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88화 (89/197)

88.

‘그는 외국에서 온 귀빈이라 황궁 내 소지품 검사에서 자유로웠거든.’

아넌의 계책은 이 귀빈께서 가지고 온 독을 약속한 장소에 숨긴 후 킬리언의 기사가 발견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외국의 귀족이 엮여 있어 사건을 덮을 수도 없고, 황태자 측에게 전부 책임을 떠넘길 수 있으니까.

참고로 외부와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킬리언이 먼 타국에 있는 영주의 아들과 말을 맞출 수 있었던 건 아이닝의 도움이 컸다.

‘나한테 했던 것처럼 그 영주 아들의 저택에도 미리 정령이 다닐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뒀을 줄이야.’

그것도 당사자 몰래.

킬리언이 말하기를, 정령과 계약한 건 누구에게도 밝히고 싶지 않았지만 언젠가 도움이 필요할지도 몰라 준비해 두었다고 했다.

영주의 아들은 정령을 보여 주기만 해도 즉시 본인을 도울 것이라 예상했으니까.

-그는 아카데미에서 처음으로 제게 정령사의 기질이 보인다고 말해 주었어요. 그리고 정령에 대한 자료 공유를 부탁하자 기꺼이 저택에 초대해 주었죠.

사건이 전부 끝난 후, 킬리언의 말을 들으며 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었지.

‘킬리언 앨러만 데커딜……. 내 생각보다 더 음흉한 면모가 있단 말이야?’

하여튼 킬리언의 생각대로 정령사 집안의 후손인 영주의 아들은 갑자기 나타난 아이닝을 본 후,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령을 종일 보여 주겠다는 킬리언의 말에 당장 그의 계획에 동참하겠다고 제의를 받아들였다. 아니, 동참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고 보는 쪽이 옳을 것이었다.

-제발 내게 맡겨 줘! 다른 어떤 놈들보다도 우수하게 임무를 수행하겠어!

그렇게 주장한 영주의 아들은 데커딜 제국으로 온 후, 장담한 대로 아주 훌륭히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일부러 데커딜 제국에서만 자생하는 식물의 독을 구해 왔고, 킬리언의 기사가 독을 발견한 후에는 재빠르게 발을 뺐다.

물론 이 모든 건 자칫 의심스러운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어느 귀족이 자신이 먹을 차에 독이 발견되었는데, 그냥 넘어가겠는가.

하지만 그의 유약한 생김새와 겁먹은 연기는 충분한 타당성이 되어 주었다.

-아무래도 제가 데커딜 제국에 방문한 것은 조금 이른 판단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실제로 마갈라 제국에서 킬리언이 괴롭힘을 당했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마갈라 제국을 적대시하는 세력이 남아 있었다.

‘현 황제와 황태자가 마갈라 제국에 호의적이라 표현을 못 하는 것뿐이지.’

따라서 이 독살 시도가 아주 뜬금없는 건 아니었다.

황제는 범인을 잡겠다고 꽤 대대적으로 수사를 진행했지만, 범인이자 피해자인 영주의 아들이 이미 데커딜 제국을 떠나 버렸다.

‘그러니 수사에 진전이 있을 리가 없잖아?’

이렇게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제국은 언제나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곳이기에 이 독살 사건은 그저 유야무야 넘어가게 되었다. 킬리언과 아넌의 바람대로 말이다.

여기서 킬리언이 예상하지 못했던 수확이 하나 있었다. 영주의 아들이 마갈라 제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황제에게 받은 보상을 전부 킬리언에게 몰아준 것이다.

-내가 정말로 정령을 보게 될 줄 몰랐어. 그것도 불의 정령을……. 이건 400년 만에 등장한 정령사님께 바치는, 변하지 않을 내 우정의 징표라고 생각해 줘.

그렇게 아넌의 계책은 킬리언 궁의 완벽한 청소라는 본연의 목적을 달성함과 더불어 영주 아들의 호의, 그리고 막대한 재산을 얻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나를 편하게 본인 궁으로 초대할 정도니.’

아마 궁의 서열 정리와 체재 정리까지 완벽하게 끝내 놓은 상태일 것이다. 이 덕에 킬리언은 자신의 방에서만큼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고, 보다 안정적으로 내게 황궁 내부의 소식과 남부의 소식을 전달할 수 있었다.

이건 무척 잘된 일이었다.

특히 작년부터는 바바에 대한 기록들, 그리고 아넌을 내게 소개해 주는 일로 인해 평소보다 더 자주 만나게 됐다.

‘덕분에 나와 킬리언의 스캔들은 조금 더 떠들썩하게 변했지.’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게 멜도르라면 반대로 누구보다 반기는 이도 있었다.

바로 모스틴이었다.

모스틴은 유달리 나와 엮이는 소문을 싫어했다.

이유는 한가지였다.

-난 남녀 사이에 영원한 친구는 없다는 말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럼 너랑 난 친구가 아니라는 말이야?

그렇게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모스틴은 자주 어깨동무를 하던 어렸을 적과는 다르게 사람들 눈앞에서는 태도를 조심하게 되었다.

나 역시 그런 모스틴의 태도를 존중했다.

‘사교계에서는 나와 킬리언을 엮지만, 정치판에서는 나와 모스틴을 엮고 있거든.’

남부가 동부에 영향력을 끼칠 것 같으니, 서부와 북부가 결합해 남부를 견제하지 않겠냐는 것이 그들의 속셈이었다.

그리고 이런 결혼 동맹의 압박은 아마 서부 쪽이 더 심할 것이다.

‘난 애초에 아버지에게 말씀드려 약혼이나 결혼에 대한 가능성을 차단했으니까.’

하지만 모스틴은 그러지 않았을 테니, 충분히 나와의 스캔들을 경계할 만했다.

그래서 나도 사람들 앞에서는 그에게는 약간의 거리감을 두었다.

‘흐음, 모스틴이 빨리 누구랑 약혼이라도 해야 마음 편하게 만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이는데, 뒤에 있던 멜도르가 다가왔다.

“뭐야, 프레도 소공작은 저렇게 가는 거야?”

“아이를 재우러 간 거니까.”

“……크흠, 누나.”

내 옆에서 머뭇머뭇거리며 헛기침을 하던 멜도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머리 쓰다듬는 거 말인데. 물론 딱히 류스펠 프레도가 부러운 건 아니야.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정말 호옥시나! 누나가 원한다면…… 내 머리를 내어 줄 의향이,”

“벨라디 님!”

멜도르의 말을 끊으며 누군가 내게 다가왔다.

고개를 돌리니 제플린이 다급하게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평소 과묵한 제플린이 저렇게 급하게 움직일 정도면 뭔가 일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지?”

내 물음 뒤로 살벌한 멜도르의 목소리가 덧붙여졌다.

“별거 아니면 너 오늘 피 보는 줄 알아.”

제플린은 그런 멜도르에게 절도 있게 경례한 후 내게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난 그걸 받으며 물었다.

“이건?”

“로버에게서 온 급보입니다.”

“로버가?”

얼마 전, 우리 저택은 북부의 연말 연회까지 무사히 끝냈다. 그러니 저택 내의 일로 이렇게 급히 소식을 전할 건 없을 텐데?

난 의아함을 품고 접힌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가만히 안에 적힌 내용을 바라봤다.

내 옆에서 그걸 같이 보던 멜도르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난 침착하게 종이를 접고 제플린을 바라봤다.

“저택으로 돌아간다. 마차를 준비해.”

“예, 벨라디 님!”

“나도 갈래!”

난 주최자인 모스틴과 프레도 공작에게 돌아간다는 인사도 전하지 못한 채 연회장을 나섰다. 맡겨 두었던 코트를 걸친 채 마차로 향하며, 들고 있던 종이를 구겼다.

종이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긴급. 테오도르 앨턴 공작님께서 텔레포트 진을 이용해 방금 저택에 도착하셨습니다. 품에 은발을 가진 여자아이를 안고 계셨는데, 아이의 상태가 위독한 것 같습니다.」

“은발의 여자아이? 그게 누굴까?”

나와 함께 마차에 올라탄 멜도르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굳이 답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봤다.

‘상태가 위독하다라…….’

아버지가 안고 온 아이는 당연히 네시아일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아프다는 거지?

‘원작에서는 초반에만 허약하고 그 이후부터는 건강했는데.’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의문을 품는 사이, 마차가 저택에 도착했다.

난 마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현관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근처에서 서성이며 나를 기다리던 로버가 냉큼 다가왔다.

“벨라디 님.”

“아버지는.”

“방에 계십니다.”

로버의 말이 끝나자마자 난 망설임 없이 5층으로 향했다.

뒤에서 멜도르가 로버를 닦달하며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급보는 무슨 내용이야?”

“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넌 집사라는 놈이 이런 것도 몰라? 잘리고 싶어?”

“절 자를 수 있는 건 벨라디 님밖에 없습니다!”

“이게 누나 믿고 나한테 말대꾸를 한다 이거지?”

“히익!”

그러거나 말거나.

난 신경 쓰지 않고 계단을 올라 아버지의 방 앞에 섰다. 급했는지 활짝 열려 있는 아버지의 방 안 침대에는 사람 여럿이 서 있었다.

가만 보니 가문의 주치의와 그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심각했고 또한 겁에 질려 있었다.

그리고 그 뒤. 장신의 남자가 살벌한 기세로 서 있었다.

‘여전하시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였다.

난 열린 방 안에 들어가지 않고, 일부러 문을 두드렸다.

똑똑-.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분위기 속에서 내가 낸 노크 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그러자 아버지를 포함한 방 안의 모든 사람이 날 주목했다.

난 아버지와 시선을 마주하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에 뵈는군요, 아버지. 이렇게 갑작스럽게 오실 줄 몰랐어요.”

내 인사에 뒤에 있던 멜도르도 이어서 고개를 숙였다.

“오셨어요, 아버지. 그런데 침대의 그 아이는…….”

멜도르의 말에 아버지가 쥐고 있던 분위기를 풀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한가롭게 인사를 할 때가 아니다.”

“아버지, 일전의 편지에서 저희에게 꼭 전할 중요한 소식이 있다고 하셨죠.”

내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들어 날 주시했다.

난 여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아이가 그 소식인가요?”

“……그래.”

약간의 침묵 끝에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멜도르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빌빌거려요? 원래 아픈 애예요?”

그렇게 말하며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간 멜도르는 곧장 침대 쪽으로 향했다.

“내 시야 가로막지 말고 비켜!”

멜도르의 말에 침대 주변에 있던 주치의의 제자들이 서둘러 물러났고, 가려져 있던 아이의 얼굴이 선명히 드러났다.

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멜도르의 입에서 얼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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