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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87화 (88/197)

87.

그 대답에 난 고개를 끄덕인 후, 류스펠에게 다가갔다.

“류스펠, 이제 나도 만났으니 그만 들어가서 자도록 해. 시간이 많이 늦었어.”

“하지만…….”

류스펠의 얼굴에는 아쉬운 기색이 가득했다. 나는 그런 류스펠을 달래듯이 말했다.

“대신 나중에 따로 우리 저택에 초대할게.”

“정말이요?”

“그럼. 그땐 지금보다 더 재미있게 놀 수 있을 거야.”

또래인 네시아가 우리 집에 있을 거거든.

네시아는 명랑한 여주답게 호기심도 많고 모험심도 강했다. 그러니 이곳에 오면 저택 곳곳을 거침없이 쏘다닐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크고 작은 사고들을 일으킬 테고.

‘원작에서도 소소한 일상 에피소드로 그런 적이 몇 번 있었으니.’

그러니 이번에는 미리 친구를 붙여 놓아도 좋을 것 같았다.

모스틴에게 들으니, 마침 류스펠은 밖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안에서 책을 읽는 걸 더 선호하는 타입이었다.

‘점잖은 친구와 논다면 네시아도 좀 얌전히 지내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며 류스펠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곱슬거리는 금발을 쓰다듬자 류스펠이 헤헤 웃었다.

그때 뒤에서 작은 신음 소리 비슷한 것이 들려왔다.

“으으……!”

힐끔 시선을 돌리니 멜도르가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쟤는 본인이 거부했으면서, 왜 저런 표정을 지어?’

만약 본인이 정말 원한다면, 나도 멜도르의 머리를 쓰다듬을 의향이 있었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하지만 본인 자존심이 그것까지는 허락하지 않았는지, 멜도르는 저렇게 속으로 끙끙 앓을 때가 많았다.

나와 함께 그 표정을 살핀 모스틴이 키득키득 웃었다.

“쌤통이다, 멜도르 앨턴.”

그렇게 흥얼거린 모스틴이 나를 보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벨라디, 벨라디. 내 머리도 쓰다듬어 봐. 그럼 네 동생이 더 분해하겠지?”

그 말에 나 역시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모스틴을 바라봤다.

“내가 네 머리를 쓰다듬는 순간, 우리가 곧 약혼할 거라고 온 제국에 소문이 퍼질 텐데?”

“헉! 접근 금지야, 벨라디 앨턴. 얼른 나한테서 떨어져……!”

그렇게 말한 모스틴은 되레 본인이 휙휙휙 뒷걸음질 치며 멀어졌다.

“형아? 어디가?”

“류스펠, 이제 방으로 가자!”

그렇게 신속히 멀어진 모스틴이 류스펠을 데리고 연회장을 나섰다.

난 그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저놈은 누가 데려가려나.’

재미있게도 모스틴, 시온, 나 우리 셋은 전부 약혼자가 없었다.

뭐, 언급되는 후보는 계속 있었지만…….

‘시대가 워낙 격동하고 있어서 다들 상황을 살피느라 바빴지.’

심지어 우리 셋은 나이가 비슷해서, 끼리끼리 약혼할 것이라는 의견이 강했다.

덕분에 다른 가문들은 살살 눈치를 봤고, 그렇게 타이밍을 놓쳐 버린 채 우리의 성인식이 다가온 것이다.

‘사실 황태자의 결혼만 아니었다면 이 정도의 긴장감은 돌지 않았을 텐데.’

대대로 데커딜 제국의 황태자는 동부 연합의 귀족과 혼인을 올렸다. 현 황제도 그랬고, 그리리카 선황의 남편도 동부 출신이었다.

그게 의무는 아니었지만, 황후의 가문이 동부 연합의 대표가 되기에 자연스럽게 생긴 흐름이었다.

‘애초에 동부에는 황제라는 부동의 권력자가 있지.’

그러니 동부 연합의 귀족들은 황제를 중심으로 뭉쳤고, 세력이 비슷하며 충성도가 높았다. 황실 입장에서는 외척으로 삼기 적당했던 것이다.

황실은 의도적으로 황후의 가문을 동부에서 고르며, 각 연합의 균형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번 황태자인 퍼델 앨러만 데커딜이 그 균형을 깨트린 것이다.

‘남부의 가문과 결혼을 해 버렸으니.’

황태자비의 가문이 한미했다면, 그나마 귀족들이 눈치를 덜 볼 텐데.

그녀의 가문인 패러그린 후작가는 남부에서도 손꼽히는 대부호라, 다른 연합의 불만이 상당했다. 가뜩이나 현 황태자가 남부와 친한데 즉위를 하고 나면 권력이 전부 남부로 쏠리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

그렇기에 남부를 제외한 지역의 귀족들은 남은 대귀족들이 결혼 동맹을 맺어 남부를 견제해 주길 바랐다. 특히 북부의 앨턴 공작가는 세 공작가 중 유일하게 딸이 있어, 그런 기대가 컸고.

‘그런데 내가 임시 가주직을 차지하게 되면서 상황이 애매해진 거지.’

물론, 난 진작에 약혼 생각이 없다고 아버지께 못 박았다. 누구와 약혼을 하든, 내게 장애물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의외로 아버지는 내 말을 흔쾌히 받아 주셨다.

덕분에 난 약혼과 결혼이라는 압박에서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다른 귀족들은 이를 모르니, 슬슬 우리 사이에 특별한 변화가 없을까 주시하는 중이었다.

‘약혼을 하지 않은 채 성인식 직후 결혼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뛰어난 용모를 가진 동갑내기 공작가 자제들. 거기에 제국에서도 소문난 소꿉친구 관계.

정치판을 떠나 사교계에서도 이런 우리 사이에 무슨 로맨스가 피어날지 연일 호들갑을 떨며 기대했다.

사실 난 내 평판에 큰 흠이 가지 않는 이상, 이런 종류의 소문은 크게 상관없었다. 애초에 지금 나와 가장 큰 스캔들을 가지고 있는 이는 따로 있었고 말이다.

‘킬리언 앨러만 데커딜.’

이제는 완전히 바람둥이로 이미지를 잡은 킬리언이었다.

그날 이후 킬리언은 가끔 공작가를 방문해 나와 교류를 이었다. 이 방문은 공식적인 초대이기에 아버지의 허락도 전부 받아 놓은 상태였다.

명분은 마법 루비 수출을 위해 마갈라 제국의 정세에 대한 조언을 받는 것.

‘실제로는 서로의 현 상황을 공유하고 추가적인 계획을 세우기 위해.’

아무래도 아이닝만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사교계는 우리 사이를 매우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럴 만하지.’

다른 건 다 제치더라도, 킬리언과 내 얼굴은 합이 무척 좋았다.

꾸덕꾸덕한 유화 물감을 바른 듯 화려한 외모의 나와, 맑은 수채화를 떠올리게 하는 수려한 인상의 킬리언. 거기에 둘의 머리와 눈의 색채도 조화로운 편이라, 겉으로 보기에 상당히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신분과 나이도 얼추 맞으니, 귀족들은 연신 나와 킬리언의 사이가 어떻게 발전할지 알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물론 킬리언 주위에 있는 여자들 때문에 깊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티벤 후작과의 연락책인 여성들은 지금도 훌륭하게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니까.

참고로 킬리언은 종종 내게 아주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이고는 했다.

-벨라디, 소문은 소문일 뿐인 거 아시죠? 전 절대 그녀들에게 어떤 감정이 있거나, 매혹을 사용해 이용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들과 전 철저한 계약 관계일 뿐이에요.

그 말에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킬리언. 나도 아이닝과 정령검이 없었다면 티벤 후작과 같은 방법으로 당신과 정보를 공유했을 거예요. 그러니 전혀 오해하지 않아요.

이런 내 대답을 듣는 순간, 킬리언이 지은 표정은 참…….

‘미묘했지.’

참고로 킬리언의 바람둥이 이미지를 철석같이 믿는 이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성격 급하기로 유명한 내 동생 멜도르 앨턴이었다.

-그 바람둥이 새끼는 뭔데 누나랑 그렇게 자주 만나는 거야? 역시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그딴 놈보다는 차라리 모스틴 프레도가……. 아니야! 역시 그놈도 아니야!

킬리언과 내가 만나는 주기는 고작 두 달에 한두 번이다. 그러나 소문을 덥석 믿은 멜도르는 그나마도 투덜거렸고, 내가 킬리언의 궁에 드나들게 되면서부터는 그를 깡그리 싫어하게 되었다.

-도대체 누나가 왜 그놈 궁에 가야 하는 건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멜도르가 아니라 내가 킬리언의 궁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된 점이다.

이건 전부 다 킬리언이 자신의 궁 시종들을 갈아엎은 덕분이었다.

‘모두 아넌 마치니가 꾸민 일이었지.’

킬리언은 내 말대로 황궁으로 돌아간 후 신중하게 아넌 마치니와 접촉했다. 아넌 마치니는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진짜 주군을 알아봤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렇게 아넌을 손에 넣은 그는 곧바로 계책을 물었다.

-형님의 수하로 가득 찬 내 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이때 아넌은 내가 킬리언에게 내민 미약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일단 마갈라 제국에서 믿을 수 있는 자를 전하의 궁으로 초대하십시오. 되도록 높은 신분으로.

그건 쉬운 일이었다. 애초에 킬리언은 데커딜 제국보다 마갈라 제국에서의 인맥이 더 넓었으니까.

킬리언은 일부러 우리 제국과 교역이 활발한 해안가 지방의 영주 아들을 제국으로 초대했다.

당연히 황제와 황태자는 그를 환영했지만, 별도의 연회나 만찬은 열리지 않았다. 영주의 아들이 친분이 있는 킬리언만 보러 왔다며 조용히 머물다 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틀 뒤, 킬리언과 영주의 아들이 마실 찻잎에서 독이 검출되었지.’

황궁은 발칵 뒤집혔다. 황제는 직접 영주의 아들에게 이 사태에 대해 사과하는 한편, 혹시 모를 후환을 잠재우고자 그가 마갈라 제국으로 돌아갈 때 상당한 보상금을 챙겨 주기까지 했다.

영주의 아들이 유하게 넘어가 사건은 커지지 않았지만, 이것이 오히려 황제의 분노를 키웠다.

황제는 킬리언 궁에서 찻잎을 관리하던 시종들은 물론 모든 시종들과 그 윗선까지 전부 엄벌에 처했다. 그들을 뽑았던 황태자 역시 이번 일로 황제에게 꽤나 꾸중을 듣게 되었고.

‘그 독을 발견한 이들은 킬리언이 직접 선출했던 호위 기사들이라지?’

원래 킬리언을 감시하기 위해 황태자가 붙여 놓았던 호위 기사들은 내가 황제에게 항의를 하자마자 즉시 기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쫓겨났다.

그 직후 킬리언은 빈자리에 곧장 새로운 호위 기사들을 채워 넣었다.

‘평소 그가 눈여겨보고 있던 기사도 있었고, 내가 추천해 준 기사도 있었고.’

그런 기사들이 독을 발견했기에, 황제는 킬리언의 안목을 매우 칭찬했다.

그 후, 그에게 2황자 궁의 모든 전권을 하사했다. 원래 킬리언이 귀국했을 때부터 가졌어야 할 당연한 권리를 말이다.

‘중간에 황태자가 가로채지만 않았어도 진작에 얻었을 것을.’

그렇게 킬리언은 자신의 궁을 싹 청소했다. 그리고 이에 맞춰 본인의 보좌관으로 아넌 마치니를 데리고 오니, 남몰래 킬리언과 접촉하던 아넌은 정식으로 2황자의 부하가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끝내 독살을 꾸민 범인은 잡히지 않았지.’

물론, 이것까지 전부 계획의 일부였다.

그 독을 궁에 가지고 온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마갈라 제국에서 온 영주의 아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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