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09화 (110/197)

109.

다행히 더미 남작은 빠르게 깨어났다.

그는 내가 자신의 아들을 용서해 줬다는 말을 듣고, 감격의 눈물을 펑펑 흘렸다.

-이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벨라디 님! 이번 철도 공사는 모두 벨라디 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전 뭐든 따르겠습니다!

남작은 그렇게 내게 감사를 표했다.

아, 물론 난 저 발언까지 전부 계산하고, 차남의 일을 넘어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덕분에 공사가 수월하게 진행되겠어.’

로미에게 인부들과 공사에 필요한 재료의 보고를 들은 후, 약간의 정리를 하니 벌써 밤이었다.

슬슬, 아이닝이 올 시간이었다.

난 앨턴령으로 돌아와 서둘러 씻었다. 그리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도로시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아무도 내 방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감시해.”

“네, 벨라디 님~. 개미 한 마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도로시가 전부 잡아낼게요~!”

그렇게 도로시에게 경비를 맡긴 다음, 방문을 걸어 잠그고 정령검을 꺼냈다.

그러자 곧 정령검이 일렁이며, 익숙한 사막여우가 뿅 나타났다.

“벨라디!”

아이닝이 꺄하항 웃으며 내 품에 안겨 들었다. 자연스럽게 아이닝을 쓰다듬으며, 난 싱긋 미소 지었다.

“아이닝.”

“응응! 아이닝 보고 싶었어? 얼마나 보고 싶었어?”

난 평소처럼 아이닝의 말을 받아 주는 대신, 바로 본론을 꺼냈다.

“지금 바로 킬리언에게 가서 전해 줘.”

“우웅?”

아이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그런 아이닝에게 내 방의 텔레포트 위치값을 알려 줬다.

“지금 당장 이곳으로 오라고.”

“지금? 바로?”

“그래, 이제 다이아도 자유롭게 쓸 수 있잖아?”

“그건 그렇지마안…….”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운 말인지, 아이닝이 머뭇거렸다.

난 그런 아이닝을 보며 한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라벤더 향초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말해 줘.”

내 말에 아이닝이 동그란 눈을 깜빡이더니 내 품에서 폴짝 튀어나왔다.

“향초?!”

저 반응을 보아하니, 확실히 향초에 뭔가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아이닝은 골똘히 고민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킬리언에게 말하고 올게!”

그렇게 아이닝은 곧바로 사라졌다.

난 그걸 보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저 정령이 저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네.’

언제나 해맑게 웃거나, 장난치거나, 애교만 부리더니. 도대체 백화점에서도 흔히 파는 라벤더 향초가 무슨 일에 엮여 있길래 저럴까.

난 차남에게서 압수한 라벤더 향초를 테이블에 올려놓은 후, 소파에 앉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허공이 일렁이며 킬리언이 나타났다.

“벨라디.”

그는 한달음에 내게 다가오더니 내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아주 간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이아몬드에 대해서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해요. 이걸 말하면 당신과의 접점이 하나 사라지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망설이게 됐어요. 내 실책이에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올려다봤다.

생각지 못한 말에 눈만 깜박이자, 킬리언이 살짝 눈치를 보면서 내 손을 잡았다.

“다시는 당신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을게요.”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고 나서야, 난 이성을 찾을 수 있었다.

난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킬리언을 주시했다.

“그 건은 제가 넘어가겠다고 아이닝을 통해 전달했던 것 같은데요.”

“맞아요. 그래도 제 입으로 사과를 전하지 못했으니까요.”

“난 단순히 감정적인 이유로 지나간 일을 들먹이지 않아요. 날 구차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당신도 이제 그 일로 사과하지 마세요.”

쓰윽, 난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내 손을 뺐다. 그러자 킬리언은 어딘지 안타까움이 담긴 눈으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당신은 내가 황궁 내에서 마법 다이아몬드를 사용할 수 있도록, 여러모로 마음을 써 줬죠.”

“…….”

“그게 기꺼워 전달해야 할 소식을 말하지 않은 건, 무조건 제 잘못이에요. 그래서 당신을 만나고 직접 사과하고 싶었어요.”

“킬리언.”

“넘어가겠다는 일을 굳이 붙잡고 있는 건 저예요. 그러니 구차한 건 당신이 아니에요, 벨라디.”

그 말에 난 일부러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킬리언과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렇게 그놈의 사과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네요.”

내가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말이야.

어차피 이런 사소한 일로 킬리언과의 동맹이 흔들릴 일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서로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됐으니까.’

그러니 그냥 편한 길로 가면 될 걸, 뭐 저리 미련하게 구는지.

난 영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내 생각을 가감 없이 내보이자, 킬리언이 조용히 속삭였다.

“당신에게 괘씸한 사람으로 남기 싫으니까.”

그 말에 난 잠시 몸을 멈칫했다. 그러고 뚫어져라 킬리언을 응시했다.

킬리언이 쓰윽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당신 말처럼 이번 사건을 그냥 넘기면, 서로에게 편했겠죠. 하지만…… 풀리지 않은 감정은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킬리언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없어졌다고,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해도 가슴 한구석에 겹겹이 쌓여 가는 게……. 그게 감정이잖아요. 난 당신의 마음에 날 향한 부정적인 감정이 쌓이는 게 두려워요.”

“…….”

“그래서 이렇게 사과에 집착하는 걸지도 몰라요. 내 진심을 어떻게든 당신에게 전달하고, 안 좋은 감정을 확실히 풀고 싶어서……. 이걸로 부담스럽게 만들었다면, 그것도 미안해요.”

난 어쩐지 그 울림이 일종의 파동 같다고 생각했다. 잔잔한 내 마음을 괜히 들쑤시는 그런…… 전혀 반갑지 않은 파동.

난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시야가 차단되자, 내 숨소리가 온전히 들려왔다.

난 일정한 박자로 숨을 들이쉬며, 천천히 일렁이는 마음을 다스렸다.

‘킬리언의 말도 틀리지 않았어.’

솔직히, 그가 날 보자마자 진심 어린 사과를 내뱉을 때, 난 묘한 후련함을 느꼈다.

내가 억지로 욱여넣은 탓에 엉켜 버린 실타래가 부드럽게 풀리는 기분.

이런 기분은 난생처음이었고, 싫지 않았다.

만약 킬리언이 내 말대로 이 일을 그냥 넘겼다면…… 이런 후련함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

내가 후련함을 느낀 것은 사실이나, 감정 하나하나가 가슴에 쌓인다는 건 동의할 수 없었다.

그동안 난 수없이 많은 순간들을 나만 참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감정이 엉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고, 그렇게 하니 어느 순간부터 엉킨 것들이 차근차근 잊혀져 갔다.

그렇게 난 무덤덤하고 초연한 나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난 이런 내가 마음에 들어.’

이제는 어머니를 떠올려도, 예전처럼 가슴이 아프고 먹먹하지 않았다. 더 이상 아버지에게 상냥함과 인정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킬리언의 말을 수긍하면, 그 당시 내가 했던 노력들을 전부 무시하는 꼴이 되지 않나.

그래서 그의 생각을 일부 동의하되, 일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애초에 사람에게 단 하나의 부정적인 감정도 남기지 않을 수 있나?’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분명 그 사람의 싫은 점이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차근차근 이성을 되찾는데, 문득 뺨에 낯선 촉감이 느껴졌다.

난 본능적으로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내 시야에 킬리언의 얼굴이 선명하게 채워졌다. 그리고 내 뺨에 닿은 것이 그의 손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그의 입에서 옅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목소리의 떨림이 내 입술에 닿을 정도로 서로의 얼굴이 가까웠다. 투명한 회색 눈동자와 시선이 얽혔다.

‘무슨…….’

내가 생각을 마무리 짓기 전이었다.

킬리언이 내 뺨을 살포시 감싸던 손을 물리며 신속하게 몸을 뺐다. 그러다가 잘못 움직였는지, 킬리언의 발이 티테이블의 다리에 걸렸다.

우당쾅쾅!

그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벨라디 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동시에 문 너머로 도로시의 외침이 들렸다.

난 킬리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알겠습니다~! 언제든 필요하면 불러 주셔요~!”

곧 도로시의 발걸음이 멀어졌다.

난 가만히 그걸 듣다, 소리가 완전히 끊긴 뒤에야 킬리언에게 물었다.

“뭐죠?”

“아……. 그게…….”

킬리언의 얼굴이 본인의 머리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정말 드물게 어버버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누, 눈을 감고 있는 당신이 너무 예뻐서, 저도 모르게 손이……. 아, 벼, 변명은 절대 아니고. 그, 그러니까…….”

횡설수설하던 킬리언이 곧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평소라면 불쾌하기 짝이 없을 행동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단정하고 예의 바른 킬리언이 저런 반응을 보이자, 조금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난 소리 죽여 웃다가, 이내 그를 보며 말했다.

“이번에도 감정을 풀기 위해 사과하는 건가요?”

내 농담에 이번엔 그의 목까지 붉어졌다.

킬리언은 평소처럼 쉽사리 포커페이스를 되찾지 못하고, 우왕좌왕거렸다. 그러다 결국, 본인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말았다.

그 모습에 난 조금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얼굴을 가리면, 진심이 잘 전달되지 않을 텐데.”

이런 내 반응에 그가 웅얼거렸다.

“놀리지 마세요.”

“하하하하하!”

결국 난 큰소리로 웃고 말았다. 덕분인지 약간 가라앉던 기분도 텐션이 올라갔다.

난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 내 옆자리를 툭툭 쳤다.

“용서할 테니 이리 와요, 킬리언. 사담은 이제 그만하고, 중요한 이야기를 할 차례니까.”

어느새 손을 내린 채, 날 멍하니 바라보던 킬리언이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살짝 내 맞은편 소파를 바라봤다.

그제야 난 눈을 깜박였다.

‘아, 맞은편에도 소파가 있었지.’

저기에 앉으라고 하면 되는데, 난 왜 굳이 내 옆자리를 톡톡 쳤을까.

그때 이런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킬리언이 잽싸게 내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나와 눈을 마주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벨라디.”

그 모습에 난 그를 바라보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내 기분을 유쾌하게 만들어 줬으니 한 번은 이래도 되겠지.’

난 살짝 킬리언 쪽으로 몸을 틀며 입을 열었다.

“기억나요, 킬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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