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내가 옆에서 가르쳤다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아이에게 더 유리한 방향으로 조건을 조정할 수 있었을 텐데.
이건 벨라디가 처음으로 철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들었던 생각이었다.
벨라디가 물밑으로 무언가 준비하고 있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북부를 위해 그런 기특한 꿈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지.’
만약 그걸 자신에게 미리 말해 주었다면, 테오도르는 물심양면으로 벨라디를 지원했을 것이다.
솔직히 도헤미아가 살아 있을 때에는 벨라디의 의견을 허무맹랑하다며 무시했을 확률이 높았다. 테오도르 스스로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네시아를 키우며, 테오도르는 변했다.
그는 이제 묵묵히 자기 일만 해서는 아이를 올바르게 볼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이렇게 생각하던 테오도르는 속으로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3년 만에 만난 제 딸은 더 이상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걸.
어렸을 때부터 자주 보여 주던 의젓한 미소는 여전했지만, 벨라디는 이제 테오도르를 의지하지 않았다.
직접 아이를 가르칠 시기는 한참이나 놓쳤다는 걸,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네시아를 키우며 내가 잠시 헛된 꿈을 꾼 걸까.’
수도로 돌아가면 제일 먼저 벨라디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북부로 오기 직전, 아이가 변했다고 느끼긴 했지만……. 그래도 제 자식이니 크게 어려울 것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니 네시아에게 했던 것처럼 하면 될 거라고 여겼어.’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고, 감정을 억압하지 않고, 일상을 공유하면 될 거라고. 그러면 관계를 개선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벨라디는 네시아가 아니었다. 아이는 테오도르가 모르는 사이 홀로 성장해, 이미 자신에게서 독립한 상태였다.
이 사실을 인지할 때마다 심장이 선득해졌다.
‘난 부모로서 해 준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주눅 들어 있던 어린 시절의 벨라디와 무심해진 현재의 눈동자가 테오도르의 머리에 계속 아른거렸다.
‘내가 너무 늦은 건가…….’
테오도르는 이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후회라는 걸 알았다. 어리석었던 과거의 선택들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육아에 무지하다며 벨라디에게서 시선을 돌리면 안 됐는데…….
아이에게 그렇게 상처를 주면 안 됐는데…….
‘지금이라도 벨라디가 원하는 걸 주면, 내게 조금은 마음의 문을 열어 줄까?’
테오도르가 상념에 젖어 있을 때였다.
회의실의 문 밖으로 시종의 외침이 들렸다.
“제국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와 그 후계자이신 황태자 전하 듭십니다!”
곧 문이 열리며 황제와 황태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둘의 등장에 테오도르는 빠르게 감정을 정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여기서 내가 잘 행동해야 벨라디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다짐한 테오도르는 원탁 테이블의 각 연합 대표들과 함께 예를 표했다. 그러자 그 뒤에 있던 모든 가신들이 따라서 예를 올렸다.
황제와 황태자는 그들의 인사를 익숙하게 받으며 유유히 계단 위로 올라갔다. 두 사람이 각자 자리에 앉고 나서야, 귀족들이 자세를 풀고 착석했다.
황제가 힐끔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테오도르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테오도르는 수도에 도착한 후, 네시아를 보살피느라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예법에 따라 황제만큼은 이미 알현한 상태였다.
그때 서로 나눌 이야기는 다 나누었기에, 황제는 테오도르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서 눈을 돌려 좌중을 둘러봤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툭 내뱉듯이 말했다.
“이렇게 날도 좋은데 그대들과 회의를 해야 한다니. 짐은 벌써부터 우울하다.”
긴장된 분위기를 적당히 완화시키는 황제의 농담에 귀족들이 허허 웃었다.
그러자 왼쪽에 앉은 황태자가 가볍게 대답했다.
“폐하를 직접 만나는 것이 제국 귀족들에게 얼마나 큰 영광인데, 그런 말을 하시다니요. 크게 섭섭해할 겁니다.”
그 말에 귀족들이 웃으며 동의했다.
황제는 그 반응이 싫지 않은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얼른 회의를 진행하지. 그래야 내일 조금이라도 쉴 수 있을 테니.”
그렇게 대 가주 회의의 포문이 열렸다.
***
대 가주 회의는 총 이틀에 걸쳐 진행된다.
첫날은 소 가주 회의에서 상정한 안건들을 비롯한 다양한 대소사를 토론한다. 이에 대한 자료들은 사전에 배포되며, 각 연합은 자신들의 주장과 의견을 정리해 회의에 참석했다. 여기서 필요하다면 법안의 추가와 수정을 신청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회의를 진행하다, 시간 내에 마무리하지 못한 안건들은 다음 날로 넘어갔다. 거기서도 황제가 결정을 내리지 않거나, 찬반이 맞지 않는 안건이 생긴다면 이는 내년 대 가주 회의까지 보류하는 시스템이었다.
매년 있던 의례이니만큼 회의는 순탄하게 이어졌다. 여러 안건에 대한 의견이 오갔고, 몇 번의 찬반 투표가 진행됐다.
그렇게 북부의 안건을 살펴볼 차례가 다가왔다.
기다렸다는 듯, 아글라 공작이 제일 먼저 발언권을 얻었다.
“테오도르 앨턴 공작.”
회의 시작 전부터 조용히 있던 아글라 공작은 살짝 까칠한 음성으로 쥐고 있던 보고서를 흔들었다.
“북부의 보고서 중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항이 있던데……. 상세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아글라 공작이 가리킨 건 북부 측이 미리 배포한 회의 자료 중간에 적힌 내용이었다.
「북부는 증기 기관을 이용한 새로운 운송 수단을 개발할 계획이다.」
테오도르가 북부 연합의 대표로서 추가한 보고 사항이었다.
아글라 공작의 말에 테오도르는 무덤덤한 얼굴로 답했다.
“적혀 있는 그대로입니다.”
“적혀 있는 그대로? 증기 기관은 이미 선황 시절 큰 사고를 일으킨 위험한 물건입니다.”
아글라 공작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그에 맞추어 아글라 공작 뒤에 앉아 있던 남부 귀족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말을 얹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이런 걸 다시 꺼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북부는 정녕 모른단 말입니까?”
“더욱이 우리 제국은 증기 기관이 필요 없습니다.”
“그렇지요. 이 보고서에 따르면 증기 기관은 석탄을 이용해 동력을 생산하는 기계라고 적혀 있는데……. 동력이라면 그리리카 선황께서 개발하신 마력 변환 장치가 이미 있지 않습니까.”
“우리 데커딜 제국은 이미 마력 변환 장치로 잘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글라 공작의 바로 뒤에 앉아 있던 케스퍼 아글라가 남부의 의견을 마무리 지었다.
“북부의 지금 행동은 위험함을 넘어서, 선황의 업적에 반기를 드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니 남부는 북부의 증기 기관차 개발을 절대로 찬성할 수 없습니다.”
그걸 들은 테오도르의 머릿속에는 반론들이 한가득 떠올랐다. 그들이 쏟아 낸 비판들은 어디까지나 트집을 잡는 데 목적이 있었기에, 허점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그리리카 선황의 업적에 반기를 든다는 주장 자체가 터무니없었다.
선황이 개발한 마력 변환 장치는 마력을 동력으로 변환시키는 기계로, 공장 가동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마법사가 없으면 사용할 수 없으며, 변환 효율이 썩 좋지 않아 그리리카 선황도 불만족스러워하는 발명품 중 하나였다. 그걸 보완하기 위해 황궁 마법사들은 지금도 거듭 연구를 진행하는 중이었고.
‘그리리카 선황 시절, 증기 기관이 개발된 것도 다 이런 연유 때문이겠지.’
이 외에도 할 말은 매우매우 많았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떠오르는 반론들을 잠잠히 가라앉혔다. 지금은 제 딸이 구상한 증기 기관차와 철도가 얼마나 혁신적이고, 뛰어나며, 큰 그림인지 논리적으로 설득할 때가 아니었다.
테오도르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제와 황태자를 비롯해 회의장의 모두가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사전에 증기 기관차에 대한 간단한 언급을 들은 북부 가신들도 불안한 기색을 애써 감추는 게 느껴졌다.
지금이야말로, 벨라디의 부탁을 실행할 타이밍이었다.
“남부의 지적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그건 무슨 말입니까?”
케스퍼 아글라의 물음에 테오도르는 평이한 어조로 답했다.
“앨턴 공작가의 임시 가주인 제 딸, 벨라디 앨턴이 성인이 되자마자 바로 이 사업을 선택했습니다.”
테오도르의 말에 회의장이 한 번 술렁였다.
“젊은 아가씨가 사업 무서운 걸 모르는군.”
“역시 어린 나이에 너무 큰 성공을 거머쥐면 저렇게 무모해지는 모양입니다.”
“쯧쯧, 서부에서 일어난 증기 기관 폭발 사건으로 제국이 얼마나 떠들썩했는데.”
“마탑 측의 반발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군요.”
회의장이 시끄러워지니, 가만히 듣던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는 자는 발언권을 얻고 말하라!”
그 말에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는 그 모습을 흡족하게 보며, 테오도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앨턴 공작의 말에 따르면, 증기 기관차는 북부 전체에서 진행하는 사업이 아니란 말이지?”
“굳이 따지자면 그렇습니다.”
테오도르가 담담히 대답했다. 황태자는 탄식하며 테오도르에게 책망하듯이 말했다.
“어허, 그렇다면 공작이 막았어야지. 자식이 위험한 길로 가겠다는데, 말리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대 가주 회의까지 끌고 오면 어떻게 하는가.”
“혈기 왕성한 나이의 첫 도전을 제가 어찌 막겠습니까. 아마 지금 제 심정을 이해할 자들이 많을 겁니다.”
그 말에 대다수의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사업병에 걸린 자식을 둔 귀족들은 테오도르의 말에 절절히 공감했다.
주위의 시선이 한층 부드러워진 것을 느끼며, 테오도르는 말을 이어 갔다.
“더욱이 벨라디 앨턴은 제 대리로서 마법 루비를 성공으로 이끌었습니다. 그 공로가 있으니, 일단 응원하기로 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못마땅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던 황태자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다 과거처럼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앨턴 공작가가 책임질 건가?”
“그렇기에 오늘 이 자리에서 공개한 겁니다.”
테오도르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말했다.
“딸아이 역시 증기 기관의 위험을 알고 한 가지를 약속했습니다. 바로, 안전을 위해 주기적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보고는 소 가주 회의에서 지속적으로 공개할 계획입니다.”
“지속적으로 공개하겠다고? 만약 그 보고가 안건으로 상정되면 다음 대 가주 회의에서 찬반 토론으로 넘어간다. 토론 결과에 따라 개인 사업임에도 중지될 수 있어.”
“그렇게 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자신이 이끄는 사업을 모두에게 납득시키지 못하는 것도 무능력한 일이니.”
테오도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눈을 휘둥그레하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는 매우 파격적인 발언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