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킬리언이 의문을 품을 때, 퍼델은 킬리언의 앞에 놓인 찻잔을 주시했다. 옅은 주황색 찻물은 약간 줄었을 뿐, 처음 따랐을 때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걸 보며 퍼델이 물었다.
“차가 입에 맞지 않는가?”
퍼델의 물음에 생각에 잠겼던 킬리언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퍼델은 다리를 꼰 채 킬리언의 회색 눈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일전에 킬리언이 속이 좋지 않아 차를 거절했을 때, 그걸 따른 하인이 큰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황자가 차를 마시지 못하도록 일부러 쓰게 탄 것 아니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당연히 생트집이었으나, 하인은 묵묵히 퍼델의 주먹질을 감당해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반박했다가는 더 큰 벌을 받을 테니까.
그 광경을 기억했기에, 킬리언은 특유의 단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형님. 잠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찻잔에 담긴 차를 한입 마시던 킬리언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계속 이 차만 나오네요.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아아, 그래. 내가 요즘 심신의 안정을 위해 자주 찾는다.”
“이런, 업무에 너무 몰두하셨나 봅니다. 이제 저도 있으니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형님.”
“하하하! 걱정하지 마라. 쉴 때는 푹 쉬니까!”
퍼델은 그렇게 웃으면서도 킬리언이 차를 마시는 모습을 끝까지 직시했다.
킬리언 역시 그 시선을 의식하며 자연스럽게 차를 조금 더 마셨다.
‘라벤더 향…….’
불길한 향이 코에 맴돌았다.
그러나 킬리언은 내색하지 않고 웃었다.
***
아버지와 네시아가 돌아온 후, 저택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원주인이 돌아왔다는 것보다는, 갑작스럽게 생긴 어린 아가씨가 사용인들에게는 큰 혼란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난 하녀장인 에밀리에게 네시아의 방을 마련하라고 일렀다.
“몇 층으로 준비하면 될까요?”
그 물음에 난 가볍게 대답했다.
“2층을 내줘. 아직 아이라 자주 밖을 돌아다닐 것 같으니.”
“예, 벨라디 님.”
내가 네시아에게 흔쾌히 내 공간인 2층을 내준 것에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난 이제 2층을 쓰지 않으니까.’
어느 날이었던가. 주인 잃은 4층을 내가 차지하겠다고 다짐했던 날이.
그 다짐을 기어코 이룬 난 앉아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느긋하게 테라스로 다가갔다. 그러자 물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인 창문 너머로 넓게 펼쳐진 중앙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흠, 탁 트이고 좋네.’
난 팔짱을 끼며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실질적으로 이게 맞는 위치지.’
이제껏 내가 2층에 있었던 게 이상한 거야.
참고로 4층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정령석에 대한 보답으로 원하는 것이 하나 있어요.
-말하도록.
-아무래도 4층이 계속 비어 있던 것도 마음에 걸리고, 제가 임시 가주로 임명받은 지도 3년이 넘어가니. 제 생활 공간을 위로 올리고 2층은 네시아에게 넘기는 거 어떨까요?
요약하면 어머니가 쓰던 4층, 이제 나한테 넘겨라.
솔직히 어머니를 끔찍이 아끼는 아버지가 조금은 고민을 할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생각보다 더 흔쾌히 내 제안을 승낙했다.
-그래, 내가 거기까지 생각하진 못했군. 바로 짐을 옮겨라.
-감사해요, 아버지.
그렇게 말하며 난 아버지에게 평소처럼 웃어 보였다.
확실히 그날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변화에 당황했었지만, 마냥 굳어 있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아버지가 계속 저런 태도를 보일 수 있어.’
아버지가 부담스러운 건 부담스러운 거고, 그가 기분 좋거나 너그러울 때는 최대한 다양한 것들을 뜯어내야 했다.
그랬기에 난 열심히 원래의 유려한 말솜씨와 평온함을 유지하는 것을 연습했고, 그 덕택에 아버지의 어떤 반응에도 변함없는 미소를 걸칠 수 있었다.
‘바쁜 판국에 별걸 다 하네.’
내가 확실히 공작의 자리를 차지하기만 해 봐. 그따위 같잖은 가족 놀음 죄다 때려치워 버릴 테니까.
그렇게 테라스를 보며 과거를 회상하던 난 고개를 돌려 새 방을 둘러보았다.
4층은 차지하고 싶었지만, 어머니와 똑같은 인테리어는 죽어도 사용하기 싫었다. 따라서 난 인부 여럿을 불러다가 대대적으로 방을 수리했다.
‘벽지와 마법 샹들리에는 물론, 큰 가구들까지 완전히 바꿨지.’
테라스 창틀까지 다른 것으로 갈아 끼우니, 이 방에서 어머니의 흔적은 전부 사라지고 오롯이 내 것만 남게 되었다.
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슬슬 지체되었던 일들도 진행시켜 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덧 약속 시간이 지척이었다. 난 하녀들의 도움으로 옷차림새를 가다듬고 방을 나섰다.
내가 향한 곳은 별관이었다.
“오셨습니까, 벨라디 님!”
“그래.”
별관으로 가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병사 둘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사이 날 따라오던 스티아가 별관 문을 열었다. 난 그들의 인사를 가볍게 받으며 열린 문 안으로 향했다.
원래는 어머니의 온실이었던 별관. 하지만 이곳 역시 내가 전부 갈아엎었기에, 그녀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보석 창고로 바뀐 별관 안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유리 진열함과 조명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가장 감탄이 나오는 부분은 다양한 형태로 온 사방을 조화롭게 채운 마법 루비들이었다.
‘대륙을 뒤흔드는 마법 루비 광산의 주인인데, 이 정도는 꾸며 줘야지.’
어머니의 온실은 평범한 방이 아닌, 정말로 커다란 공간이었다.
아무리 제국 최고의 부자인 아글라 공작가라고 해도 이 거대한 곳을 전부 보석으로 채우라고 하면 힘들 수 있을 만큼.
그래서 처음 내 계획을 들었을 때, 에밀리가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마님과 벨라디 님의 보석을 다 합쳐도 별관이 휑할까 걱정이네요.
그런 에밀리에게 난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에밀리. 머지않아 모두들 이 별관이 탐나서 발을 구를 테니까.
애초에 내가 이 커다란 별관을 통째로 보석 창고로 만들려 했던 이유는 마법 루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휑한 부분은 전부 루비로 채울 예정이었거든.’
내가 괜히 이곳에서 보석을 보관하겠다고 나선 것이 아니다.
이 별관은 애초에 마법 루비를 홍보함과 더불어 고립된 북부가 떠오르는 샛별임을 과시하는 용도였다.
‘물론 어머니의 편애로 상처받았던 과거를 지우고 싶은 속셈도 있었지만.’
이런 여러 목적으로 계획된 이 보석 창고는 예상대로 가문 부지에 있는 드넓은 평야와 함께 우리 가문의 또 다른 자랑이 되었다.
‘이 보석 창고를 구경한 이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전부 나를 따라 하고 싶어 했으니까.’
물론 이 정도 사이즈는 아무나 도전할 수 없었다. 공작가인 나도 루비가 없었다면 시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몇몇 보석 광산의 소유자들만 나처럼 별관을 통째로 갈아엎고, 다른 이들은 가지고 있는 방을 개조하는 정도로 만족했다.
덕분에 요즘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이렇게 꾸민 자신의 보석 전시관을 자랑하는 것이 유행으로 번졌다.
‘아직 재력이 미흡한 미혼의 귀족 영애들도 하나둘씩 이 유행에 편승하고 싶어 하고.’
이 별관을 사람들에게 공개한 후, 루비에 대한 열광이 더욱 불타오른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보석 창고를 잠시 걸으며 진열함에 놓인 액세서리들을 눈여겨보는데,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스티아가 내게로 다가왔다.
“벨라디 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내 허락이 떨어지자 스티아가 고개를 숙이며 나가더니, 누군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난 진열함에서 눈을 떼 들어온 이를 환영했다.
“어서 와.”
내 인사에 상대는 무릎을 가볍게 굽히며 예를 차렸다.
“좋은 오후입니다, 벨라디 님.”
처음 만났을 때처럼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내 나이 또래의 여자.
켄뉴브 학교에서 만났던 엘린 돈티오였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바로 그녀를 부른 목적을 이야기했다.
“오늘은 새로운 일을 부탁하기 위해 널 초대했어.”
내 말에 여자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새로운…… 일이요?”
“그래.”
‘이게 좋겠군.’
난 눈여겨본 브로치 중 가장 알이 커다란 마법 루비 브로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여자에게 다가갔다.
“네 재능을 다른 이에게도 가르치면 어떨까 싶거든.”
그녀의 앞까지 다가가자 여자가 고개를 들어 날 올려다봤다. 나와 시선을 마주한 그녀는 잠시 멍하니 내 얼굴을 응시하다 곧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가, 가르친다고 함은…….”
“피아노 말이야. 들어 보니 네 연주를 마음에 들어 하던 귀부인들의 손녀에게 피아노 개인 강습을 하고 있다고 하던데.”
내 말에 엘린의 귀가 발갛게 익었다.
“전부 벨라디 님이 아글라 공작 부인의 살롱에 절 연주자로 추천해 주신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그 말에 난 후후 웃었다.
“그래, 이번에도 어려울 것 없어. 평소 가르쳤던 것처럼 하면 그만이니까.”
“벨라디 님께서 피아노를 배우시는 건가요?”
“아니, 난 아니고.”
“그럼…….”
“황태자비 전하께서 그 클럽에 자주 방문하지.”
내 말을 얌전히 듣던 엘린의 눈이 일순 동그랗게 커졌다.
“화, 황태자비 전하요? 설마…….”
엘린은 금방 내 말을 이해하고는 손사래를 쳤다.
“전 못 해요! 이제껏 제가 가르쳤던 영애들은 전부 어린아이들이었어요! 그, 그런데 어떻게 저 따위가 황족을!”
난 그렇게 겁을 먹은 엘린에게 손을 뻗으며 차분히 속삭였다.
“할 수 있어.”
그러며 그녀의 양 갈래로 땋은 머리 한쪽을 등 뒤로 넘겼다.
“내가 말했지? 넌 내가 눈여겨볼 만큼 영리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난 자연스럽게 드러난 그녀의 가슴께에 아까 골랐던 마법 루비 브로치를 달아 주었다.
“그리고 지금 너에게는 이게 제일 필요할 테고.”
브로치가 보석 창고의 조명을 받아 반짝 빛났다. 시선을 내려 그걸 확인한 엘린이 숨을 가쁘게 들이쉬었다.
너무 긴장한 것 같아, 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동생들은 무사히 마탑의 견습 마법사가 되었다며?”
“아……. 네, 은혜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그럼 당연히 그에 맞는 지원이 필요하겠네? 마탑은 켄뉴브 학교 같은 무상 교육 시설이 아니니까.”
“…….”
“심지어 두 명이니, 들어갈 돈이 배로 뛰었겠지. 켄뉴브 학교에서 받는 네 급여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냉정한 현실 지적에 엘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고개가 저절로 푹 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