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97화 (98/197)

97.

윌리엄의 부인은 난임으로, 부부 사이에는 오래도록 아이가 없었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정보에 의해 윌리엄의 부인이 죽기 전 임신 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정보를 감시자에게 알려 줬던 노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분명 임신이라고 했어. 남편에게도 아이에게도 미안하다며 그 부인이 하염없이 울었거든.

“임신…….”

난 그렇게 중얼거리며 별관에 마련된 카우치에 앉았다. 그리고 검지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정말로 그 부인이 임신을 했다면…… 황태자가 아이를 이용해 협박을 했을 수도 있지.’

마침 원작에서 할아버지가 언급했던 말에도 수상한 부분이 있지 않았는가.

-운만 따라 줬다면 두 사람에게도 이렇게 예쁜 아이가…….

저 말은 그저 아이가 없는 부부를 안타깝게 여기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원작에서도 부인이 임신을 했었던 건가? 그리고…….

‘유산을 했을 수 있겠군.’

일단 윌리엄이 황태자의 편으로 돌아선 건 돈보다 배 속의 아이가 이유일 가능성이 컸다.

그 아이가 이번에도 유산이 됐는지, 부인의 사고사는 어떻게 된 것인지 확인하는 건 차차 하기로 하고.

‘일단 내가 파고들어야 할 단서는 윌리엄이 아닌 황태자비야.’

결국 내 타깃은 오래전에 죽은 윌리엄과 그 부인이 아닌, 황태자니까.

일단 윌리엄과 황태자 사이에 패러그린 후작가가 엮여 있는 걸 확인했으니, 이번에는 황태자비에게 덫을 놓을 차례였다. 그랬기에 난 엘린에게 그런 지시를 내린 것이다.

‘얼마 안 있으면 봄의 시작을 알리는 꽃의 축제가 있을 거야.’

꽃의 축제 기간에는 곳곳에서 봄을 기념하는 작은 연회가 열렸다.

이 연회만이 특징이 있다면, 주최자가 겨우내 연습했던 예술 활동을 선보인다는 것이다. 특히 미술 작품과 시 낭독, 피아노 연주가 큰 인기였다.

‘그리고 황궁 일원을 대표해 연회를 주최한 황태자비는 작년, 재작년 두 번 다 미술 작품을 전시했지.’

참고로 이 연회에서는 타인의 작품을 자신의 것이라 속이는 등 꼼수가 자주 쓰였다. 특히나 미술 작품 전시는 그런 꼼수를 부리기 매우 편한 방식이었다.

하긴, 애초에 예술을 하지도 않았던 이에게 갑자기 전시를 하라고 하면 다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황족 체면상 엉성한 것을 내보일 수는 없으니까.’

모두 어느 정도 이런 사정을 알았기에, 처음부터 미술 작품을 선택해도 그러려니 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황태자비는 연속으로 그림 전시를 선택했고, 이것으로 사교계에서는 한 번 뒷말이 오간 상태였다.

물론, 황태자비도 나름 머리를 써 본인이 그린 것처럼 계속 비슷한 화풍의 그림을 전시했지만…….

‘오히려 그게 더 티가 났었지.’

그리고 내가 황태자비 궁에 잠입시킨 외부 감시자의 보고에 따르면, 황태자비가 이번에 준비한 꽃의 축제에도 미술 작품이 전시될 예정이었다.

전달된 쪽지에는 이 문제로 황태자와 약간의 다툼이 있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난 이 사실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후년 꽃의 축제에서는 황태자비가 1년 동안 꼬박 연습한 피아노 연주를 선보이거든.’

그 연회는 원작에서 네시아가 참석했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덕분에 난 미리미리 엘린의 피아노 연주를 황태자비에게 노출시킬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아마 곧 황태자비는 아무도 모르게 자신을 가르칠 피아노 강사를 물색할 테니까.

‘마침 남부 출신인 황태자비는 아글라 공작 부인의 살롱에 자주 다니고 말이야.’

타이밍이 좋았다.

애초에 엘린을 끌어들였던 건 그녀의 피아노 실력으로 황태자비의 관심 역시 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진작 황태자비의 약점 하나는 잡겠다고 벼르고 있었거든.’

본인은 이미 온 촉각을 곤두세워 날 경계하고 있는데, 내가 가만히 있어 주면 재미없잖아?

이제는 윌리엄의 부인에게서 벗어나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차례였다. 그러니 엘린이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길 바랐다.

***

한번 눈이 펑펑 내린 이후, 날씨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난 4층에 새로 마련된 내 집무실에 앉아 북부에서 보낸 편지를 읽었다. 거기에는 바바가 무사히 이사를 끝냈으며, 숨어 살던 시절 데리고 다녔던 조수 몇과 증기 기관차 제작을 시작했다는 더너스의 보고서가 적혀 있었다.

시간이 오래 지났지만, 이미 여러 시도를 했던 터라 증기 기관차는 예상보다 빠르게 완성될 것 같다는 바바의 의견도 추신으로 곁들여져 있었다.

난 그걸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잘하면 날이 풀리는 즉시 철도 공사를 할 수 있겠어.’

북부의 첫 역이 개통될 영광스러운 지역은 바로 동부의 경계와 맞닿은 더미 남작의 영지였다.

북부의 가장 동쪽에 있는 더미 영지는 봄이 되면 가장 빠르게 날이 풀렸고, 늦가을 전까지는 선선한 날씨를 유지했다.

또한 텔레포트 진이 설치되어 있어서 물건을 바로바로 이동할 시작점으로 삼기 좋았다.

‘무엇보다 내가 그 텔레포트 진의 공동 소유권을 가지고 있으니까.’

지난날, 더미 남작은 자신의 어리석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나와 영지의 주 수입원인 텔레포트 진을 공유해야만 했다.

덕분에 더미 남작의 협조를 구하는 건 매우 쉬운 일이었다.

‘더미 남작은 내 제안을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이거든.’

아들의 일도 있었고, 텔레포트 진도 마음에 걸릴 테니까.

뭐, 철도 공사 동의서에 서명을 하던 더미 남작의 표정을 떠올리면 철도의 가능성을 썩 믿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난 영지 이용 수수료를 내게 조금 더 유리한 방향으로 책정할 수 있었으니, 만족스러운 계약이었다.

‘그리고 증기 기관차 사업이 성공하더라도, 수더분한 더미 남작은 수수료 비율을 더 받았어야 한다며 분하게 여기기보다는 예상치 못한 추가 수입에 만족해할 인물이지.’

그렇게 철도가 완공되는 순간을 떠올리며 더너스의 보고서를 즐겁게 정리하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똑-.

“벨라디 님, 로미입니다.”

“들어와.”

내 말에 문이 열리며 깐깐한 인상의 중년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깔끔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 안경이 그 인상과 무척 잘 어울렸다.

그녀가 조금 빠른 말투로 입을 열었다.

“리켄 남작님께서 벨라디 님의 보고서에 최종 승인을 마치셨습니다.”

로미는 깔끔한 동작으로 보고서를 내밀었다.

난 그걸 받아 들며, 그녀를 바라봤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꼿꼿하게 서 있는 로미는 원래 리켄 남작 밑에서 일하던 아버지의 보좌관 중 한 명이었다. 또한 로미는 제국에 몇 없는 여성 관료로, 손이 빠르고 융통성이 뛰어났다.

그랬기에 내가 임시 가주로 자리를 잡은 후, 리켄 남작이 내 보좌관으로서 소개해 준 인물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같은 성별이니 내가 더 편하게 느낄 거라고 여겼겠지.’

사실 어느 보좌관이 오든 크게 상관없었다.

아버지의 보좌관들은 전부 능력이 있었고, 무엇보다 날 향한 호감도가 어느 정도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난 무심한 아버지와 다르게 정시 퇴근을 준수하는 상사였거든.’

물론, 아버지가 딱히 그들에게 일을 더 하라고 부추긴 건 아니다. 그는 그저 무신경하게 자신의 업무에만 집중했었다.

그러나 언제나 재택근무를 하는 아버지에게는 따로 퇴근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여파로 보좌관들은 늦게까지 퇴근을 안 하는 최종 상사의 눈치를 보며, 매일 반강제로 야근을 해야만 했다.

‘나도 종종 아버지의 집무실 맞은편에 위치한 보좌관실에서 그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목격했었고.’

그래서 아버지를 북부로 보내면 그대로 내 편으로 만들까 생각도 해 봤었지. 근무 환경을 조금만 바꿔도 날 좋은 상사로 인식할 것 같았거든.

이 생각은 바로 적중해서, 보좌관들은 정해진 시간에 딱딱 퇴근시켜 주는 내게 금방 호감을 품었다.

또한 일의 효율도 크게 늘어나, 반강제로 야근을 하던 때와 비슷한 양의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특히 로미는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 확정된 퇴근 시간을 더욱 좋아했지.’

로미는 새로운 상사로서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고, 나도 입이 무거운 로미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난 비밀리에 구상 중이던 철도 계획을 로미에게만 언급했다. 어차피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할 수 없으니, 능력 좋은 부하에게 일찍 오픈하는 것이 내게도 편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철도 사업에 필요한 여러 일들을 그녀와 배분할 수 있었다.

‘바바가 살 집과 사용인들을 구하는 일, 더미 남작과의 계약서 작성, 철도 공사에 활용할 재료들을 확인하는 것까지 도움을 많이 받았지.’

그리고 지금 이 보고서 역시 그 일의 일환이었다. 로미에게서 받아 든 보고서 맨 위에는 리켄 남작의 승인 인장이 찍혀 있었다.

난 그걸 보며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철도 공사도 준비가 얼추 끝났군.’

내가 역의 시작을 더미 영지에서 진행하자고 마음먹었던 마지막 이유는 이 리켄 남작 때문이었다.

더미 영지의 위쪽으로 붙어 있는 영지가 바로 리켄 남작가의 영지인 리켄 영지였기 때문이다.

‘위치도 그렇고, 둘 다 나와 안면이 깊은 자들이니 철도 공사를 한다면 이 영지를 관통하는 게 딱 좋다고 생각했어.’

그러기 위해서는 리켄 남작을 설득해야 했다.

리켄 남작은 일에 관해서는 생각보다 보수적인 인물로, 큰 변화보다는 안정적인 걸 추구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우리 북부는 그 당시 막 발견한 마법 루비를 안정적인 수입원으로 만들어야 할 상황이었고.

그랬기에 리켄 남작은 맨 처음, 내가 내민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물론 저 역시 교통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압니다. 그러나 지금은 앨턴 공작님께서 맡기신 루비 사업에 집중하셔야 할 때입니다, 벨라디 님.

나 역시 리켄 남작이 처음에는 거절할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의 의견을 수용하는 척, 잠잠히 있으며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길 기다렸다.

그렇게 루비 사업이 궤도에 오르고, 내가 진행하는 방식이 성공을 거둘 때 난 다시 한번 그에게 제안서를 내밀었다.

이번에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 미리 생각해 놓은 제안들이 추가로 적혀 있었다.

-한번 읽어 봐.

-으음, 그때 말씀하신 이야기라면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일단 읽어 보고 말하자고, 남작.

내 말에 리켄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고, 며칠 뒤 내게 긍정의 사인을 보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내민 제안서에는 리켄 남작의 오랜 고민거리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적혀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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