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11화 (112/197)

111.

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렇다면 황제라는 카드도 적극적으로 이용해 줘야지.’

원래 가주 승계법 수정 외에는 황제를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황제가 큰 변심 없이 계속 내 손을 들어 준다면…….’

“설사 철도가 대 가주 회의의 표결로 넘어가고, 반대를 더 많이 얻는다고 해도……. 구제 방법이 있다는 거군요.”

일종의 보험처럼 말이야.

내 말에 킬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벨라디 당신이 폐하를 만족시킬 성과를 낸다면, 폐하께서는 당신을 지지할 거예요.”

이건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소득이었다.

난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만족시킬 성과. 그게 또 제 전문이거든요.”

황제가 좋아서 뒤집어질 만한 업적을 보여 주지.

당당한 내 말에 킬리언이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런 상황이니, 폐하께서 퍼델 앨러만 데커딜에게 세뇌당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워요. 만약 그랬다면, 저에게 이런 임무를 주지 않으셨겠죠.”

“흠…….”

그래도 내가 영 찝찝한 얼굴로 고민하니, 킬리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뭔가 걸리는 점이라도 있나요?”

난 그의 초롱거리는 눈을 보며, 떠오르는 의문점을 내뱉었다.

“그렇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게……. 킬리언, 황태자 측이 당신에게 이 향초를 준 건 3년 전이에요. 그렇죠?”

“네, 맞아요.”

“황태자의 끄나풀을 궁에서 쫓아낸 후에도 이 향초를 주기적으로 받았나요?”

“네. 그래야 충분히 연구할 수 있는 수량의 향초를 확보하고, 괜한 의심도 피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 황태자 측은 3년 동안 당신이 저 향초를 사용했다고 생각하겠군요.”

“……그렇죠. 사실 저도 이게 좀 의아한 부분이기는 해요.”

킬리언이 자세를 바꾸며 말했다.

“저에게 그런 미심쩍은 짓을 했으니, 분명 무슨 행동을 취할 법한데……. 퍼델이나 케스퍼나 예전과 다름이 없거든요.”

그 말에 아이닝이 폴짝 뛰어오르며 외쳤다.

“맞아! 그때를 대비해서 킬리언이 열심히 연기 연습도 했는데! 아이닝이 다 봤는데!”

“쉿, 아이닝.”

킬리언이 서둘러 아이닝의 입을 막았다.

‘연기라. 귀여운 짓을 했네.’

난 피식 웃으며,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당신에게 특별한 이상이 없다는 걸 알았다면, 진작 다른 술수를 부렸을 위인들이죠. 하지만 딱히 그런 행동도 없었죠?”

“네. 현재까지는 없어요. 물론, 최근 저에게 주기적으로 라벤더 차를 마시게 했지만.”

“걱정 마, 킬리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이닝이 외쳤다.

“킬리언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면, 내가 알아챘을 거야! 하지만 지금 킬리언은 최고로 건강해!”

“그렇단 말이지…….”

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한 후, 말문을 열었다.

“일단 향초의 효과를 세뇌라고 가정했을 때, 황태자 측이 가만히 있을 만한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봤어요.”

“두 가지라면…….”

“하나, 애초에 향초의 세뇌 효과가 그다지 좋지 않은 거예요. 그러니 당신한테 세뇌가 통하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어, 무작정 들이밀었을 가능성이 있어요.”

“확실히……. 저도 아이닝이 아니었다면, 이 향초를 굳이 의식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만큼 저 향초는 얼핏 향을 맡았을 때는 일반 향초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마물의 부산물 중에는 마법으로 검출해 내기 힘든 것도 있으니, 더욱 자신만만했겠고.

“다른 하나는 오히려 반대의 경우예요. 완벽하게 상대를 세뇌하는 향초를 만드는 데 성공한 거죠.”

“완벽하게요?”

그 되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그 세뇌의 효과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타난다는 조건이 있는 거예요. 황태자 측이 3년 정도는 기다릴 정도로 오래.”

“흠…….”

킬리언이 생각에 잠겼다.

난 그런 그를 보며 조금은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물론 이건 제가 쓴 소설에 불과해요. 일단 향초의 효과가 세뇌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마냥 무시할 수 없는 가정이기도 하죠.”

킬리언이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했다.

“당신은 어느 경우에 더 무게를 두고 있나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 솔직하게 대답했다.

“……두 번째요.”

“이유가 있나요?”

그 말에 난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킬리언을 빤히 바라봤다.

“…….”

“……벨라디?”

킬리언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날 불렀다.

난 그런 그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감이에요.”

“네?”

“어쩐지 두 번째 경우에 심증이 쏠리네요.”

사실 확률을 따지자면, 첫 번째 경우가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 황태자 측은 조금 무턱대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일전에 킬리언으로 위장한 제플린과 그를 만나러 갔던 스티아의 찻잎에 미약을 섞었겠지.’

게다가 세뇌라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약간의 최면이나 환각은 마법으로 가능하지만, 정신을 조종하는 세뇌는 마법으로도 불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물의 부산물이 시장에 돌아다니는 것이고.

거기에 북부에 남아 있는 기록을 다시 살펴봐야겠지만…….

‘세뇌를 완벽히 성공한 케이스는 없었어,’

세뇌에 걸린 사람 모두 뇌에 큰 이상이 생기고, 곧 사망했거든.

그러니 황태자와 케스퍼가 마물의 부산물을 들여왔다 한들, 그것만으로는 세뇌를 완성시켰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따라서 첫 번째 경우가 더 개연성이 있기는 한데…….’

이상하다. 난 왜 놈들이 결국 그걸 완성시켰을 것 같지?

“아무리 생각해도, 계속된 전염병 치료제의 변형도 이 향초와 관련이 깊은 것 같고…….”

그렇게 중얼거리던 난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놈들이 마물의 부산물을 사용한 건 확실하니, 그 정체를 알아내는 게 우선이에요.”

“안 그래도 지금 위다나 왕국의 상단과 접점을 만들고 있습니다.”

“좋아요. 북부에도 마물의 부산물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요. 확인하고 연락드릴게요.”

그 외에도 향초가 어디까지 퍼졌는지, 마물의 부산물에 케스퍼뿐 아니라 아글라 가문 자체가 개입했는지, 패러그린은 어디까지 영향을 끼치는지 등, 조사할 것이 많았다.

저절로 생각이 많아지는데, 킬리언의 확고한 목소리가 들렸다.

“벨라디. 마물의 부산물과 향초와 관련된 것들은 제 쪽에서 담당할 사항이에요. 그러니 당신은 철도에 집중해 줘요.”

그 말에 난 상념에서 빠져나와 그를 마주 봤다.

킬리언의 입가에 예쁜 호선이 그려졌다.

“이 제국에 막 왔을 때는 제게 힘이 없었죠. 그래서 온전히 당신의 도움을 받기만 했어요.”

그랬지.

그때 침울해하던 킬리언의 얼굴이 아직 내 기억에 선명했다.

그리고 지금의 그는 그때보다 훨씬 더 단단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이제 저도 당신의 동맹자로서, 일을 분담하고 싶어요. 그렇게 해 줘요, 벨라디.”

그 말에 난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좀 뒤늦게 알았지만, 아이닝은 치유의 마법이 담긴 ‘정령의 보물’을 만들 수 있었다. 킬리언은 그걸 이용해 빠르게 세를 넓히고 있었고.

‘그래, 그때의 의지할 곳 없이 휘청이던 킬리언은 이제 없어.’

거기다 더 이상 정보의 누락은 없을 거라고 내게 약속했으니까…….

난 그를 믿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내 대답에 킬리언이 어딘지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난 그 미소에 화답하며, 슬쩍 시계를 바라봤다.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흐른 상태였다.

“많이 늦었네요. 오늘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죠.”

“……벨라디.”

킬리언이 조금 머뭇거리다, 날 불렀다.

그 목소리가 퍽 간절했다.

“이제 다이아몬드를 사용할 수 있으니, 앞으로는 아이닝이 아니라 제가 직접 오가려고 하는데……. 어때요?”

“흠, 그게 좋겠네요. 애초에 당신과 직접적으로 대화하는 게 저도 편하고.”

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킬리언이 활짝 웃었다.

동시에 소파에 누워 있던 아이닝이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와아! 벨라디를 자주 볼 수 있다! 다행이다아!”

“아이닝 넌 원래 나랑 자주 만났잖아.”

“어라? 그렇네?”

여우는 잠깐 갸우뚱거리다 다시 폴짝였다.

“그래도 기분 좋아! 기뻐! 야호~!”

“크흠, 아이닝.”

킬리언이 서둘러 그런 아이닝을 껴안았다.

그걸 보며 난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아이닝이 저럴 정도면, 킬리언도 어지간히 텐션이 올라간 모양이네.’

그러나 미소를 짓고 있는 와중에도, 문득 가슴 한구석에 걱정이 피어올랐다.

‘설마 이걸 계기로 날 향한 킬리언의 감정이 깊어지진 않겠지?’

그가 내게 호감을 품은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나도 생각 이상으로 그가 신경 쓰였다.

‘그러니 킬리언이 다이아몬드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을 때, 마음이 상했겠지.’

그 엉킨 실타래는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나서야, 스르륵 풀렸고.

적당히 호의적으로, 하지만 너무 깊은 관계는 맺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킬리언에게 우리는 단지 좋은 파트너일 뿐이라며 딱 잘라 선을 긋기 애매해졌다.

‘하아……. 너무 선뜻 동의했나?’

난 힐끔 킬리언을 바라봤다. 흥분한 아이닝을 달래고 있는 킬리언은 정작 본인 뺨에 달아오른 홍조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괜히 말을 거두기에도 뭐하네.’

……그래, 애초에 황제의 지원 아래 킬리언이 철도 사업을 돕기로 했잖아. 게다가 마물의 부산물 때문에 서로 주고받아야 할 정보도 많아졌고.

그러니 시간제한 없이 직접 만나는 게 여러모로 효율적이었다.

‘그러니 일단은…… 두고 보자.’

난 나름 합의점을 찾으며 킬리언과 아이닝의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문득 킬리언이 아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당신의 마음에 날 향한 부정적인 감정이 쌓이는 게 두려워요.

‘……나도 당신을 오래도록 좋은 사람으로 여기고 싶어, 킬리언.’

계략과 술수, 그리고 서로의 위치를 떠나서.

정말 인간 대 인간으로.

난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 마음을 감추며, 조용히 웃었다.

괜히 그들을 따라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