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93화 (94/197)

93.

화려한 조각과 그림들로 장식된 황태자궁 로비. 그곳에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소리의 주인공인 킬리언은 자연스럽게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중년의 남성이 그에게 다가왔다.

황태자궁의 시종장이었다.

“킬리언 황자님, 황태자 전하는 온실에 계십니다. 이쪽으로.”

그렇게 말한 시종장이 그를 궁 안쪽으로 안내했다. 킬리언은 온실 위치를 알고 있었지만, 조용히 그를 따랐다.

곧 주위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시종장이 조용히 속삭였다.

“명하신 대로, 어젯밤 황실 마력 감지 기록에서 텔레포트의 흔적은 바로 삭제했습니다.”

그 말에 킬리언이 평온한 얼굴로 답했다.

“잘했네.”

“언제든 명령을 내려 주신다면 바로 수행하겠습니다.”

시종장의 공손한 목소리에 킬리언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시종장 역시 딱히 대답을 원한 건 아닌지라, 입을 다물고 킬리언을 마저 안내했다.

킬리언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저자도 이제 온전한 내 사람이 되었구나.’

저 시종장은 대표적인 황태자의 최측근이었고, 충성도가 매우 높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킬리언은 최근, 그를 무사히 자신의 편으로 회유할 수 있었다. 전부 벨라디가 추가 정보들을 공유해 준 덕분이었다.

-시종장의 늦둥이 딸이 오래도록 지병을 앓고 있는 건 알고 있죠? 그게 돌아가신 황후 전하와 같은 병이라는 것도요.

알고 있었다.

3년 전, 벨라디가 제공해 준 정보에 적혀 있었으니까.

-그 딸이 지속적으로 먹고 있는 약의 정체를 드디어 알아냈어요.

그렇게 말한 벨라디는 유리병 하나를 내밀었다. 안에는 흰색 알약이 두 알 정도 들어 있었다.

-이건…….

-황태자가 독자적으로 만든 약이에요. 조사해 보니, 남부의 전염병 치료제를 변형한 것 같아요.

벨라디의 말에 따르면, 황태자는 몇 년 동안 극비로 인체 실험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의 실험 대상은 전부 황후와 같은 호흡기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황태자는 제국을 샅샅이 뒤져, 황후 전하와 비슷한 증세를 앓고 있는 이들에게 접근했어요.

그리고 정체를 숨긴 채 그들에게 병의 치료약을 주겠다며 병자와 가족들을 유혹했다.

당장 병세가 심각하지 않은 이들은 그 수상한 제안을 거절했지만, 일부 병자들 및 그 가족들은 다급히 황태자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이 질환은 죽을 정도로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숨을 쉴 때마다 찌르는 듯한 통증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황태자측이 그들의 절박함을 이용한 거죠.

시종장도 그 절박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 당시 시종장은 아직 황태자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원래 황제 궁의 부시종장으로 일했으나, 늦둥이 딸이 아픈 후로는 은퇴를 하고 시골로 내려간 상태였다.

그리고 황태자는 몸소 시종장이 있는 곳으로 행차해, 딸을 책임지고 치료해 줄 테니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고 회유했다.

-본인 밑에 두면 딸의 경과를 살피기 쉬울 테니 그랬을 거예요. 마침 그 아비는 폐하의 부시종장을 할 만큼 유능하기도 했고.

그는 황태자를 믿었고, 어린 딸을 위해 다시 황궁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황태자가 주는 약을 그대로 자신의 딸에게 투여했다.

그것이 일종의 실험이라는 것은 전혀 모른 채.

-그래도 나름, 황태자 측이 여러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변형한 약이라 어느 정도 차도가 있었다고 해요.

그러나 안정성이 검증되지 않은 약에 부작용이 없을 리 없었다. 시종장의 딸은 다시금 고통을 호소했고, 처음보다 더 크게 앓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진 시종장은 이게 부작용이라고 판단하지 못했다. 그는 황태자에게 약을 더 달라고 애원했고, 황태자는 여러 핑계를 대며 시종장에게 건네던 약의 개수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약의 개수를 조절하면 시종장을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고, 딸이 급사하는 걸 막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의지할 곳이 없는 시종장은 울며 겨자 먹기로 황태자의 명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까지 들은 킬리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어머니께서…… 본인의 병을 본격적으로 고치려 했다면, 치료약이 이미 개발되었을까요? 그럼 형님도 막을 수 있었겠죠?

-……글쎄요. 하지만 킬리언, 당신도 알잖아요. 돌아가신 황후 전하께서는 스스로에게도 무척 무심한 사람이었다는 걸.

벨라디의 말이 맞았다.

황후는 심각한 일 중독자였다. 그렇기에 몸이 아프더라도 자기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진통제로 통증을 견디며 다른 외부의 일에 집중하는 날이 많았다.

벨라디에게 이 정보를 공유받은 후, 킬리언은 황궁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몇 번이나 착잡함을 느껴야 했는지 모른다.

‘그 병으로 도대체 몇 사람을 농락하려는 거지…….’

남부의 전염병 치료제를 발견한 건 퍼델 앨러만 데커딜이 황태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첫 업적이었다. 그와 동시에 황후를 죽게 만든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그 당시 아무리 사인을 치료제의 부작용이라고 덮어도, 사람들은 평소 황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황태자를 의심했다.

황태자 역시 이런 세간의 시선을 예상했는지 황후의 죽음 이후 무려 3년 동안 모든 자리에서 상복만 입는 쇼를 펼쳤고.

덕분에 그를 향한 의심의 시선은 완전히 사라진 채, 오히려 일말의 동정표까지 받게 되었다.

‘이렇게 사건이 묻히는 게 더 유리할 텐데…….’

왜 그는 굳이 이 병을 파고드는 걸까? 그것도 몇 년이나.

벨라디는 그날, 킬리언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내가 조사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황태자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는 킬리언 당신에게 맡겨야 할 것 같아요.

저 말을 해석하면, 황태자 본인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 속셈을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캐려면 황태자에게 직접 물어야 했고, 그 일의 적임자는 동복형제인 킬리언 본인밖에 없었다.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래도 성공해야만 해.’

퍼델 앨러만 데커딜이 꾸밀 일을 막고, 벨라디의 기대에 충족하기 위해서라도.

그러기 위해서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황태자의 시종장과 접선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황태자의 감시망은 일전의 독살 미수 사건 이후로 많이 느슨해졌기에, 단순한 접선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킬리언은 황태자궁의 시종장을 만나 이렇게 제안했다.

-내가 그대의 딸을 완전히 치료해 주겠네. 그러니 날 도와주게.

시종장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인체 실험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본인이 황태자의 함정에 빠졌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 때문에 속에서 천불이 날 것 같은데, 킬리언에게 같은 제안을 들었으니.

시종장은 당연히 크게 분노했고, 킬리언은 일관된 반응으로 시종장을 달랬다.

-난 형님과 달라. 그대의 눈앞에서 바로 딸이 완치되는 약을 주겠네.

불안에 빠진 사람은 확신에 약했다. 킬리언은 이를 몸소 체험했기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벨라디가 그렇게 날 끌어 올려 주었으니까.’

부드러우면서도 당당한 킬리언의 언행과 태도에 코너에 몰려 있던 시종장은 결국, 마음을 열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이걸 주도록 하지.

킬리언이 꺼낸 건 불꽃 같은 오묘한 색채의 작은 구슬이었다.

그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마갈라 제국에서 가지고 온 정령의 보물이야. 이걸 먹으면 정령의 치유 마법이 어떤 병이든 전부 불태워 버리지.

물론, 이 말에는 약간의 거짓말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 구슬이 정령의 보물이고, 모든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건 맞았다. 다만 이건 킬리언이 마갈라 제국에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그 전날, 아이닝이 막 만들어 준 것이니까.’

정령에게는 두 개의 힘이 있다.

하나는 계약한 정령사와 공유할 수 있는 ‘정령 고유의 힘’. 아이닝의 매혹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정령들만 사용할 수 있는 ‘정령의 마법’. 정령들은 기본적으로 한 가지 마법을 선택해 심도 있게 수련했고, 아이닝이 선택한 마법은 ‘치유’였다.

‘알고는 있었어.’

다만 그동안은 아이닝을 숨겨야 한다는 생각에만 몰두해 그 마법을 써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딱히 킬리언 주위에 아픈 이가 없던 것도 이 판단에 일조를 했다.

그러나 마갈라 제국으로 돌아간 아카데미 동기의 편지로 킬리언은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정령사 킬리언, 말해 주려다가 까먹어서 이렇게 편지로 적는다.

넌 정령과의 계약 수식과 정령들이 좋아하는 장소 조사만큼은 전문가지만, 막상 정령의 능력은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이닝을 들키기 두렵다고 정령의 마법을 썩혀 두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야.

세상에는 이미 정령의 정체를 보이지 않고도 꺼낼 수 있는 수단이 있잖아. 바로, 정령의 보물 말이야!」

정령의 보물!

정령이 자신의 마법을 담아 만든 사물을 사람들은 흔히 ‘정령의 보물’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정령의 보물은 정령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미지의 영역이었다. 킬리언이 말을 꾸며도 이걸 알아챌 사람은 몇 없다는 소리였다.

이걸 깨달은 즉시 킬리언은 아이닝을 소환해 정령의 보물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아이닝은 너무나 당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그거 만들 수 있어! 킬리언 필요해? 아이닝이 만들어 줄까?!

아이닝은 그 자리에서 간단하게 정령의 보물을 만들어 냈다.

그게 바로 킬리언이 꺼낸 구슬이었다.

-정령의 마법은 인간이 쓸 수 있는 마법보다 훨씬 고차원으로 이루어졌지. 그대가 원한다면 이걸 주겠네. 한번 사용해 보게.

킬리언의 말에 시종장은 한참 그걸 바라보다 털썩 무릎을 꿇었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제 딸을 살려 주십시오. 이제 겨우 14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고통받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입니다.

-……받게.

그 말에 킬리언은 두말하지 않고 아이닝의 구슬을 시종장에게 건넸다. 그리고 시종장이 딸에게 갈 수 있도록 곧바로 그를 보냈다.

옆에서 모든 걸 지켜보던 아넌은 혀를 차며 킬리언을 타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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