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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96화 (97/197)

96.

난 그런 그녀를 충분히 이해했다.

엘린의 동생들은 내가 준 초대장으로 무사히 마력을 개화했다. 그 후, 작은 인연을 기회 삼아 마탑에서 허드렛일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둘은 어깨너머로 마법을 익히다, 마탑 마법사 중 한 명의 눈에 들어 그녀의 제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게 반년 전 일이었다.

시작부터 마법사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마탑에서 마력을 개화했고, 3년 안에 그중 한 명의 제자가 되다니. 엘린의 쌍둥이 동생들은 아주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문제는 돈이지.’

마법사들 사이에서 스승과 제자는 흔히 알려진 끈끈한 유대 관계라고 보기 어렵고, 오히려 일대일 개인 과외라고 보는 게 편했다. 그리고 당연히 마탑 마법사들의 몸값은 매우 높았다.

‘지금 엘린의 월급으로는 본인을 포함한 5인 가구의 생활비로도 빠듯할 테고.’

이 상황에서 엘린은 향후 몇 년간 쌍둥이의 막대한 교육비를 감당해야 했다.

아마 엘린은 한 명의 마법사를 키우는 데 그만큼의 돈이 드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그때 아무 대책 없이 덥석 내가 내민 초대장을 잡았겠지?’

내가 일부러 엘린을 자극하기도 했고 말이야.

지금까지는 본인이 꾸준히 모아 온 개인 피아노 강습비로 버텼을 테지만, 이제 슬슬 그 돈도 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딱 이런 순간에 내가 본인을 불렀으니, 아마 어느 정도는 각오를 하고 왔겠지.

‘그렇다고 해도, 갑자기 황태자비를 가르치라고 해서 깜짝 놀란 것 같지만.’

이 모든 과정을 예상하고 있던 난 엘린의 정수리를 보며 속삭였다.

“그 마법 루비면 네 동생들의 1년 치 교육비로는 충분할 거야. 지금이 제일 값이 높을 테니 바로 처분하도록 해.”

“벨라디 님…….”

“살롱에서 네가 입을 옷과 장신구도 새로 맞추도록 하자. 일이 끝난 후 전부 알아서 처분해도 좋아.”

“…….”

“황태자비 전하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면, 거기에 필요한 모든 걸 지원해 주지. 그에 맞는 추가 보수도 지불할 거야. ”

“하, 하지만.”

“엘린.”

난 그녀의 가슴에 달아 준 브로치를 손가락으로 쓰윽 쓸었다.

“내가 왜 굳이 이런 패물들로 네 재능을 사는지 알고 있지?”

내 말에 엘린이 멈칫거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지식한 엘린의 조부모는 켄뉴브 학교의 월급도 겨우 허락한 자들이었다.

그런 작자들인데 엘린이 갑작스러운 거금을 들고 가면 아마 기겁을 하며 닦달할 것이다. 도대체 이 돈들은 어디서 났냐고.

‘하지만 엘린은 곧 죽어도 본인이 내가 꾸미는 계략의 일부가 되었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거야.’

엘린도 진작 눈치챘을 것이다. 내가 단순히 피아노 연주 때문에 그녀를 살롱에 보낸 것이 아니란 걸.

그리고 이미 엘린의 가문은 앨턴 공작가를 배신한 대가로 큰 위기를 겪은 적이 있다. 그러니 엘린은 더더욱 알아서 입을 단속하겠지.

나도 그런 엘린의 사정을 알기에, 그녀를 배려한 것이고.

‘이런 액세서리들은 엘린의 연주를 크게 좋아하는 노부인들이 가끔 선물로 주고는 하니까.’

물론 내가 달아 준 마법 루비만큼 귀한 건 주지 않지만, 엘린의 조부모가 그냥 루비와 마법 루비를 어떻게 구분하겠는가. 그냥 통 큰 귀부인에게 선물을 받았겠거니 하고 좋아하겠지.

“엘린, 넌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가치 있는 아이야. 겁먹지 말고, 내 배려와 투자에 맞는 결과를 가지고 와 주길 바라.”

내 말에 엘린이 다시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가 선사한 긴장감과 부담감에 엘린의 얼굴이 굳었지만, 도망가기엔 그녀의 어깨에 얹힌 짐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니 알면서도 내게 이용당하는 거지.’

엘린이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떴다. 다시 드러난 그녀의 눈에는 아까의 머뭇거림이 전부 사라진 채였다.

“알겠습니다, 벨라디 님.”

“연습실이 필요하면 언제든 저택의 피아노를 내어 줄 테니, 편하게 들르도록 해.”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도 좋아.”

“저, 벨라디 님. 그럼 지금 바로 연습을 시작해도 될까요? 아무래도 저희 집 피아노보다는 공작가의 피아노가 살롱의 피아노와 비슷해서.”

“그래, 그럼. 스티아.”

내 부름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스티아가 다가왔다.

난 그런 그녀에게 엘린을 맡겼다.

“엘린이 필요한 건 전부 준비해 줘.”

“예, 벨라디 님. 엘린 아가씨, 이쪽으로.”

엘린이 내게 예를 갖춰 인사한 후, 스티아를 따라 별관을 나섰다. 뒤에서 보니 간간이 손을 올려 가슴에 달린 브로치를 쓰다듬는 게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저 모습을 보니, 일은 잘 해내겠군.’

엘린이 완전히 별관을 나서자, 난 최근 외부 감시자에게서 받은 보고들을 하나둘 떠올렸다.

3년 전, 굳이 엘린과 감시자를 페어로 묶어 아글라 남작 부인의 살롱에 보낸 건, 전부 한 인물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바로,

‘윌리엄의 부인에 대해서.’

윌리엄의 부인은 알려진 정보가 많지 않았다. 확인해 보니, 그녀는 내가 태어나고 며칠 후 사고사로 사망했고, 그녀의 친정도 진작 파산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사람이니 누군가와 교류를 나누었던 흔적은 남아 있어야 할 텐데.

‘너무 깔끔했지.’

마치 누군가 말소라도 한 것처럼.

그나마 오랫동안 하녀로 일했던 에밀리를 통해 그녀가 모임을 싫어하는 어머니 대신 가끔 살롱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랬기에 나는 엘린과 감시자를 아글라 공작 부인의 살롱에 잠입시킨 것이다.

‘물론, 이 방식으로는 빠르게 정보를 모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어.’

아무리 엘린으로 살롱의 분위기를 풀었다 해도 배타심 강하고 까다로운 귀부인들이 입을 쉽게 열 리 없으니까.

그렇지만 윌리엄의 가족인 동시에 그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그의 부인을 조사에서 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얼추 귀만 열어 놓고 잊고 있었지.’

엘린의 신변이 너무 드러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연주자로 보내는 것도 근 1년간 멈추었고.

그러다 꾸준히 감시자를 보낸 효과가 드디어 열매를 맺었다. 3년 동안 계속 얼굴을 비치는 외부 감시자에게 귀부인들이 차츰차츰 경계심을 푼 것이다.

‘사실 인력이 부족해서 살롱 조사는 포기할까 고민했는데.’

제플린의 조언대로 계속 유지하길 잘했지.

윌리엄과 그 부인이 사라진 건 벌써 20년도 전의 일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살롱의 회원이던 노부인들이 있었다.

윌리엄의 부인을 기억하고 있던 노부인들은 감시자에게 여러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토대로 알아낸 정보는 일단, 부인의 친정이 오래전 사업을 하다 망했다는 것. 그리고 재주 좋게 막대한 돈을 빌려 와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또 망했고, 또 빌리고, 또 망하고.’

그 짓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지?

그리고 그 돈을 빌린 곳이…….

“패러그린 후작가라.”

패러그린은 암암리에 고리대금업을 한다며 소문이 안 좋은 가문이었다. 물론 여기서 이 가문에게 주목할 점은 고리대금업이 아니었다.

황태자의 부인이자 사교계에서 내 라이벌로 꼽히는 황태자비. 그녀가 바로 이 패러그린 후작의 고명딸이었기 때문이다.

‘윌리엄과 황태자가 이렇게 연결되어 있었군.’

패러그린 후작가는 아주 철저한 비밀 유지 각서를 쓴 후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따라서 윌리엄의 부인은 친정의 일을 남에게 털어놓지 못한 채 끙끙 앓다가 입 무거운 살롱의 몇몇 부인에게 겨우 상담을 한 것이다.

살롱의 귀부인들은 이 비밀을 20년이란 세월 동안 지켜 주다 겨우 감시자에게 알려 주었던거고.

‘살롱 부인들의 말에 따르면, 윌리엄은 결국 처가의 빚을 알고 본인이 갚겠다고 나섰어.’

그리고 부인은 윌리엄에게 큰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지.

여기서 여러 의문점이 생겼다.

‘그런데 윌리엄이 고작 돈 때문에 우리 가문을 배신했을까?’

그리 납득이 가는 이유는 아니었다. 돈 따위로 배신할 놈을 총집사까지 올릴 정도로 앨턴가는 느슨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필 그 친정이라는 곳이 악명 높은 패러그린 후작에게 돈을 빌린 것도 마음에 걸려.’

그 친정도 귀족이니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것이다. 패러그린이 악질이라는 걸.

그런데 왜 굳이 그들에게 돈을 빌렸을까? 공작가의 신임을 받는 사위에게 먼저 손을 뻗지 않고?

‘사람이 절박해지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가족일 텐데.’

심지어 윌리엄은 애처가라고 소문이 자자했으니, 부인의 친정을 모른 척했을 리 없었다.

그렇다는 건…….

‘처음부터 황태자가 손을 썼을 가능성도 열어 둬야겠어.’

모든 의문은 항상 황태자가 원흉이었으니까.

이렇게 되면, 이제 원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원작에서 윌리엄은 앨턴 공작가를 배신하지 않았다. 이는 확실히 나온 부분은 아니고, 내가 여러 근거들을 바탕으로 얻어 낸 확신이었다.

일단, 원작에 따르면 첫째가 어렸을 때부터 가문의 집사는 찰스였다. 그리고 그 뒤를 로버가 이은 건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 윌리엄이 집사를 그만두기는 했을 거야.’

그리고 차분히 생각해 보니 딱 한 번, 원작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된 장면이 있었다.

네시아를 만나러 온 할아버지가 이런 말을 남긴 것이다.

-윌리엄 부부도 참 안타까워. 운만 따라 줬다면 두 사람에게도 이렇게 예쁜 아이가……. 아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람.

너무 사소했고, 단순한 대사였다.

하지만 난 거기서 단서를 잡아냈다.

‘원작에서 윌리엄이 배신을 했다면, 분명 할아버지도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 저런 말을 꺼낸다고?’

그럴 리가.

아무리 할아버지가 호탕하고 유쾌한 성격이라지만, 그도 결국 앨턴이었다.

그리고 앨턴 공작가의 핏줄은,

‘절대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지.’

그러니 저렇게 윌리엄 부부를 추억하거나 안타깝게 여겼을 리가 만무했다.

이 사실을 토대로 난 판단했다.

‘윌리엄의 배신은 원작과 달라.’

그럼 어째서 윌리엄은 앨턴 공작가를 배신했을까. 황태자는 그의 무엇을 자극시켰던 걸까.

감시자에게 처음 정보를 받은 날은 이 의문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물론, 이제는 그렇지 않지만.’

왜냐면 바로 어제, 아주 따끈따끈하고 재미있는 정보가 새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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