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98화 (99/197)

98.

[연지곤지]

리켄 남작의 오랜 고민거리.

그건 바로, 북부 지역들의 경제 침체 문제였다.

‘지금은 상당한 부분을 앨턴 공작가에 의지하고 있지.’

기존 북부의 가장 큰 수입원이었던 철광석 산맥은 80%가 앨턴 공작령에 있었다. 또한, 이번에 발견한 루비 광산 역시 앨턴 공작령에서 발견됐다.

사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북부에서 가장 넓은 영지를 우리 공작가가 책임지고 있으니까.’

마갈라 제국과 데커딜 제국의 북부 국경선은 대륙에서 가장 거대하고 험준한 산세를 자랑하는 마테오 산맥이다. 우리 가문의 영지는 이 마테오 산맥을 품고 있었기에, 다른 북부의 영지보다 매장된 자원의 양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북부는 이 자원으로 버티고 있었고, 덕분에 북부의 가신들은 앨턴 공작가의 말이면 꼼짝을 못 했다.

‘그리고 리켄 남작은 이를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 판단하고 있었지.’

리켄 남작은 앨턴 공작가의 아주 오래된 충신이었으나, 이것과 그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여겼다.

무언가에 크게 의지한다는 건 결국 발전 가능성이 점점 줄어드는 것과 같았다. 북부는 앨턴 공작가에 의지하고 있었고, 앨턴 공작가는 매장된 자원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자원에는 한계가 있는 법.

정치의 핵심이며 천천히 공업 지대로 발전하고 있는 동부, 비옥한 토지로 매년 풍년이 드는 서부, 그리고 활발한 교역으로 계속 돈을 굴리는 남부와는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 달랐다.

만약 북부가 이 상황에 안주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는다면, 앨턴 공작가에서 무슨 일이 생기거나 광물 자원의 채굴량이 줄어들었을 때 함께 자멸할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자원으로 잠시 숨통이 트인 지금, 각 영지는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리켄 남작의 뜻이다.

‘나도 여기에 동의하는 바였고.’

아버지도 그랬었지.

그러나 아버지와 리켄 남작이 아무리 북부의 또 다른 가능성을 찾으려고 해도 영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일 년의 절반이 얼어붙는 땅에서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으니까.’

이런 때, 내가 리켄 남작에게 내민 제안서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앨턴 공작가는 철도가 깔린 후, 증기 기관차가 지나다니는 북부의 영지에 일정 금액의 토지 이용료를 지불한다.

또한 영지가 이로 인해 부수입을 얻는 것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증기 기관차로 사람의 이동이 자유로워지면, 각 영지별로 관광업을 발전시켜도 좋다는 뜻이었다.

‘북부에 널린 것이 눈과 추위가 만들어 낸 경이로운 자연 풍경이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이런 이색적인 구경거리를 선호하는 건 이미 수도의 겨울 연회에서 확인을 마친 바였다.

다행히 리켄 남작은 더미 남작과 다르게 증기 기관차의 가능성을 알아봤다. 그랬기에 자신의 영지에 역을 세우는 것에 동의했고.

물론, 여기서 리켄 남작은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이 일이 알려진다면, 벨라디 님만의 힘으로는 진행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앨턴 공작님의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그 말에는 나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 거대한 사업을 계속 아버지 몰래 진행할 수는 없었다. 특히, 아버지가 북부에 있을 때라면 몰라도 이제 수도로 돌아오셨으니 더 이상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뭐, 아버지의 협력은 솔직히 걱정 안 돼.’

난 이미 루비 사업을 성공시킨 전적이 있으니까.

이것으로 내게 사업 감각이 있다는 걸 아셨으니, 이번에도 한번 해 보라며 지켜보실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리켄 남작이 말했던 아버지의 도움은 반대 세력으로부터 북부 사업을 지킬 보호막을 의미했다. 남작도 이 거대한 교통수단을 반대할 세력이 어디일지 이미 예측한 것이다.

‘확실히 마탑과 동, 남부 연합은 아직 내 힘만으로 막기는 힘들어.’

그러니 이번만큼은 아버지의 힘이 필요하지.

뭐, 아버지도 내가 무언가 꾸미고 있단 걸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지난 3년 동안 내가 아주 천천히 아버지에게 정보를 풀었기 때문이다.

‘아직 감시자가 내 손에 있다는 건 들키지 않는 게 나아.’

감시자들은 저택 모든 이의 동태를 파악해 가주에게 전달하는 것이 의무다. 그 대상에는 임시 가주인 나도 포함이었다.

특히 아버지는 감시자인 스티아가 내 하녀인 걸 알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나에 관해 아무런 정보도 전달하지 않으면, 이건 분명 의심을 살 일이었다.

‘그러니 적당한 정보는 푸는 게 편해.’

난 리켄 남작의 최종 승인이 담긴 서류를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는지 아니?”

“현재 정원에 계십니다.”

“집무실이 아니라 정원에?”

“새로 오신 아가씨와 함께 잠시 휴식을 취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 이제 밖으로 나와도 되는 모양이네. 알겠어.”

“그럼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벨라디 님.”

로미가 인사를 한 후, 집무실을 나섰다.

타악.

문이 완전히 닫히자, 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실내는 난방 장치로 따뜻했기에, 창문에는 자연스럽게 김이 서려 있었다.

난 손으로 그 김을 지우고 정원을 내려다봤다.

때마침 넓은 중앙 정원에 두 개의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귀마개를 쓴 네시아와 아버지였다.

네시아는 햇빛 가득한 정원에서 아직 녹지 않은 눈을 밟으며 뛰어다녔다. 이제는 전혀 아프지 않은지, 아이는 내 기억 속 모습처럼 활기가 넘쳤다.

사실 난 네시아를 치료해 준 이후로 한 번도 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다시 아이가 아플지도 모르니 타인과의 만남을 삼가고 방에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주치의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주치의는 다시 아이가 아파서 그 험악한 분위기에 휘말리는 것이 싫었겠지.’

난 딱히 네시아를 먼저 만날 생각이 없었기에, 주치의의 말에 동의했다. 멜도르도 요즘 연구실에서 통 나오지 않았고.

아버지 역시 주치의의 의견을 받아들여, 정식으로 네시아를 소개하는 건 잠시 미루기로 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러다 슬슬 날이 풀리니 돌아다니기로 한 모양이군.’

아마 곧 네시아를 만날 때가 오겠네.

난 아이에게서 시선을 돌려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천천히 걸으며 아이가 뛰어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종종 네시아가 손을 이끌고 달리면 같이 달리며 장단에 맞춰 주었고.

그 폼이 익숙한 걸 보니, 아마 북부에서도 저렇게 아이와 자주 놀아 준 게 분명했다.

참 다정한 부녀지간이었다.

난 무감각한 눈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

‘그래, 슬슬 아버지에게 말을 할 때야.’

지금은 아동법이 수정되던 그때와 경우가 달라졌다. 모든 준비가 차근차근 이루어졌고, 내 나이도 차올랐다.

성인이 된 임시 가주의 첫 번째 사업을 가주가 인정했다는 모양새 역시 여러모로 내게 유리할 것이다.

‘이러면 앨턴 공작가의 후계자가 나로 바뀔 수 있다는 인식이 올라가거든.’

그러니 이제, 아버지에게 보여 준 점들을 하나의 선으로 이어 주자.

네시아가 건강을 찾아 아버지도 한결 기분이 좋아 보이니 딱 알맞은 타이밍이었다.

난 책상으로 다가가 위에 있는 작은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노크 소리가 들렸고, 스티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벨라디 님.”

“아버지와 만날 약속을 잡아야겠어.”

“알겠습니다, 집사에게 말해 놓겠습니다.”

스티아가 그렇게 말하며 잠시 내 뒤를 바라봤다. 뒤편 창가는 내가 아버지와 네시아를 관찰하느라 커튼이 조금 걷힌 상태였다.

스티아는 자연스럽게 눈길을 거둔 후, 고개를 숙였다.

“그럼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스티아가 나간 후, 커튼을 다시 정리하기 위해 창가로 다가갔다.

그 순간, 네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사실 확실하지는 않았다. 창문에는 김이 서려 있었고, 난 위에 있으니 네시아가 날 본 건지, 아닌지 헷갈렸으니까.

다만 아이의 인영이 두 팔을 번쩍 들고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는 건 확인할 수 있었다.

난 흘깃 그걸 보다 망설임 없이 커튼을 닫았다.

‘이제 다시 일을 해 볼까.’

네시아를 신경 쓰기에는 내가 집중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

네시아는 아까부터 기분이 너무 좋았다.

사실 아이는 항상 기분이 좋았지만, 지금은 특히 더 좋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방을 벗어나 산책을 했고, 그 산책에서 벨라디를 봤기 때문이다.

‘벨라디, 이제 안 바쁜 걸까?’

수도에 도착한 첫날 이후로 네시아는 금세 기운을 되찾았다. 아이는 전혀 아프지 않았고, 오히려 펄펄했다.

하지만 주치의는 그런 네시아를 진정시켰다.

-한동안은 경과를 봐야 합니다. 아무래도 정령에 관한 건 저도 처음인지라……. 일단 무조건 안정입니다.

이런 주치의와 의견이 같았는지 공작도 이렇게 말했다.

-알겠다. 들었지, 네시아? 조금 답답해도 방에 있자.

네시아는 무척 답답했으나, 자신이 아플 때 많은 사람들이 고생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따라서 얌전히 방에서만 행동했고, 이런 네시아를 기특히 여긴 테오도르는 자주 아이를 칭찬해 주었다.

사실 방에만 있던 시간은 썩 재미있지 않았지만, 네시아는 테오도르의 칭찬으로 버텨 냈다.

그래도 다행히 아이에게는 나름의 즐거움이 있었다. 새로 네시아의 시중을 들게 된 하녀는 저택의 하녀 중 가장 나이가 어렸으며 무척 활기찼다. 덕분에 종종 네시아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이의 심심함을 달래 주고는 했다.

-그때! 벨라디 님이 이렇게 눈에 딱 힘을 주니까! 감히 공작가를 배신했던 배신자가 ‘으윽! 엄청난 패기다!’ 이러면서 털썩 무릎을 꿇어 버렸어요!

-우와!

-이렇게! 단지! 눈빛만으로! 샤샤샥!

단점이라면, 벨라디를 너무 동경한 나머지 이야기에 간을 자극적으로 친 것 정도? 그러나 심심한 아이에게는 이 정도가 딱 좋았다.

하녀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상상 속 벨라디는 점점 엄청난 존재가 되어 가고 있었다.

네시아는 매일 밤, 잠들기 전 벨라디에게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나 열심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역시 존댓말을 써야겠지? 그리고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벨라디 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아. 으음, 예법은 아직 자신 없는데…….’

그래도 크게 불안하지 않았다. 네시아가 예법에 서툴러도, 벨라디는 자신에게 상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네시아는 자신이 아플 때 다정하게 이마의 땀을 닦아 주던 벨라디의 손길 역시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연지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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