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104화 (105/197)

104.

보통은 개인이 주도하는 사업의 진행 과정을 남들과 공유하지 않는다. 특히 앨턴 공작가의 임시 가주 같은 최고위층은 그럴 필요도, 의무도 전혀 없었다.

‘지금처럼 먼저 공개하는 게 예외적인 경우지.’

황태자, 퍼델은 본인의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그걸 넘어서, 대 가주 회의의 안건으로 채택되도록 두겠다고?’

제아무리 벨라디 앨턴이 철도 사업을 수월하게 운영해도, 퍼델은 소 가주 회의의 주도자로서 철도를 안건으로 채택할 것이다.

그 후 내년 대 가주 회의에서 철도 사업이 과반수의 반대를 받으면 벨라디 앨턴은 그대로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흐음…….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건가?’

퍼델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테오도르를 주시했다.

만약 벨라디 앨턴이 저 자리에 있었다면, 그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속내를 알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 최강의 기사이자 북부의 주인에게 뭐라 따져 묻는 건 퍼델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럴 때에는 제 아비를 내세운다 이거지?’

쥐새끼 같기는.

퍼델은 저절로 찡그려지는 미간을 살살 폈다. 그리고 마음을 한결 가볍게 먹었다.

‘그래, 그런 겁쟁이 계집이 뭘 알겠나. 저러는 것도 한순간의 객기일 뿐이야.’

최근 자신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던 앨턴가의 장녀가 엮여 있는 일이다 보니, 괜히 불필요하게 신경을 썼던 듯싶었다.

‘그리고 차라리 저리 정직하게 보고하는 것이 편하긴 해.’

어차피 자신과 남부가 뭐라고 해도 벨라디 앨턴은 철도 사업을 진행할 것이다. 지금은 소 가주 회의에서 따로 선정한 찬반 토론의 안건이 아닌, 그저 북부 연합의 대표가 최신 소식을 보고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퍼델에게는 유리한 상황이었다. 벨라디 앨턴이 별다른 티를 내지 않고 북부에서 몰래 일을 강행했다면, 여러모로 귀찮아졌을 테니까.

‘방해 공작에도 준비가 필요한 법이니.’

거기다 퍼델의 수하 중에는 그리리카 선황의 수사관을 피해 증기 기관차 발명에 훼방 놓은 자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 뭐가 어렵겠는가.

퍼델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테오도르를 주시했다. 테오도르는 이미 남부와 동부 측의 가신들에게 질문 세례를 받고 있었다.

그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일관된 대답을 내놓았다.

“실패도 결국 그 아이의 몫이니, 마땅히 감내할 겁니다.”

그걸 보며 퍼델은 확신했다.

‘앨턴 공작도 철도 사업을 탐탁지 않아 하는군.’

하긴, 그럴 만했다.

북부는 지금 한창 마법 루비로 잘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뭐 하러 위험한 도전에 찬성하겠는가.

‘그저 제 자식 고집에 못 이겨 저러는 거지.’

그는 마지막으로 앞에 앉은 황제를 관찰했다.

마침 조용히 회의를 지켜보던 황제의 입이 작게 움직였다.

“시간이 지체되는군.”

바로 뒤에 있던 퍼델은 옳다구나, 팔걸이를 탁 치며 외쳤다.

“그만!”

그 외침에 소란스럽던 회의장의 모두가 입을 뚝 다물었다.

퍼델은 황제를 의식하며 부러 큰소리로 외쳤다.

“대체 그걸로 얼마나 떠들 셈인가! 우리가 정말로 토론해야 할 안건은 아직 한참 남았는데!”

퍼델의 말에 동의하는 듯, 황제가 근엄하게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걸 보며 퍼델은 속으로 씨익 웃었다.

‘아버지는 저 건에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고.’

퍼델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대 가주 회의의 표결을 유일하게 뒤집을 수 있는 게 황제의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황제가 증기 기관차와 철도에 약간의 흥미라도 보였다면, 퍼델은 오늘 대 가주 회의 이후 어떻게 해서든 벨라디 앨턴을 방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칼자루를 내가 쥐고 있는 상황에서…… 서두를 필요는 없지.’

퍼델은 그런 시선을 담아 아래에 있는 케스퍼를 바라봤다.

“이 건은 어차피 북부의 보고일 뿐이다! 그러니 남부는 더 이상 토를 달지 말라!”

“하, 하지만……!”

케스퍼가 다급히 외쳤으나, 퍼델이 사납게 그를 노려봤다. 퍼델은 누군가 자신의 결정에 토를 다는 걸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그 시선에 케스퍼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퍼델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자연스레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케스퍼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퍼델이 무슨 생각으로 지금의 상황을 용인하는 것인지는 알 것 같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불안감이 꿈틀거렸다.

‘벨라디 앨턴이 이렇게 멍청하게 일을 꾸밀 리 없는데.’

이미 몇 번이나 자신을 물 먹인 아이였다. 또한, 케스퍼는 동생인 시온을 통해 벨라디 앨턴이 생각보다 훨씬 책략에 능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도 보라. 벨라디 앨턴은 일부러 테오도르 앨턴을 이 가주 회의에 세운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방패막이로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같은 소란에서 본인은 쏙 빠진 채, 도대체 무얼 준비하고 있단 말인가……!

‘퍼델 님은 벨라디 앨턴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이미 본인이 몇 번이나 벨라디 앨턴을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했으나, 그는 제 말을 모조리 무시했다. 아동법을 수정해 벨라디 앨턴에게 제약을 건 전적이 있으니, 언제든 그녀를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탓이다.

‘태평하게 킬리언 2황자나 포섭할 때가 아닌데…….’

케스퍼가 봤을 때, 킬리언은 순순히 자신들의 꼭두각시가 될 그릇이 아니었다. ‘그것’을 그렇게나 자주 사용했는데도, 효과가 예상만큼 빨리 나타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 케스퍼는 언제든 불안 요소가 될 수 있는 킬리언을 얼른 버렸으면 했지만, 아무래도 퍼델은 킬리언의 똑똑한 두뇌가 탐이 나는 듯싶었다.

‘그러니 벨라디 앨턴과의 스캔들도 마냥 무시하는 거겠지.’

케스퍼는 불안함을 능숙하게 누르며, 맞은편에 앉은 테오도르를 주시했다.

테오도르는 여전히 특별한 표정이 없었다.

‘저 작자는 도대체 무슨 속셈인 거야.’

그동안의 조사 결과를 보면, 원래 앨턴가의 부녀 사이는 결코 가깝지 않았다.

그러나 3년 전, 테오도르가 갑자기 벨라디를 임시 가주로 임명한 무렵부터 기류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지금처럼 아닌 척, 제 딸을 논란에서 막아 주는 것도 그렇고.

‘벨라디 앨턴의 나이가 찼으니, 슬슬 다른 가문으로 시집이나 보내겠거니 했는데…….’

딱히 그런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케스퍼로서는 아주 답답할 노릇이었다.

‘역시 그때 공작가 내부에 심어 두었던 첩자를 들키면 안 됐어.’

어리다고 만만하게 본 케스퍼의 뼈아픈 실수다.

그러니 이제는 잘 만회해야지.

케스퍼는 시선을 돌려 퍼델을 바라봤다. 퍼델은 특유의 오만한 표정으로 회의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 얼굴에 걱정의 기색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케스퍼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여기서 속으로 불평을 한다 한들 바뀌는 일은 없었다.

‘어차피 퍼델 님과 난 같은 배를 탔다. 그러니 세세한 것들은 내가 잡아야 해.’

다행히 케스퍼는 북부에 첩자 몇을 숨겨 둔 상태였다. 수도 저택은 결속력이 너무 강해 무리였지만, 오히려 북부는 경계가 조금 느슨한 덕이었다.

케스퍼의 눈이 기민하게 빛났다.

이제 그들을 움직일 차례였다.

***

“오셨습니까, 벨라디 님.”

내가 말에서 내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북부 성의 집사와 사용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난 그들을 보며 싱긋 웃었다.

“오랜만이네.”

그렇게 입을 열자 허공에 입김이 생기다 흩어졌다.

수도는 봄이 완연했지만, 북부 중에서도 가장 위쪽에 위치한 앨턴령은 아직 많이 추웠다. 지금도 곳곳에 눈이 쌓여 있었다.

“들어가자.”

난 코트를 여미며 고딕 양식의 거대한 성 안으로 향했다. 그러자 집사와 하녀장을 필두로 사용인들이 날 따라 움직였다.

난 성의 복도를 걸으며 피식 웃었다.

‘여기는 그대로구나.’

어릴 적에는 매년 여름이 되면 북부에서 지내곤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성은 바뀐 게 없었다.

‘사람은 좀 늘어난 것 같지만.’

얼핏 봐도 북부 성에서 일하고 있는 사용인이 몇 년 전보다 많았다.

못 보던 얼굴들을 보며 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하긴, 마법 루비 덕분에 북부도 활기를 찾았으니 집사가 추가로 사람을 고용할 만해.’

거기다 내가 이 분위기에 더욱 큰 불을 지필 예정이고 말이야.

모두 아버지가 지난 대 가주 회의에서 내 부탁을 훌륭히 들어준 덕분이었다.

‘첫 증기 기관차 개발 계획 공개도 무사히 넘어갔고, 나도 이렇게 무탈히 북부에 도착했으니.’

회의에 참석했던 가신들에게 교차로 확인하니, 황태자와 반대 세력은 일단 상황을 살피는 것으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내가 의도한 그대로의 결과였다.

‘일부러 칼 손잡이를 쥐여 줬으니, 아주 좋다고 잡았겠지.’

그깟 칼 따위, 조금만 방심하면 바로 빼앗길 수 있다는 걸 모르는 채 말이야.

소 가주 회의에서 주기적으로 철도의 진행 상황을 공개하는 건 조금 귀찮겠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어차피 곧이곧대로 모든 과정을 발표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보고서는 언제든 말을 꾸며낼 수 있는 눈속임에 불과했다.

황태자 측도 이걸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대 가주 회의에서 그냥 넘어간 건, 그들 역시 언제든 철도의 꼬투리를 잡아 대 가주 회의의 안건으로 상정할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당연히 내가 그 꼴을 가만둘 리 없지만.’

그리리카 선황이 바바 와트와 증기 기관차를 온전히 보호하지 못한 건 그녀가 돌봐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리카 선황은 모든 이를 품어야 하는 황제로서 남부와 동부의 의견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난 그리리카 선황과 입장이 다르거든.’

그들도 자기네들의 이익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데, 우리 북부가 못 할 게 뭐 있어? 나도 철저히 북부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면 그만 아닌가.

‘무엇보다 새로운 혁신을 반대하는 무리가 있다면, 응당 찬성하는 무리도 있단 말씀.’

기본적으로 서부 연합은 증기 기관차에 찬성할 확률이 아주 높았다. 한때 서부에 더 많은 텔레포트 진을 설치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만, 마탑이 점점 무리한 요구를 들이밀어 계약이 결렬됐기 때문이다.

거기다 모스틴이 내게 노천 탄광을 제공함으로써 증기 기관차에 거하게 투자했으니, 이 사실이 알려지면 파장이 클 터였다.

‘거기다 최근 킬리언의 보고에 따르면, 동부 귀족의 일부를 자신의 편으로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지.’

이건 그들에게 증기 기관차를 어필할 기회가 많이 열렸다는 뜻이다.

그 외에도 증기 기관차의 가능성을 알아볼 귀족들의 목록이 촤르륵 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들까지 온전히 내 편으로 만들려면, 하루빨리 증기 기관차 운행에 성공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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