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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92화 (93/197)

92.

‘애초에 우리는 서로 협력 관계니까, 더 철저하게 도움과 보답을 나눠야 할 거 아니야.’

돕고, 갚고, 다시 도움을 베풀고 다시 갚고. 그러다 중간에 챙길 이익이 있다면 당연히 챙기고. 그렇게 관계를 다져 나가야 하는 마당에 무슨 사양을 하는 건지.

게다가 타인 이야기는 갑자기 왜 나와?

‘그게 뭐 중요하다고.’

잠시 속으로 혀를 차는 사이, 문이 벌컥 열렸다. 고개를 돌리니 아버지와 멜도르가 침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입을 열었다.

“이 정도 시간을 줬으면 많이 준 듯싶은데.”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오던 아버지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곤히 잠든 네시아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버지를 따라 들어온 멜도르도 네시아를 보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얘 멀쩡해졌네? 이거 누나가 한 거야?”

“맞아.”

“어떻게 한 거지?”

아버지 역시 의문을 품으며 물었다.

난 느긋하게 아까 내 방에서 나올 때 챙긴 걸 꺼냈다.

“이걸 이용했어요.”

내가 꺼낸 건, 다름 아닌 정령검에 장식되어 있던 정령석이었다.

정령석을 본 아버지와 멜도르는 순간 똑같은 표정을 짓더니 순차적으로 물었다.

“정령석?”

“그걸로 어떻게?”

누가 핏줄 아니랄까 봐, 묻는 표정이 똑같네.

참고로 이 정령석은 킬리언의 정체를 지켜 줄 핑계에 불과했다.

‘지금 와서 그가 정령사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따라서 난 그의 공을 내가 한 것이라 둘러댈 생각인데…….

핑계를 대기 위함이라지만, 애초에 이런 속셈을 가지고 있던지라 더욱 그에게 빚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킬리언에게 보답을 하고 다 털어 내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난 가지런히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킬리언 황자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다는 건 아버지도 아실 거예요.”

내 말에 아버지의 주먹이 살짝 꿈틀거렸다. 하지만 너무나 짧은 순간이었기에, 난 눈을 가늘게 뜰 수밖에 없었다.

‘흠?’

내가 맞게 본 건가?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보니, 그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날 주시하고 있었다.

“마저 말해라.”

그 대답에 일단 설명을 이었다.

“들어 보니 황자께서 유학 중 정령에 대해 다양한 책을 읽으셨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정령석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답니다.”

“그 자식을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거야?”

아버지의 뒤에 있던 멜도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래.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 사실일 리가 없지. 우리 누나가 어떤 사람인데 고작 킬리언 황자 같은 놈이랑.”

조용히 중얼거린 듯싶지만, 멜도르의 목청이 워낙 좋아 혼잣말이 전부 들렸다. 난 그걸 부러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그때 아버지의 주먹이 다시 한번 꿈틀거렸다. 이번에는 틀림없었지만, 그 외의 별다른 반응은 없었기에 나도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정령석으로 네시아를 진정시킬 수 있다고 하던가?”

“맞아요, 아버지. 정령석을 이용하면 폭주한 정령의 힘을 잠재울 수 있다고 한 게 기억났어요. 아이의 상태를 정확히는 모르지만 시도할 가치는 있다고 판단했고요.”

여기까지 말한 난 보석 형태로 커팅된 정령석을 바라봤다.

방금 내가 한 말의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일단 킬리언이 정령에 박학다식하다는 것과, 정령석에 대해 물어본 건 사실이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령석은 원하는 정령을 어디서든 소환할 수 있다는 것 외의 다른 효과는 없었다. 물론 그건 마갈라 제국에서도 소수의 학자들만 알고 있는 정보였다.

‘그걸 아버지와 멜도르가 알 턱이 있나.’

나중에 아버지가 이 거짓을 알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때는 이미 킬리언이 정령사임을 공개한 후가 될 테니까. 이게 그렇게 큰 거짓말도 아니었고 말이다.

난 태평한 얼굴로 말을 꾸몄다.

“다행히 정령석과 정령검은 별개라 하더군요. 그러니 가보에는 별 이상이 없을 거예요.”

“그럼 그 정령석은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되나?”

그 말에 난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요.”

‘다시 못 쓰기는 무슨.’

애초에 사용하질 않았으니 당연히 쓸 수 있지.

하지만 어차피 정령석은 없어질 예정이었다. 이걸 이용해 정령을 소환하면 돌은 저절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일회용이라는 거지.’

그러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일을 핑계 삼아 미리 정령석을 떼어 놓고 다니면 더 나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야 나중에 정령석을 쓰더라도 휑한 정령검을 두고 괜한 소문이 돌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 빈 자리에 마법 보석을 박아서 효율성을 더 올려야지.’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하며, 난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었다.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러지 않을까요?”

내 말에 멜도르는 자신이 더 아까운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우리 누나 정령석인데, 고작 저렇게 쓰였다니.”

그 투덜거림에 아버지는 멜도르에게 눈빛으로 주의를 주고는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수고했다.”

“아니에요, 아버지.”

난 그렇게 말하며 살짝 몸을 틀어 침대에 잠든 네시아를 바라봤다.

“이 아이가 저희 가문에 입양되는 거면 제 동생이 되는 거잖아요. 당연히 제가 도와야죠.”

딱히 ‘앨턴’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아이가 아픈 게 싫어 살린 거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난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유지했다.

내 말에 아버지는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멜도르는 뒤에서 조금 불퉁한 표정을 지었고 말이다.

‘네시아가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네?’

원작에서도 그랬다. 멜도르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네시아를 찝찝해했지만, 후에는 극성일 정도로 아이를 예뻐했다.

‘그래, 내 몫까지 많이 예뻐해 주렴.’

하여튼 지금 내 말에 의혹을 품은 이는 아무도 없었고, 핑계는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갔다.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알려진 것 없이 소문만 무성한 정령석이니까.’

자연 친화력이든 정령의 힘이든 아버지와 멜도르가 딱히 확인할 방도도 없고. 그러니 그럴듯한 내 말에 둘 다 생각 없이 넘어오는 거겠지.

‘나중에 킬리언을 만나면 따로 말을 맞춰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버지가 입을 여셨다.

“기특하구나. 도움을 받았으니, 보답을 해야겠지.”

그 말에 난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첫 만남보다는 조금 풀어진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원하는 것이 뭐지?”

“…….”

그 말에 난 잠시 입을 다물었다.

순간 킬리언이 생각났다.

-전 보답을 원하고 당신을 도운 게 아니에요.

그는 보답을 원하고 날 도운 게 아니라고 했지만, 역시 도움을 주었으면 보답을 받는 게 당연했다.

‘지금의 나처럼.’

다른 이가 준다는데 그걸 왜 거절하는 걸까?

머릿속에 잠시 떠오른 킬리언의 얼굴을 치우며 난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기뻐요, 아버지. 충분히 생각하고 말씀드릴게요.”

내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멜도르도 본인이 다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이렇게 마무리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아버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런데…… 왜 날 내보낸 거지?”

그 말에 난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와 난 꽤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네.’

모스틴과 시온, 킬리언.

지난 3년 동안 이 세 사람을 제외하면 구두를 신은 나보다 큰 이가 없었다. 그러다 아버지를 보니, 새삼 내 키가 다 누구를 닮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시선이 위로 향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버지의 입이 다시 열렸다.

“정령석을 이용해 네시아를 진정시킬 거면, 굳이 날 내보낼 필요가 없었다.”

그 말에 난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그런데 굳이 네 동생까지 이용하면서 날 아래로 보낸 이유가 뭐냐.”

왜 그랬겠어요. 아버지 침실에 외간 남자 부르려고 보냈지.

난 그 말을 삼키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정령석을 이용하는 건 저로서도 처음 행하는 일이었어요. 사실 그 효과도 킬리언 황자가 했던 말을 토대로 추측한 것에 불과하고요.”

아버지는 가만히 내 말을 듣기만 했다. 난 진작 생각해 놓은 변명을 차분히 이어 갔다.

“그러니 혹시 모를 부작용이 있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걸로 인해 아버지가 다치시면 안 되니 미리 피해 계시라고,”

거기까지 말한 난 순간 숨을 훅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나답지 않게 눈이 저절로 크게 떠졌다.

“벨라디.”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저 입에서 저런 목소리가 나올 수 있었나? 난 그가 부드럽게 날 부르는 걸 생전 처음 들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라.”

그 말을 듣는 동안 머리 위로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 온기는 내 머리를 어색하게, 혹은 안쓰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내가 다칠 걸 네가 걱정하지 마. 그건 네 몫이 아니니까.”

너무나도 낯선 온기가 내 머리를 몇 번 쓰다듬더니 떨어졌다.

그제야 난 시선을 굴려 그 온기의 정체를 확인했다. 내 머리에서 떨어지고 있는 건, 아무리 봐도 아버지의 손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 저택을 책임지느라 고생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평소의 표정을 지었다.

그 무뚝뚝한 얼굴을 보고 나서야 난 멈추었던 숨을 다시 쉴 수 있었다.

“……별말씀을요, 아버지.”

그렇게 말하는 동안 놀란 가슴을 추스른 후, 가지런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 집의 ‘첫째’로서, 아버지가 없는 저택은 제가 관리해야죠.”

내 말에 아버지가 웃으셨다.

그가 나를 보며 웃는 것 역시 매우 낯선 일이었다.

“많이 컸구나.”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말에는 대견함이 묻어 있었다.

그 순간, 속으로 비웃음이 삐죽 흘러나왔다.

‘많이 크기는 했죠. 나 혼자서.’

난 티 나지 않게 미간을 찡그렸다.

‘이 작자가 왜 안 하던 행동을 할까?’

북부에서 네시아를 키우며 죄책감을 느끼고, 그로 인해 내게 유해진 것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다가와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거리는 그대로 유지한 채 이익은 이익대로 챙기는 것이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관계였다.

“멜도르 너도 고생 많았다.”

이런 내 속을 모를 아버지는 뒤에 있던 멜도르의 머리도 쓰다듬었다.

멜도르는 아버지의 다정한 손길에 씰룩씰룩 입꼬리를 올렸다.

“아버지가 돌아오셔서 기뻐요.”

대놓고 좋아하는 티를 내지는 않지만, 놈은 저렇게 말하며 아버지를 반겼다. 두 부자는 그렇게 뒤늦게나마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회포를 풀었다.

나 역시 거기에 동조해야 했고, 아버지를 환영한다고 말해야 했다.

‘그래야 하는데…….’

난 그저 의미 없는 미소를 짓는 것에 집중했다. 이 찰나의 시간이 내게는 너무 불편했고,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고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웃는 것도 지치네.’

그냥 빨리 내 방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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