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셰넌도 아이닝과 비슷한 증상을 보였거든.’
그때 킬리언이 침대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멀끔했던 그의 이마에는 어느새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끝났어요, 벨라디. 이제 괜찮을 겁니다.”
그 말에 네시아를 살피니 아이는 완전히 혈색이 돌아와 색색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난 다시 킬리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그에게 느꼈던 묘한 감정을 완벽히 갈무리한 채,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정말 고마워요, 킬리언. 당신 덕분에 한시름 놓았어요.”
“별말씀을요, 벨라디.”
킬리언은 그렇게 말하며 속삭이듯 말했다.
“오히려 당신이 필요할 때 절 떠올려 줘서 기뻤는걸요.”
그 말에 난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다정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잠든 척하던 아이닝이 꺄하항 웃으며 내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벨라디이-.”
본인이 기분 좋으면 바로바로 행동하는 아이닝과 대조되게 킬리언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날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따스한 온기만이 가득했다.
난 그걸 보며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원작의 셰넌과 지금의 아이닝이 보여 주는 정령의 특징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정령은 계약자와 친근한 사이일수록 동조율이 올라가.’
눈의 정령 셰넌은 매우 차분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맛있는 디저트를 먹으면 해맑게 웃기도 했고, 때때로는 네시아와 함께 사고를 칠 때도 있었다. 이건 전부 네시아와 셰넌의 동조율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다.
‘네시아의 감정과 취향을 고스란히 셰넌이 배운 거야.’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킬리언과 아이닝 역시.
‘서로의 친근감이 상당하고 말이야.’
그럼 분명 동조율도 높겠지?
위의 상황으로 유추했을 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킬리언은 본인이 보여 주는 것보다 더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어.’
물론 그가 날 인간적으로 믿고,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다. 애초에 내가 킬리언의 호의를 사도록 행동했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닝이 이렇게나 나를 따른다는 건,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그가 내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그게 계속 내 마음에 걸렸다.
‘설마 그 마음이…… 연애 감정으로 번지지는 않겠지?’
킬리언과 난 대업을 약속한 동맹 관계다. 그러니 우리는 협력과 신뢰, 그리고 적절한 비즈니스가 조화되어야 하는 사이였다.
그런데 여기서 연애가 끼어든다고?
너무나 맞지 않는 조합에 자동으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생각하기도 싫군.’
내가 인상을 쓰자 품에 안긴 아이닝이 날 올려다봤다.
“벨라디, 화났어? 아이닝이 아까 대답 안 해서 그래?”
아이닝이 조심스럽게 본인의 앞발로 내 뺨을 툭 건드렸다. 그 걱정스러운 몸짓에 난 다시 표정을 풀고 아이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따로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
내 말에 아이닝이 다시 꺄하항 웃었다.
난 해맑은 아이닝을 보며 얕게 한숨을 쉬었다.
‘뭐,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니까.’
굳이 호감이냐 비호감이냐로 사람을 나누자면, 나도 그에게 호감이 있었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그리고 파트너 대 파트너로서.
‘지난 3년간 킬리언과 착실히 신뢰를 쌓아 갔으니까.’
난 이 관계가 매우 만족스러웠고, 다른 방향으로 변화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건 킬리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 마찬가지여야만 해.’
그렇게 생각하면서 습관적으로 그를 관찰하려던 찰나, 킬리언이 아이닝을 불렀다.
“아이닝, 그만 어리광 부리고 이리로 와.”
그러자 품에 안겨 있던 아이닝이 홀연히 내게서 벗어나 킬리언에게 안겼다.
“킬리언~! 수고 많았어!”
아이닝은 주인에게 돌아간 강아지처럼 꼬리를 마구 흔들며 그의 품에 몸을 비볐다.
그걸 보며 난 피식 웃었다.
‘맞아, 애초에 아이닝은 애교가 너무 많은 정령이지.’
아이닝이 너무 격하게 날 좋아했고 킬리언이 망설임 없이 내게 달려왔기에 잠시 의심했지만, 그럴 필요 없었다.
애당초 아이닝만으로 킬리언의 감정을 판단하는 건 무리였다. 동조율이 높다고 해도 셰넌과 네시아는 그 이상으로 다른 점이 많았고, 저 둘도 분명 그럴 테니까.
그리고 킬리언이 보여 주었던 날 향한 걱정 역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동료로서 충분히 상대를 염려할 수 있어.’
모스틴의 호들갑이 나한테 옮았나? 정말 쓸데없는 고민을 했네.
속으로 혀를 차는데, 킬리언이 내게 물었다.
“저 아이는 누구인가요?”
그 물음에 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희 가문에 입양될 아이예요.”
“입양이요?”
그 말에 난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자세한 건 다음에 설명해 드릴게요.”
“흠, 알겠어요.”
그렇게 말한 킬리언이 네시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자연 친화력이 저렇게 폭주할 정도로 넘친다는 건……. 어쩌면 저 아이도 정령과 계약할지 모르겠어요.”
그 말에 아이닝이 귀를 쫑긋거렸다.
“맞아!”
아이닝은 천진난만하게 대답하더니 아차 하는 얼굴로 힐끔 날 바라봤다. 그 눈빛에 난 빙그레 웃으며 입가에 검지를 대었다.
신호를 본 아이닝은 조용히 작은 솜방망이로 본인이 입을 가렸다. 다행히 킬리언은 방금 아이닝이 한 말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걸 확인한 후, 킬리언에게 말했다.
“보답을 드릴 차례군요.”
“보답이요?”
“절 도와주셨으니 당연히 보답을 받으셔야죠.”
내 말에 단정한 킬리언의 표정이 살짝 어긋났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날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러지 마세요.”
“어째서요?”
그 말에 난 의문을 품으며 킬리언을 응시했다.
득과 실을 따지지 않는다고 했지만, 도움을 준 이에게 보답을 주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러지 않으면 남에게 빚지는 기분이라 참을 수 없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래.’
그래서 난 절친인 모스틴과 시온에게도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보답했다.
반대로 그 둘도 마찬가지였고.
‘애초에 서로 피해가 갈 만한 부탁은 하지도 않지만.’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그동안 킬리언은 황태자에게 갖은 핑계를 대며 황후의 마법 다이아몬드를 모르쇠 해 왔다. 황태자도 무언가 찔리는 것이 있는 건지 킬리언을 심하게 압박하지 않았고 말이다.
그러나 킬리언은 오늘 다이아몬드를 사용했고, 마력 감지 시스템에는 텔레포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았을 것이다.
물론 그 기록을 담당하는 마법사를 회유하려 여러 포석을 깔고 있기는 했지만.
‘완전히 킬리언의 편으로 만들지는 않았어.’
그러니 기록은 황태자의 손에 넘어갈 테고, 그의 문책을 피할 수 없겠지.
이 모든 게 내 개인적인 부탁 때문이었다. 덕분에 난 더 심한 부채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킬리언, 당신은 손해를 감수하며 날 도와줬어요. 그러니 오늘 일을 꼭 갚고 싶어요.”
“당신도 계속 절 도와주셨잖아요.”
“그리고 꼬박꼬박 그에 대한 보답을 받아 냈죠.”
내 말에 킬리언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벨라디, 전 보답을 원하고 당신을 도운 게 아니에요. 정말 순수하게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그러니 더더욱 내게 그걸 갚도록 해 줘야죠. 난 타인의 도움을 그냥 넘어갈 만큼 염치없는 이가 아니에요.”
“당신이 염치없다는 게 아니라…….”
킬리언은 잠시 할 말을 고르는 듯 말이 없었다.
그때, 5층으로 누가 올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난 킬리언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누군가가 오고 있으니 일단 돌아가요. 자세한 이야기는 추후에 만나서 하도록 하죠.”
“……알겠어요.”
킬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확인한 후, 네시아 쪽으로 다가가려는데 킬리언의 목소리가 날 붙잡았다.
“제가 타인이 아니라면…… 호의를 그대로 받아 줄 수 있나요?”
그 말에 난 침대에 걸터앉으며 킬리언을 바라봤다.
“내게 사람은 딱 두 가지로 나뉘죠.”
킬리언도 내 목소리에 집중했다.
난 네시아가 아직도 자고 있나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나 그리고 타인. 그러니 킬리언, 당신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내게 타인 이상은 될 수 없어요.”
내 말에 킬리언이 읽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품에 안긴 아이닝이 눈물을 그렁그렁 달며 날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아이닝만으로 킬리언의 감정을 판단하지 않기로 했지만, 저건 너무 눈에 띄었다.
‘킬리언의 기분이 울적해졌나 보네.’
그걸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동료 혹은 친구라고 생각하는 이에게 타인 이상은 될 수 없다고 들으면…….
‘아무래도 속상하겠지.’
하지만 난 이제 그 누구에게도 타인 이상의 타이틀을 쥐여 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되는 순간 관계에서 내가 약자가 되는 것이 싫었고, 그에 상응하여 다가올 스트레스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스틴과 시온도 내 절친이면서 동시에 타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킬리언과 아이닝을 저렇게 보내면 안 되겠지.’
괜히 내가 울린 것 같잖아.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난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그 타인들 중에서 나뉘게 되죠. 내게 소중하냐, 그렇지 않느냐.”
그러자 그 자리에 아직 서 있던 킬리언이 날 바라봤다.
난 그를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그리고 킬리언, 당신은 내게 소중한 편이에요.”
이 말에 킬리언이 미소 지었다.
딱히 감정이 느껴지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킬리언의 포커페이스가 무색하게도 아이닝이 너무나 활짝 웃으며 내게 달려오려고 했으니까.
“벨라디이-!”
“안 돼, 아이닝.”
킬리언은 품에서 뛰쳐나오려는 아이닝을 꼭 안고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음에 만날 때까지…… 적절한 보답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알겠어요. 오늘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내 인사에 킬리언은 미소를 유지하며 사라졌다.
난 그가 사라진 자리를 잠시 바라보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보답 없는 호의라…….’
내게는 영 낯선 단어였다.
일단 감히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은 몇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수족으로서 지시에 따른 것이고.’
그나마 있다면 시온과 모스틴?
사실 그 둘과도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일이 많지 않았지만.
일단 셋 다 물질적으로 너무 풍족하게 자랐고, 도와주기보다는 같이 일을 꾸미기 위해 역할을 나눈다는 개념이 뚜렷했던 탓이었다.
‘내가 보답을 해 주겠다고 나선 것도 꽤 최근의 일이었지.’
사업을 벌이려고 말이야.
그리고 그 둘도 내가 준다는 보답을 거절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왜 킬리언은 굳이 굳이 그걸 받지 않겠다고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