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레이스 백작 부인이 고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시아는 그레이스 백작 부인에게 배운 대로, 예법에 따라 치맛자락을 올리고 무릎을 살포시 굽혔다.
“감사합니다, 백작 부인.”
크게 흠잡을 곳 없는 자세였다. 그러나 깐깐한 백작 부인은 조용히 네시아의 어깨 각도를 수정해 줬다.
그 행동에 네시아의 뺨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으나, 그레이스 백작 부인은 아무렇지 않게 마주 인사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뵙죠.”
“예…….”
또각또각.
백작 부인이 우아한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부인이 나가고 나서야, 네시아는 숨을 고르며 편하게 앉을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네시아의 하녀가 웃으며 차를 따라 주었다.
“너무 고생하셨어요, 네시아 아가씨.”
그 말에 네시아는 지친 얼굴로 웃으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우아한 수도의 귀족 영애가 되는 건 정말 힘든 일이구나.”
“그래도 아가씨는 무척 잘 따라가고 계세요. 제가 예법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처음 이 저택에 왔을 때와는 걸음걸이부터 달라지셨는걸요!”
“진짜?”
“그럼요!”
하녀의 말에 기운이 났는지, 네시아가 배시시 웃었다. 아이의 푸른 눈동자가 사랑스럽게 휘어졌다.
“나, 가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할 거야!”
“훌륭한 결심이세요!”
“그럼 나도 벨라디 님처럼 멋진 앨턴이 될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네시아는 벨라디에게 공포감을 느꼈던 것이 너무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럴 만도 했다.
‘그때 있던 만찬 이후로 벨라디를 만난 적 없으니까…….’
그 시간은 네시아가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잊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남은 건, 벨라디를 향한 그리움뿐이었다.
“벨라디 님이랑 빨리 친해지고 싶어…….”
벨라디가 바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자주 마주치지 못할 줄이야.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때 겁먹지 말고, 벨라디 얼굴을 잘 봐 놓을걸.
네시아가 포옥 한숨을 쉬었다.
그걸 본 하녀가 아이를 위로했다.
“금방 가까워지실 거예요! 두 분은 이제 자매시잖아요!”
하녀의 말에 아이의 뽀얀 뺨에 옅은 홍조가 생겼다.
‘그래, 이제 난 벨라디와 자매구나.’
북부에서 동경만 하던 그 멋진 사람이 내 가족이 된 거야.
그 생각만 하면 네시아는 속에서 몽글몽글한 거품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 거품은 무척 폭신하고, 또 가벼워서 네시아의 마음을 붕- 뜨게 만들곤 했다.
네시아는 생각만으로도 신이 난 듯, 자기도 모르게 발을 흔들었다.
“나……. 벨라디 님을 만나면,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 그래도 되겠지?”
“그럼요! 아가씨 아니면, 어느 누가 벨라디 님을 언니라고 부를 수 있겠어요?”
하녀는 그렇게 말하며, 설레하는 네시아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녀는 네시아가 좋았다.
물론, 앨턴의 직계들도 정말 멋있고, 훌륭한 분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작고 사랑스러운 아가씨는 그녀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사실 저택 사용인들 대부분이 그랬다. 다들 처음에는 공작 부인을 닮은 얼굴에 당황했지만, 이내 아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애초에 벨라디와 멜도르가 네시아를 앨턴으로 인정했으니, 그들이 아이를 싫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거기에 사랑스러운 말투와 아이다운 발랄함, 그리고 붙임성 좋은 성격까지. 아이를 귀여워할 이유는 차고 넘쳤고.
덕분에 네시아는 수월하게 앨턴 공작가에 녹아 들어갔다.
‘……그레이스 백작 부인의 수업은 아직 어렵지만.’
그만큼 그레이스 백작 부인은 본받을 점이 많은 사람이니까.
거기다 그녀가 어린 벨라디를 가르쳤다는 말을 듣자, 네시아는 의욕이 샘솟았다. 벨라디와 접점이 늘어난 게 기쁜 덕이었다.
“벨라디 님……. 내가 사교계에 데뷔하기 전에 돌아오실까?”
“당연하죠!”
하녀의 확고한 대답에 네시아는 해맑게 웃고는 간식으로 나온 딸기 케이크를 한입 먹었다.
그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에 하녀가 문으로 다가가 물었다.
“누구세요?”
“문 열어.”
멜도르의 목소리였다. 하녀가 신속히 문을 열었다.
그러자 멜도르가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와, 곧장 네시아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너, 수업은 다 하고 그거 먹는 거야?”
“네, 멜도르 오빠.”
“……그놈의 오빠 소리.”
멜도르는 ‘오빠’라는 칭호를 들을 때마다 아주 낯간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앨턴가의 후계자였지만, 동시에 평생 막내로 살았던 멜도르에게 동생은 아주 어색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네시아가 싫은 건 아니지만.
‘저 얼굴도 이제 익숙해졌어.’
그리운 얼굴로 방실방실 웃는 아이를 어떻게 계속 미워할까.
거기다 멜도르는 상대적으로 네시아와 자주 마주쳤기에, 둘의 사이는 처음보다 꽤나 가까워진 상태였다.
멜도르는 네시아의 맞은편에 털썩 앉아, 여분의 포크로 딸기 케이크를 크게 떠, 왕 자신의 입에 넣었다.
멜도르가 보인 행동에 네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이 꼭 토끼 같았다.
“이거 제 케이크…….”
“어차피 케이크는 많잖아.”
멜도르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 모습에 네시아는 조용히 감탄했다.
‘분명 그레이스 백작 부인은 입 안에 음식물을 넣은 채로 말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런 행동은 몹시 지저분하고 품격 없어 보인다고.
그러나 멜도르는 케이크를 우걱우걱 씹는 모습도 우아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오빠는 요령도 좋구나.’
그러나 요령은 요령이고, 케이크는 케이크였다. 네시아는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오빠가 새로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요.”
네시아가 고개를 돌리자, 트레이에서 새로운 케이크 조각을 잘라 내 접시에 담은 채, 어정쩡하게 서 있던 하녀와 눈이 마주쳤다.
네시아를 따라 그걸 본 멜도르가 흥 코웃음을 쳤다.
“원래 남의 것을 빼앗아 먹어야 더 맛있다는 것도 모르냐?”
“전 뺏어 먹기 싫은걸요.”
“순진하기는. 그런 생각으로 험한 수도 사교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멜도르는 혀를 쯧쯧 차며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편한 자세로 앉았다.
“너 내일 무슨 특별한 일정 있어?”
갑작스러운 물음에 네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정이요?”
“없겠지. 아직 연회도 치르지 않은 꼬맹이한테 일이 있을 리가.”
멜도르의 자문자답에 네시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에요, 내일은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적어야 해요.”
자신의 추측이 틀린 게 기분 나빴지만, 그보다 멜도르에게 더 거슬리는 단어가 있었다.
“독후감을 쓴다고?”
“수도의 귀족 영애들은 책의 구절을 인용한 농담이나 비유를 즐겨 사용한대요.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활용하려면, 추천 도서들을 전부 읽고 분석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 말에 멜도르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수도 사교계의 예법이 그가 아는 것과 차별점이 많다는 건 알았지만, 저런 규칙이 있는 건 몰랐다.
“그래서 내일 바쁘다 이거야?”
“네! 그레이스 백작 부인께서 읽을 책도 골라 주셨어요!”
그러며 네시아는 책 제목을 몇 개 읊었다.
그걸 들은 멜도르는 더욱 인상을 썼다. 독서 클럽에서 자주 추천되는 교양서이긴 했으나, 하나같이 저 꼬맹이가 읽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멜도르는 문득 테오도르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계속 자유롭던 아이가 갑자기 엄격한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하니, 얼마나 숨이 막힐까. 네가 바쁜 나와 네 누나 대신, 네시아를 잘 챙기렴.
-예? 제가요?
-그래. 마침 날도 좋으니, 교외로 소풍이라도 가는 게 좋겠어.
-그럼 하녀들이랑 저택 부지에 있는 평원에 가도 되잖아요. 거기가 얼마나 넓은데.
-네시아에게 녹음이 우거진 숲을 보여 주고 싶어 그런다. 앨턴령에서는 그런 숲을 보기 힘드니까. 그리고 가족 한 명은 옆에 있어야지.
-하지만…….
-왜, 오빠 노릇은 하기 싫으냐?
-아니, 뭐…….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고요.
-흠, 벨라디는 어릴 때부터 누나로서 널 잘 챙겨 줬는데. 넌 또 다른 모양이구나.
테오도르의 별생각 없는 중얼거림이 멜도르의 양심을 제대로 때렸다.
벨라디가 누나로서 항상 자신에게 양보해 왔던 걸, 멜도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하게 살았지.’
그때는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고…….
이런 입장이라, 벨라디의 이름을 들은 멜도르는 테오도르의 제안을 더 이상 거절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네시아와 일정을 맞추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흠, 근데 아버지의 걱정이 새삼스러운 게 아니네?’
멜도르는 머리를 긁적이다, 결론을 낸 듯 입을 열었다.
“그 숙제는 다음에 해.”
“다음이요? 하지만 기한이 정해져 있어서 부지런히 해야 하는데.”
“내가 그레이스 백작 부인에게 말해 줄게. 독후감은 뒤로 미루라고.”
“……정말요?”
네시아는 그렇게 되물으며 눈을 반짝였다.
그걸 보니, 어른스럽게 대답하면서도 은근히 숙제가 싫었던 모양이었다.
멜도르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저나 큰일이네? 숙제를 뒤로 미루면 내일은 아무것도 할 게 없잖아? 너 이제 어떡할래?”
네시아를 놀리기 위해, 멜도르가 일부러 짓궂은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아이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
그 반응을 보자, 멜도르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요 조그만 꼬맹이를 보면 자꾸 놀리고 싶어졌다.
‘어디, 뭐라고 말하나 들어 볼까.’
그렇게 킥킥거리는데, 네시아가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할 거 많아요!”
“……많다고?”
“네! 하루 종일 밖에서 뛰어다닐 거예요!”
“……놀겠다는 거네?”
“네!”
아이의 말에 멜도르가 크게 웃었다.
얘가 이렇게 놀고 싶어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된 거, 쟤 인생에서 최고로 멋진 소풍을 만들어 주겠어.’
처음에는 귀찮다고만 여겼으나,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어차피 이제 네시아와 같이 살아야 했다. 그러니 오빠 동생의 관계를 떠나서, 아이에게 믿음직한 이미지를 심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럼 내일 나랑 외출이나 하자.”
“외출이요?”
“그래.”
멜도르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수도 밖으로 소풍 갈 거야.”
“소풍……? 와! 소풍!”
네시아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제자리를 폴짝폴짝 뛰었다.
그걸 보니, 멜도르는 벌써부터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몇 시에 갈 거예요? 응? 응?”
멜도르는 지금 당장이라도 뛰어나가고 싶어 하는 네시아를 가볍게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아침 일찍 갈 거야.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야 한다?”
“와! 좋아요! 멜도르 오빠 최고!”
이때, 네시아도 멜도르도 같은 생각을 했다.
내일은 정말 완벽한 하루가 될 거라고.
그렇게 다가온 다음 날.
멜도르와 네시아를 태운 마차가 꽃이 흐드러지게 핀 교외의 숲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