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90화 (91/197)

90.

[전 괜찮아요. 그런데 오늘 서부 연합의 연말 연회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제 돌아온 거예요?]

난 숙였던 고개를 들어 킬리언과 시선을 마주했다. 드문 내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뜬 그의 얼굴을 보자, 어쩐지 말이 목구멍에서 먹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아니야, 그래도 이대로 있다가는 네시아가 정말 위험할 수도 있어.’

난 마음을 다잡고 그를 향해 말했다.

“킬리언,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제 도움이요?]

“텔레포트 위치값을 알려 줄 테니, 지금 그곳으로 와 줄 수 있나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난 습관적으로 킬리언이 도와주지 않을 때를 대비해 차선책을 떠올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어. 정령검에 있는 정령석을 사용해서.’

이런 내 생각의 흐름을 끊고, 킬리언이 흔쾌히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떨어진 승낙에 난 잠시 하고 있던 모든 생각을 중단했다. 그리고 똑바로 킬리언을 응시했다.

킬리언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벨라디, 지금 바로 위치값을 알려 줘요.]

그 말에 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예상과 똑같은 답을 하네.’

아까 전 킬리언과 눈을 마주한 순간, 난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내가 무슨 부탁을 하든 전부 승낙할 생각이란 것을.

‘포커페이스도 능한 주제에 그렇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하냔 말이야.’

그래서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던 건데.

부탁하는 입장이면서, 마음이 무거워진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법 다이아몬드로 텔레포트를 사용하면, 황궁의 마력 감지 마법에 기록이 남을 거예요. 영상구처럼 얼버무릴 수 없을 수준으로요.”

[그러겠죠.]

“그럼 당신이 그 다이아를 가지고 있는 걸 황태자가 알게 되고, 문책을 피할 수 없겠죠.”

[그것도 맞아요.]

“그런데도 흔쾌히 올 수 있나요? 거절해도 괜찮아요, 킬리언.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한다는 것 알고 있고, 마음에 담아 두지도 않을 테니까.”

[제가 그러고 싶어요, 벨라디.]

킬리언은 황태자의 문책 따위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제가 벨라디 당신을 돕고 싶어요.]

그 희미한 미소에 난 점점 무거워지는 마음의 추를 부여잡았다.

“알겠어요.”

침착하게 대답한 후, 킬리언에게 아버지의 침실 위치값을 알려 줬다.

그 후 영상구가 꺼졌고, 난 챙길 걸 챙긴 다음 즉시 위로 향했다. 멜도르가 내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는지 5층은 고요했고, 아버지의 침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용케 아버지까지 내보낸 모양이군.’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침실 한구석 허공이 일렁였다. 그리더니 곧 킬리언이 모습을 드러냈다.

본인 방에 있었는지 간단한 실내복을 입은 킬리언이 날 보며 웃었다.

“제가 늦은 건 아니죠?”

난 그런 킬리언을 잠시 바라봤다.

온다고는 했지만, 막상 그를 실제로 보니 머리 한구석이 살짝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나타났네.’

내가 뭘 부탁할 줄 알고 온 거야? 그것도 본인에게 닥칠 큰 곤란을 감수하면서.

내 시선에 킬리언이 웃었다.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죠?”

그 말에 난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상황을 직시했다. 어쨌든 난 그의 도움이 필요했고, 킬리언은 거기에 응했다.

주어진 시간도 많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건 빠르게 처리해야 했다.

“이리로.”

난 그를 침대로 안내했다. 침대 위에는 사색이 된 네시아가 몸을 바들바들 떨며 누워 있었다.

아이를 본 킬리언은 금방 상황을 파악한 듯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자연 친화력이 폭주했군요.”

그 말과 함께 킬리언의 발밑으로 마름모 모형의 진이 새겨졌다.

소환진은 빠르게 완성되었고, 곧 아이닝이 등장했다.

“야호-!”

“아이닝.”

아이닝이 폴짝 뛰며 킬리언의 어깨에 올라갔다.

“안녕, 킬리언! 여긴 어디야? 처음 보는 곳이네!”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아이닝이 네시아를 바라봤다.

그 즉시 아이닝은 후다닥 어깨에서 내려가 아이에게로 향했다.

“앗! 킬리언! 아픈 애야!”

“맞아, 자연 친화력이 폭주한 것 같아. 이걸 진정시켜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지?”

“응-!”

아이닝의 대답을 들은 킬리언이 네시아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은 후 눈을 감았다.

아이닝은 그런 킬리언과 네시아 곁을 서성이며 주위를 폴짝였다. 아이닝이 다리를 내딛는 곳마다 불꽃이 타오르는 선이 생기며 킬리언과 아이를 휘감았다.

그 선들이 몇 겹으로 겹치는 걸 확인한 아이닝은 분주히 뛰어다니는 걸 멈춘 후, 내게로 와 폴짝 안겼다.

“벨라디! 아이닝 안 보고 싶었어?”

난 능숙하게 사막여우를 안으며 물었다.

“보고 싶었지. 그런데 이렇게 나한테 와도 되는 거니?”

“폭주가 좀 심화되긴 했는데에-, 내가 길을 텄으니 킬리언 혼자 잠재울 수 있어! 만약 더 크게 날뛰었다면 아이닝이 도와줘도 힘들었겠지만!”

아이닝은 그렇게 조잘거리며 내 품에 자리를 잡았다.

정령의 말이 맞는지 네시아의 입술은 빠르게 색을 되찾았다.

난 그걸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작이 이렇게 꼬일 수도 있군.’

네시아가 만졌다는 어머니의 반지. 그게 뭔지 대강 감이 왔다.

‘나도 어릴 적, 어머니의 보석함을 구경하며 몇 번 껴 봤으니까.’

사실 그 반지는 원작에서 네시아에게 큰 힘이 되어 주는 아이템이다.

원래 네시아는 수도에서 충분히 성장한 후 북부로 향했고, 셰넌과 계약하며 저 반지를 손에 넣었다. 반지에는 성장의 마법이 담겨 있어 네시아는 더 강한 정령사가 될 수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계약도 맺지 않은 채 만져서 자연 친화력이 폭주한 건가.’

물론 반지의 주인이었던 어머니도 셰넌과 계약을 맺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원래 강력한 마법사였으니, 반지를 만져도 친화력이 폭주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를 포함한 다른 이들은 애초에 정령을 느끼지도 못했고.’

그래도 네시아가 아픈 원인이 내가 추측 가능한 범위였고, 그 해결 방안 역시 금방 찾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킬리언은 네시아에게 집중하느라 우리 이야기는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걸 잠시 바라보는데, 아이닝이 입을 열었다.

“쟤한테 셰넌의 기운이 느껴져.”

그 말에 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오호라, 그러고 보니 마침 딱 좋은 타이밍이네.’

이런 상황에서도 검은 속내가 스멀스멀 올라오다니, 나라는 사람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난 속내를 숨기고는 아이닝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저 아이는 후에 셰넌과 계약할 거니까. 킬리언에게는 아직 비밀이야.”

“왜에?”

“그건 미래의 일이잖아. 안 그래?”

그렇게 말하며 아이닝이 유독 좋아하는 부위를 쓰다듬자 정령이 내 품에 몸을 녹이며 웅얼거렸다.

“맞지, 킬리언은 알면 안 되지.”

그 말에 난 짙게 웃었다.

“역시 넌 뭔가를 알고 있구나, 아이닝.”

내 말에 축 누워 있던 아이닝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날 보며 눈을 말똥거리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어라라?”

그렇게 눈을 깜박이던 아이닝은 곧 내 품에 얼굴을 숨겼다.

“아이닝 갑자기 졸려! 막 잠이 와, 쿨쿨!”

아이닝은 그렇게 말하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는 척을 했다.

난 그런 정령을 관찰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럴 줄 알았어.’

3년 전, 킬리언이 처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던 날. 난 아이닝이 그에게 한 말을 계속 기억하고 있었다.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불쌍한 영혼.

‘운명의 소용돌이.’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이것이 내 빙의와 관련 있을 거라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래서 그동안 가만히 때를 기다렸다.

‘아이닝에게 물어볼 타이밍을.’

사실 킬리언 없이 아이닝을 만날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정보를 공유할 때마다 아이닝이 나를 찾아왔으니까.

문제는 정령검을 이용한 정령 소환은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었다.

‘킬리언의 정보를 듣고 내 정보까지 전달하면 타임 오버였지.’

그렇다고 내가 먼저 아이닝을 소환할 수도 없었고.

하지만 때를 기다리는 건 내가 잘하는 일 중 하나다. 그래서 가만히 틈을 보고 있으니, 이렇게 아이닝이 먼저 물꼬를 트는 날이 다가온 것이다.

난 눈을 감은 아이닝을 고쳐 안으며 물었다.

“말해 줘, 아이닝. 네가 알고 있는 비밀이 뭐야?”

“쿠울, 쿠울-.”

“운명의 소용돌이. 그거 나와도 관계가 짙지?”

“으음, 졸려. 얼른 자야 해.”

“나보다 킬리언과 더 연관 깊어?”

“모, 몰라아-. 아이닝은 잘 몰라.”

아이닝이 어설픈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 말을 무시하지 않고 한마디씩 대꾸해 주는 모습이 귀여워, 난 아이닝의 턱을 살살 쓰다듬었다.

기분이 좋은지 아이닝은 대답을 회피하면서도 내 손에 얼굴을 맡겼다. 난 그런 사막여우에게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케스퍼와 퍼델은 어때? 사실 두 사람이 그 소용돌이에 가장 깊게 연관되어 있지?”

“…….”

거짓말을 잘 못하는지 아이닝은 결국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반응만으로도 난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다.

‘퍼델 앨러만 데커딜. 케스퍼 아글라.’

이 찝찝한 두 녀석과 정령의 마법, 그리고 운명의 소용돌이…….

얼추 맞춰지는 그림에 난 한숨을 쉬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아이닝이 힐끔 한쪽 눈을 뜨고 내 눈치를 살폈다. 물론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눈을 꼭 감고 자는 척을 했지만.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후후 웃음이 나왔다.

‘그냥 내 품에서 도망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고 끝까지 안겨 있다니.

최근 들어 아이닝은 더더욱 내게 달라붙으려 했다. 내가 상냥하게 웃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문득 전에 아이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이닝, 넌 왜 상냥한 사람이 좋아?

-왜냐면 킬리언이 상냥한 사람을 좋아하니까!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킬리언이 내게 호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다정히 말을 걸었을 뿐이지.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아이닝이 킬리언 궁에 찾아간 내게 유달리 안겨 오던 날이 있었다. 익숙하게 그 응석을 받아 주던 난 순간, 불현듯 잊고 있던 원작의 셰넌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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