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거기다 벨라디는 나한테 자기 방도 양보해 줬다고 했어.’
이 말 역시 하녀에게서 들었다.
-벨라디 님께서 네시아 님을 위해 본인이 쓰셨던 2층 방을 내주셨어요! 지금은 손님방에 계시지만, 얼마 안 가 네시아 님의 방이 생길 거예요!
-와, 정말?!
-그럼요! 원하시면 벨라디 님의 방을 취향대로 꾸며도 된다고 허락하셨어요! 아, 백화점 카탈로그를 가져다드릴까요?
-아니! 나 그 방 그대로 쓸래!
벨라디가 쓰던 방을 그대로 쓸 수 있다니!
네시아는 그날 밤 침대에 누워 발을 동동 굴렀다.
‘히히히! 기분 좋아!’
벨라디가 자기를 신경 써 준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다. 하루라도 빨리 벨라디를 만나서 치료해 줘 고맙고, 방을 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었다.
‘그럼 벨라디가 나한테 웃어 줄까?’
꿈에 종종 나왔던 그 모습처럼?
벨라디를 만나고 싶다는 기대감이 점점 풍선처럼 커지던 나날들이었다.
드디어 네시아는 주치의로부터 밖으로 나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렇지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작은아가씨?
-네!
네시아가 힘차게 대답하자 옆에 있던 테오도르가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치의는 순간 자신이 보면 안 되는 것을 봤다는 생각에 쓰고 있던 안경을 닦는 척,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다시 안경을 쓰니, 테오도르의 얼굴은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만큼은 여전히 부드러웠고, 저 작은 아이에게는 그게 당연한 듯 보였다.
네시아가 싱글벙글 웃으며 짝! 손뼉을 쳤다.
-앗, 공작님! 그럼 이제 벨라디 님을 볼 수 있나요?!
-흠, 오늘은 힘들 것 같다.
-왜요? 감사하다고 인사만 하는 것도 안 돼요?
-아무래도 벨라디가 최근 바쁜 것 같구나.
테오도르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첫째가 자기 몰래 일을 꾸민다는 건 보고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게 섭섭하기는 하나, 흡족스럽기도 해서 테오도르에게 복잡한 심정을 선사했다.
그런 테오도르의 반응에 네시아는 살짝 풀이 죽었다.
-우웅, 알겠어요. 그럼 벨라디 님을 만나는 건 조금 더 참을게요!
-그래, 대신 오늘은 수도 저택의 정원을 산책하자. 내가 안내해 주마.
-헤헤, 좋아요!
-그리고 벨라디에게 왜 ‘님’을 붙이는 거지?
-하지만 다들 그렇게 부르던걸요?
-그들은 벨라디의 명을 따르는 입장이니 그렇지. 하지만 네시아 넌 앞으로 우리와 같은 앨턴이다. 그러니 벨라디를 언니라고 부르도록 해라.
테오도르의 말에 네시아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언니라는 호칭으로 아이가 급격히 흥분한 것이다.
그 반응에 최대한 본인의 기척을 숨기려 노력하던 주치의가 곤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과한 흥분도 금물입니다. 작은아가씨,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세요.
-후하후하-!
네시아는 주치의의 말대로 열심히 심호흡을 했다.
순수하고 귀여운 아이의 모습을 보며 주치의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 돌아가신 공작 부인과 똑같이 생긴 저 아이가 이 저택에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벨라디 님이 어릴 때에도 저렇게 해 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벨라디가 태어났을 때부터 앨턴 공작가에 머물렀던 주치의는 애써 안경을 치켜올렸다.
그는 딱 저 나이 때의 어린 벨라디가 어떤 눈으로 테오도르를 바라봤는지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지금 광경을 보고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부디 벨라디 님께서 크게 상심하지 않기를.’
주치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방을 나섰다.
그 후, 네시아는 테오도르와 함께 수도 저택의 정원을 산책했다.
세련된 스타일로 다듬어진 수도의 정원은 북부 성의 고풍스러운 정원과 느낌이 달랐다. 그리고 두 곳 다 아이가 보기에는 재미있는 것투성이였다.
오랜만에 야외로 나와 더 신이 난 네시아는 그렇게 정원을 한참 뛰어다니다 자신을 바라보던 벨라디와 눈이 마주쳤다.
금방 창문의 커튼이 쳐졌지만, 네시아는 확실히 봤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눈에 띄는 벨라디의 화려한 이목구비를.
뒤늦게 소리쳤지만, 이미 벨라디는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공작님! 저기! 저기!
테오도르가 그런 네시아를 진정시켰다.
그는 진작 벨라디의 시선을 눈치챘으나, 그저 아이를 보고 있겠거니 하며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아마 잠시 쉬고 있던 모양이다. 곧 만날 수 있겠구나.
그러나 네시아는 이제 참기 힘들어졌다.
벨라디를 한번 보고 나니,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잘생긴 얼굴을 가까이에서!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곧 만날 수 있을 거라던 테오도르의 말도 네시아를 더욱 조바심 나게 할 뿐이었다.
‘그 곧이 도대체 언제인 거야?’
그냥 몰래 슬쩍 보면 안 되는 걸까? 정말 얼굴만 봐도 좋은데.
시간이 지나 밤이 찾아왔다. 침대에 누워 있던 네시아는 결국 호기심과 충동을 참지 못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진짜 딱 한 번만 가는 거야!’
네시아는 지난 3년 동안 벨라디를 만나길 고대했다. 그러나 저택에 도착한 후 이런저런 사정으로 만나질 못했다.
아이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딱 한 번만!’
네시아는 그렇게 잠옷 차림으로 쪼르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마법 전등이 간간이 켜진 복도가 네시아를 맞이했다.
인적 드물어 아이에게 충분히 무서울 법했지만, 모험심에 가득 차오른 네시아는 그런 것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벨라디, 기다려!’
네시아는 결승점만 바라보는 경주마처럼 와다다 복도를 내달렸다.
마침 경비가 삼엄한 외부와 다르게 저택의 내부는 한산했다. 외부의 경비를 모조리 뚫고 제국 제일의 검이 살고 있는 곳에 침입할 수 있는 암살자는 몇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복도를 빠르게 달리는 네시아는 평범한 사람과 달랐다. 네시아는 눈의 정령 셰넌이 도헤미아의 과거를 이용해 만든 생명이기에, 아직은 정령에 더 가까웠다.
그렇기에 신체 능력도 평범한 아이보다 비범했고, 무의식중으로 정령의 힘을 방출해 자신의 기척을 완전히 지우기도 했다.
지금이 딱 그런 경우였다.
‘벨라디 방은 4층이라고 했어!’
‘벨라디를 만난다’라는 흥분감에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기척을 전부 지웠다. 이런 상태라면 테오도르도 찾기 어려웠다.
만약 자연 친화력이 풍부한 이가 저택에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이질감을 느꼈을 테지만, 앨턴 공작가에는 정령사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자가 없었다.
그렇게 네시아는 복도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4층 계단에서 경비를 서던 제플린을 휙 지나쳤다.
수월하게 도착한 4층 복도는 손님방이 있는 복도보다 훨씬 방이 많았다. 하지만 네시아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맨 끝에 있는 가장 커다란 문에서 아주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셰넌?’
셰넌과 함께 있을 때면 느낄 수 있던 친근감.
네시아는 쪼르르 발을 움직여 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러자 아이의 뛰어난 청각에 두 개의 목소리가 들렸다.
“벨라디이, 아이닝 얼굴을 봐서라도 화 풀어. 응? 응?”
“…….”
“킬리언이 너무 미안하대, 정보를 미리 말하지 않아서 계속계속 후회했대!”
“…….”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런다고 맹세했어! 벨라디가 허락해 준다면 당장 앨턴 공작가로 와서 얼굴 보고 사죄하고 싶다고도 했어!”
“허락하지 않는다면?”
“으응?”
“그럼 계속 아이닝 널 통해서 날 귀찮게 할 거라고 그러니?”
“아, 아이닝이 귀찮아?”
“……아니야, 아이닝. 벽 보고 시무룩해하지 말고 이리로 와.”
“벨라디이-.”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벨라디가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이닝, 킬리언에게 가서 이렇게 말해. 서로 할 일이 남았으니 이번에는 넘어가지만, 한 번 더 공유할 정보를 숨긴다면…… 그건 배신이라고.”
“응응!”
“그리고 앨턴은 절대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이야.”
“알겠어! 아이닝이 킬리언 혼내 줄게! 킬리언 반성하라고 마구 혼내 줄게!”
“착하네, 아이닝.”
이야기를 듣던 네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 너머 느껴지는 건 섀년과 비슷한 기운인데, 목소리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아이닝?’
그게 누구지?
혹시 아이닝도 정령인가?
벨라디를 보러 왔다가 생소한 목소리에 집중하게 된 네시아는 연신 갸우뚱거리며 호기심을 키웠다.
‘설마 벨라디도 나처럼 정령 친구가 있는 걸까?’
그런 거라면 더 좋았다.
벨라디와 공통점이 생겼다는 사실이 네시아를 기쁘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벨라디, 밖에 누군가 있어.”
그 말에 네시아가 움찔거리며 문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동시에 문이 스르륵 열렸다. 어두운 복도에 밝은 빛 한 줄기가 새어 나와 네시아의 시야를 밝혔다.
그 빛 사이로 벨라디가 서 있었다. 그게 네시아에게는 마치 후광으로 보였다.
네시아는 멍한 눈으로 그런 벨라디를 바라봤다.
“네시아 앨턴.”
벨라디의 목소리는 네시아의 상상보다 훨씬 강렬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네시아는 온몸이 쇠사슬로 꽁꽁 묶인 듯한 결박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이의 머리에는 하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벨라디 님이 이렇게 눈에 딱 힘을 주니까! 배신자가 털썩 무릎을 꿇어 버렸어요!
‘진짜다.’
네시아는 지금의 벨라디에게서 공포감을 느꼈다. 그녀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어쩐지 다리가 후들거렸고, 잘못하면 엉덩방아를 찧을 것 같았다.
네시아가 벨라디에게서 눈을 못 떼는 사이, 벨라디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지금 뭔가 들었니?”
그 물음에 네시아는 본능적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그럼 밤이 늦었으니 어서 방으로 돌아가.”
“네, 네!”
벨라디의 명령에 네시아가 헐레벌떡 달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기대감으로 두근거리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박동이었다.
‘무서워! 무서워!’
아이는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에 어지러웠다.
숨이 가빠 왔다.
그리고 우습게도, 무섭다는 감정 뒤에는 격렬한 감상이 따라왔다.
‘그런데……. 그런데 잘생겼어!’
올려다본 벨라디의 붉은 눈은 북부 성에서 자주 보던 마법 루비보다 더 영롱하고 반짝였다.
짙은 검은 머리는 별이 떠 있던 밤하늘을 잘라다 놓은 것 같았다.
네시아는 자신의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무서운데 너무 예뻐!’
이게 공포 때문인지 흥분 때문인지 영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렇게 네시아의 첫 모험은 혼란스러움으로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