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94화 (95/197)

94.

-혹시라도 저 시종장이 구슬만 받고 입을 싹 닫으면 어떻게 합니까? 아니면 황태자에게 저 정령의 보물에 대해 이야기하면요? 그는 아직까지 황태자의 사람입니다.

-그 이전에 자식을 살리고 싶어 하는 부모이지.

-에휴, 전하는 생긴 것만큼 사람이 물렁합니다.

-칭찬인가?

-욕입니다.

벨라디도 지금 상황을 보면 왜 본인의 패를 그렇게 쉽게 내주었냐며 킬리언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킬리언은 후회하지 않았다. 위선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는 아이의 목숨을 가지고는 도저히 저울질을 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킬리언 궁에 초대장이 하나 도착했다.

황태자로부터 온 초대장이었다.

-무슨 내용이 적혀 있지?

-같이 티타임을 보내자는군요.

황태자가 킬리언을 티타임에 초대하는 건 자주 있었던 일이기에 그는 그걸 가볍게 넘겼다.

그러나 초대장을 확인하던 아넌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이건 직접 확인하셔야겠는데요?

그러며 그가 넘긴 건 황태자의 초대장이 아닌, 봉투 안에 함께 담겨 있던 작은 편지지였다.

안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황태자의 초대장은 대부분 제가 작성하므로, 이렇게 소식을 첨부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아이의 병이 완치되었습니다. 숨을 쉴 때마다 평온한 아이의 표정을 보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인 줄 몰랐습니다.

이제는 제가 약속을 지킬 차례겠군요. 무전 마법이 담긴 마법 루비를 동봉하니, 언제든 이 루비를 통해 제게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황궁의 마력 감지 기록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기록을 담당하는 최고참 마법사가 제 지인이니 바로바로 기록을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미약한 제가 전하께 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구원하신 충실한 하인으로부터-」

미리 편지를 확인했던 아넌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쓰고 있던 안경을 치켜올렸다.

-이제 황태자궁의 시종장도 전하의 사람이 되었네요. 그나저나 황궁에서 오래 일한 사람은 역시 다릅니다. 황궁 마법사들은 죄다 깐깐한 괴짜던데, 그 최고참과 언제 또 친분을 다진 건지.

킬리언은 아넌의 말을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3년 전, 앨턴 공작가의 집무실에서 벨라디가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다 사라졌다.

-마법 다이아몬드의 텔레포트를 자유롭게 활용하려면 기록을 담당하는 황궁 마법사를 당신 편으로 만들어야 해요. 그러나 그는 상당히 고리타분하고 꼬장꼬장하기에 직접 회유하는 건 힘들죠.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가장 쉬운 방법은 황태자궁의 시종장을 당신의 편으로 만드는 거예요.

-황태자궁의 시종장을?

-제가 드린 자료를 보면 아시겠지만, 그 마법사와 황태자궁 시종장은 사촌지간이거든요.

사생아 출신의 황궁 마법사는 어릴 적,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가문에서 쫓겨난 과거가 있다. 오갈 곳 없던 그를 지원하고 마탑에 소개해 준 것이 바로 황태자궁의 시종장이었다.

그 이후 마법사는 마탑을 나와 황궁으로 들어갔다. 또한 시종장을 은인으로 여기며, 그에게 폐가 될까 본인의 출신을 철저히 숨기며 살았다.

때마침 마법사는 귀족 명부에 들어가 있지도 않아서 두 사람이 사촌이란 건 황실 측도 모르는 일이었다.

킬리언은 새삼 벨라디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3년 전에도 그 정보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얼마나 더 촘촘하고 넓어졌을지…….’

이 외에도 벨라디가 제공한 정보를 적재적소에 사용하며 킬리언은 몇몇 황태자의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킬리언은 그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때마다 벨라디의 조언을 되새겼다.

-황태자는 인복이 많지만, 그걸 두루두루 유지하는 인물은 아니에요. 그러니 가지고 있는 정보를 활용해 그들을 최대한 회유하는 게 이득일 거예요.

그에게 저 조언을 건너 들은 아넌은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절 알아보셨을 때부터 앨턴 소공작님의 혜안과 아량이 남다르다 느꼈습니다.

-아넌, 벨라디는 아직 공작가의 정식 후계자가 아니야.

-전하, 이렇게 미리미리 호칭부터 바꿔야 줄을 잘 탈 수 있는 겁니다. 앞으로 제 인생에서 북부의 주인은 벨라디 앨턴 님밖에 없습니다!

남들이 들으면 큰일 날 호칭이었지만, 킬리언은 그냥 놔두었다. 어련히 알아서 아넌이 입조심을 하기도 했고, 내심 저 말을 들을 때마다 본인의 어깨가 쑤욱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넌 외의 다른 사람들도 빨리 벨라디의 매력을 알아야 할 텐데.’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다.

벨라디는 자신이 숨기려 한다고 숨겨지는 사람도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를 볼 때면 때때로 약간의 심술이 나고는 했다.

이런 심술 때문일까?

‘아직까지 벨라디에게 시종장을 회유했다고 말하지 않았어.’

지난 3년 동안 그는 벨라디라는 사람을 열심히 관찰했고,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내가 시종장까지 회유했다고 말하면, 벨라디는 날 칭찬해 주겠지.’

-잘했어요, 킬리언.

그리고 자신과 만나는 횟수를 바로 줄일 것이다.

벨라디는 너무 바쁜 사람이었고, 자신과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꺼려 했으니까.

안 그래도 두 달에 한 번은 너무 적다고 느꼈는데, 만남의 횟수가 이것보다 더 줄어든다니…….

여기까지 생각하던 킬리언은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아니야. 사실 이렇게 투정 부리면 안 되지.’

벨라디의 미소를 떠올리니 킬리언의 속이 불편해졌다. 그녀와 만나는 횟수가 줄어드는 게 싫어서 입을 다문 게, 꼭 그녀의 믿음에 배신하는 행위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어젯밤 마법 다이아몬드를 사용한 자신에게 벨라디가 보여 줬던 표정을 떠올리면…….

‘역시 안 되겠어. 다음에 아이닝을 통해서 사과하자.’

그리고 이제 다이아몬드를 쓸 수 있다고 말하는 거야.

사실은 직접 얼굴을 보고 사과하고 싶지만, 그건 벨라디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그녀는 당분간 자신을 만나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어젯밤, 벨라디가 자신에게 남긴 시선을 킬리언은 잊을 수 없었다.

‘벨라디를 돕고 싶어 한달음에 달려간 게 되레 부담을 준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욱신거렸지만, 킬리언은 능숙하게 그 감정을 억눌렀다. 섣불리 자기 감정을 내비쳐 벨라디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때마침 시종장이 온실 앞에 도착했다. 그가 온실의 문을 열자, 이색적인 나무와 식물들이 즐비한 팔각형 천장의 거대한 유리 온실 내부가 보였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시종장이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온실 맨 끝에는 주황색 벽돌로 만든 계단과 단이 있었고, 그 위에 원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퍼델은 거기서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형님.”

킬리언이 그를 부르며 다가가자 퍼델이 성의 없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킬리언은 그걸 보며 퍼델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은 어쩐 일로 온실에 계십니까?”

“네 형수가 온실에 새로 식물을 심었으니 구경 좀 하라고 성화를 내서 말이야. 이참에 너도 구경이나 하라고 불렀다.”

“그럼 다 함께 구경해도 좋았을 텐데.”

“아, 방금까지 여기 있다가 외출하러 나갔어. 요즘 아글라 공작 부인의 살롱에 자주 가거든.”

“그렇군요.”

킬리언이 자리에 앉자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차를 따랐다.

쪼르르-.

물 떨어지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렸다.

그걸 지켜보던 퍼델은 하인들이 저 뒤로 물러나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킬리언. 아글라 소공작을 도와 남부 일을 해 보니, 좀 어때?”

킬리언은 공식적으로 케스퍼 아글라를 도와 남부의 무역 일을 돕고 있었다. 이는 퍼델이 직접 추진한 일이었다.

아넌은 이 행위를 일전의 독살 미수 사건으로 뚫린 자신의 감시망을 메꾸려는 속셈이라고 말했고, 킬리언도 어느 정도 이에 동의했다.

킬리언은 속마음을 감춘 채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많이 배웠습니다. 역시 형님의 최측근이라 그런지 아는 것이 많은 이더군요.”

“그래, 아글라 소공작도 네가 일을 빨리 배워 훌륭하다고 하더구나. 덕분에 그 지역 교역은 이제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는데…….”

영혼 없는 얼굴로 이렇게 말하던 퍼델이 기대고 있던 의자에서 등을 떼더니, 킬리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런 때, 마갈라 제국에서 교역을 받아 줄 새로운 지역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퍼델이 눈을 번뜩였다.

그 시선에 킬리언은 단정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지요. 마침 제가 마갈라 제국 귀족들과 친분이 있으니,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그 말에 퍼델은 만족스러운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역시 이 형을 생각해 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네가 이렇게 훌륭히 자라서 날 돕다니, 어릴 적 우리가 한 약속이 이렇게 이루어지는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킬리언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그저 평온히 미소 지었다.

“형님 말대로 마갈라 제국으로 가길 잘했습니다.”

킬리언의 순종적인 말에 퍼델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순간 속이 울렁거렸지만, 킬리언은 애써 가라앉혔다.

아넌은 퍼델이 킬리언을 감시하기 위해 그를 자신의 오른팔인 케스퍼에게 붙였다고 생각했다. 킬리언도 기본적으로는 아넌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였지만, 단지 그것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킬리언은 여기에 조금 더 살을 붙였다.

‘지금 저 작자는 최대한 날 활용하려고 하고 있어.’

자신이 퍼델의 사람들을 본인 편으로 회유하려는 것처럼, 퍼델 역시 킬리언을 손에 넣고 싶어 했다. 그랬기에 킬리언에게 다양한 업무를 맡기거나 오늘처럼 티타임을 함께하며, 나름 그와 친분을 쌓고자 하는 거겠지.

때때로 퍼델은 정말로 킬리언이 어릴 적 약속처럼 본인의 최측근이 된 듯이 행동하기도 했다.

킬리언으로서는 어이없고 우스운 일이었다.

‘결국 이럴 거면, 도대체 왜 나를 마갈라 제국으로 쫓아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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