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08화 (109/197)

108.

더미 남작은 울며 겨자 먹기로 아들의 방을 내게 안내했다.

그래도 아직 기회가 있다는 말에 큰 희망을 건 눈치였다.

그러나…….

쾅!

“어흐흑!”

내가 하인들을 기다리지 않고 발로 문을 차자,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남작이 기어이 눈물을 쏟고 말았다.

난 그걸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기세를 잡기 위해 일부러 이러는 건데.’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던 차남이 무거운 상반신을 일으켰다.

나와 눈이 마주친 놈은 얼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악몽인가?”

“미안해서 어쩌지. 지극히 현실인데.”

난 그렇게 대답하며 거침없이 침대 쪽으로 향했다.

내가 점점 가까워지자 차남이 몸을 흠칫거렸다.

놈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서둘러 침대에서 나왔다. 그 과정에서 발에 이불이 걸려 한 번 넘어졌지만, 차남은 몸가짐을 정리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덜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진짜인가? 정말로?”

그 말에 화답하듯, 난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그걸 보자마자 차남이 딸꾹질을 하더니, 내 발치에 납작 엎드렸다.

“죄, 죄, 죄송합니다, 벨라디 님!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차남이 그렇게 소리쳤다.

그런 반응에 더미 남작이 발을 동동 구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무언가 착오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미약한 희망을 품고 있던 것이 박살 났겠지.

난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차남의 뒤통수만 내려다봤다.

“액트 더미. 내가 그때 말하지 않았나? 괜한 마음 품지 말라고.”

“크흐흑……!”

내 한마디에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차남이 훌쩍였다.

난 그걸 보며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이렇게 자진해서 무릎을 꿇었다는 건, 네 죄를 네가 안다는 거겠지?”

“살려 주십시오, 벨라디 님. 제발 살려 주세요!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차남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두 손을 싹싹 비비며 필사적으로 빌었다.

그 모습에 난 규칙적으로 발을 까딱이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가만히 차남이 하는 걸 관찰했다.

‘얜 정말 변하지 않는구나.’

철도 공사를 더미 영지에서 하지 않았다면, 깔끔하게 처리했을 텐데.

내 생각을 모를 차남은 이런 침묵이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놈이 힐끔 머리를 올려 날 바라봤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놈의 온몸이 바짝 얼어붙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륵 눈물을 흘리는 차남을 보며 난 느긋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래, 그래도 아직은 날 무서워한다 이거지.’

사실 지금 난 딱히 살기를 흘리거나 분위기를 잡고 있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몇 마디만 내뱉었을 뿐.

그러나 뼛속까지 날 향한 공포심을 맛보았던 차남은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다.

그걸 보며 삐죽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동안 편하게 살면서, 그때 일을 다 잊었나 보네. 그렇지?”

그러니까 이렇게 내가 몸소 찾아오게 만들지.

내 말에 차남이 끅끅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난 그런 차남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네 죄를 상세히 읊어 봐.”

난 더미 남작에게 말했던 대로, 차남에게 기회를 주었다.

만약 내가 정말 처벌하기로 결정했다면, 이딴 사담 없이 곧바로 놈을 체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백을 유도한다는 건, 순순히 따르기만 한다면 어느 정도 상황을 참작하겠다는 의미가 내포됐다.

다행히 차남은 내 말을 즉시 이해한 눈치였다.

놈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희 영지에 자주 들르는 동부의 상단이 있는데……. 그 상단의 부단주가 저에게 접근했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당한 회, 횡포를 잘 안다며 복수를 도와주겠다고!”

“흐음, 그래서?”

“전 당연히 거절했습니다! 세상천지에 주군에게 반기를 드는 신하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 그런데 그 작자가 하도 끈질겨서…….”

그래, 끈질겼겠지. 그 상단은 케스퍼가 차명으로 운영하는 상단이니까.

부단주라는 놈은 케스퍼의 명에 따라, 최대한 많은 이들을 남부의 정보망으로 끌어들여야 했을 테고.

‘그리고 이 차남은 놈들의 그물망에 포착된 입맛 돋우는 거물이었겠지.’

나에게 확실한 원한을 품은 북부의 ‘귀족’은 그리 흔하지 않거든. 거기에 저 차남도 본인의 증언처럼 그 유혹을 확실하게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렇게 내 귀에까지 정보가 들어올 리 없잖아?’

난 비웃음을 갈무리한 채, 차남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부단주와 그렇게 주기적으로 접촉을 했나?”

“그, 그건!”

“그 상단 뒤에 누가 있는지 넌 알고 있었겠지.”

“…….”

“그러니 흔들렸어? 놈들이 정말 날 실각시키고, 네 명예를 회복해 줄 것 같았니?”

내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차남의 볼살이 파르르 떨렸다. 나와 마주한 순간, 차남의 포커페이스는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그는 다시금 넙죽 엎드려 싹싹 빌었다.

“용서를! 제발 용서를!”

지금 차남의 속마음이 고스란히 보였다. 아마 온 내장이 다 뒤틀리고 있으리라.

‘내가 왜 그딴 놈들 말에 홀렸을까! 저 벨라디 앨턴이 어떤 사람인지 뻔히 겪었으면서 왜! ……대충,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안 봐도 뻔해.

난 차남을 보며 말했다.

“가져와.”

내 말에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던 차남이 번쩍 고개를 일으켰다.

“예?”

“그동안 상인에게서 받은 뇌물은 굳이 건들지 않겠어.”

내 말에 차남의 안색이 새파랗게 굳었다. 동시에 뒤에서 단말마의 한탄과 함께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이고.”

“남작님!”

“어서 의원에게 모셔라! 어서!”

차마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상황을 지켜보던 더미 남작이 기어이 쓰러진 모양이었다.

남작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호들갑을 떨며 그를 데리고 사라졌고, 그 덕분에 구경꾼은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나로서는 좋은 타이밍이었다.

‘더미 영지에서 내 영향력을 다시 각인시키는 건, 이제 충분하니까.’

그리고 지금 내가 차남에게서 받을 건, 소문나서 좋을 게 없었다.

“라벤더 향초.”

내 말에 굳어 있던 차남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난 그걸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최근에 그 상인에게서 라벤더 향초를 받았을 거야. 가지고 와.”

“그건 왜……. 아, 아닙니다! 바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본능적으로 되물으려던 차남은 재빠르게 자세를 고치더니, 허둥지둥 본인 방에 있는 금고를 열었다. 향초 같은 물건까지 금고 안에 있는 걸 보면, 혹시 모를 후환이 두려워 받아 둔 뇌물들을 전부 한곳에 모아 놓은 듯했다.

한동안 금고를 뒤적이던 차남은 이윽고 아직 고급스러운 상자에 들어 있는 라벤더 향초를 들고 왔다.

“여기 있습니다, 벨라디 님!”

난 그걸 집어 들고 곧바로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백화점에서 흔히 파는 고급 브랜드의 향초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그걸 가만히 보자, 차남이 매우 불안한 눈초리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난 여유롭게 상자를 다시 닫으며 말했다.

“이 향초는 내가 가지고 간다. 불만은?”

“어, 없습니다!”

“운 좋은 줄 알아, 액트 더미.”

내 말에 차남이 바짝 긴장했다.

“더미 영지에서의 거사가 코앞이고, 그나마 네가 완전히 그 상인에게로 넘어가지 않았기에. 이 정도로 상황을 마무리 지으려는 거니까.”

그러자 차남의 얼굴에 일말의 화색이 돌았다. 그는 다시금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크흡, 정말 감사합니다……!”

“궁금하지 않니?”

“감사……. 예?”

“수도에 있던 내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알고 널 찾아왔는지. 그리고 언제부터 이 정보를 알고 있었는지.”

내 말에 화색이 돌던 차남의 표정이 굳어 갔다.

난 그런 차남에게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말했다.

“북부에서 앨턴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가문은 없어. 이렇게 충고해 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다음에는 곧바로 칼날이 날아갈 테니까.

내 경고에 차남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바, 반드시 잊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난 차남에게서 몸을 돌려 놈의 방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손에 들린 라벤더 향초를 바라봤다.

‘라벤더 향초라…….’

케스퍼의 수하가 더미 남작의 차남에게 접근하고 있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이중 첩자들이 전부 보고를 했기 때문이다.

그중 도로시는 그 수하가 차남에게 바친 뇌물의 목록들을 알아내, 내게 계속 보고해 왔다.

‘그 전까지는 딱히 중요한 게 없어서, 한 번 보고 말았지만.’

그러나 최근, 난 도로시가 보낸 목록에서 시선을 끄는 물건을 발견했다.

바로 이 향초였다.

‘난 아직 기억하고 있거든.’

-그래, 아이닝. 오늘은 킬리언이 무슨 소식을 전하라고 그랬니?

-특별한 건 없대! 그냥 라벤더 향초를 보낼 수 있냐 물어보랬어!

킬리언과 손을 잡았던 그해, 아이닝과 주고받았던 대화를.

킬리언은 그 이후로 내게 향초에 대한 언급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하지만 그 목록을 보고 나면, 저절로 떠오를 수밖에 없단 말이지.’

아무리 그때 당시 황태자의 감시가 심했다고 해도, 향초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굳이 아이닝을 통해서 내게 받은 이유가 뭘까?

‘그리고 케스퍼의 수하는 왜 차남에게 이 향초를 뇌물로 줬을까?’

그동안 그가 준 뇌물들은 전부 돈 아니면 보석이었는데, 어울리지 않게 말이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당연히, 그 수상한 향초를 내가 입수해야지.’

마침 더미 영지는 철도 공사 때문에 꼭 들러야 했었고.

또한 오늘은 아이닝을 만나는 날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아이닝이 오면, 난 바로 마법 다이아몬드를 통해 더미 영지로 킬리언을 불러낼 생각이었다.

‘앞으로 황궁 내에서도 자유로이 텔레포트를 쓸 수 있다니까, 무리한 요구도 아니잖아?’

비록 나한테 그 사실을 바로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속이 뒤틀렸다.

‘난 그의 텔레포트가 우리 동맹의 가장 큰 메리트라고 판단해서, 신중히 접근하고 있었는데…….’

킬리언은 그렇게 여기지 않으니까, 나한테 말하지 않았겠지.

내가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굳이.

‘혼자 고민하는 꼴이 재미있었나?’

나도 모르게 비아냥거리다, 조용히 혀를 찼다.

‘어쩐지 생각의 흐름이 유치하게 흘러가네.’

이미 이 안건은 내 입으로 먼저 넘어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이렇게 곱씹는 건, 전혀 나다운 행동이 아니었다.

‘괜히 속 좁아 보이잖아.’

그런데 왜 자꾸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난 왜 계속 킬리언에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거지?

‘……정신 차리자, 벨라디.’

지금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혼란스러워할 때가 아니었다.

난 익숙하게 감정들을 삼켰다. 감정은 마치 가는 실과 같아서, 이렇게 욱여넣으면 부피를 줄이고 가슴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았다.

‘비록 얽히고설킨 채지만.’

시간이 지나면 존재조차 잊어버리니까.

그러니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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