기 힘들지?’라고 묻는 것과 같으려나?

그렇게 속으로 작은 농담을 떠올리며 차를 홀짝이는데, 아이닝이 심각한 얼굴로 다가왔다.

“이럴 때가 아니야!”

아이닝의 목소리가 아주 다급했다.

“심하게 뒤틀린 정령의 기운이 느껴져!”

“정령의 기운?”

“그 아이!”

아이닝이 내게 바짝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셰넌의 아이가 위험해!”

“뭐?”

셰넌의 아이라면, 네시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