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아무리 내가 내 이익만 추구하는 속내 검은 사람이라고 해도, 저런 친구에 한해서는 양심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난 철없이 공짜로 땅을 내주려는 모스틴의 입을 찹찹 때리고,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탄광으로 벌어들인 수익의 일정 비율을 너한테 줄 거야.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겠어.
-안 그래도 되는데.
-됐어. 장담하는데 내가 그냥 돈 주고 그 땅을 구입하는 것보다 그편이 더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냥 받아.
-뭐……. 좋아, 준다면 또 넙죽 받아야지.
-친구 잘 뒀네, 모스틴 프레도. 목숨도 구해 주고, 돈도 벌어다 주고. 나 같은 사람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으휴, 또 생색내기는. 알고 말고요, 제 일생일대의 은인이신 벨라디 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만담을 보던 시온이 잠시 우물쭈물거리다 내 옷자락을 잡았다.
-나도 감사합니다. 벨라디 님. 그런데 난 은인께 드릴 탄광이 없는데…….
그 반응을 본 모스틴이 빵 터지며 큰 소리로 웃었다.
-으하하하! 너 이제 큰일 났다, 시온!
그리고 난 조용히 시온의 머리를 토닥일 수밖에 없었지.
‘시온에게는 생색내기가 조금 힘들단 말이야.’
하여튼 그렇게 모스틴과 모종의 약속을 하고, 연말 연회로 서부 사람들이 모두 정신없는 지금. 우리는 후다닥 거래를 진행했다.
괜히 모스틴이 자신의 저택 한 칸을 내게 내어 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증기 기관차는 언제 만들고 카라노 탄광은 언제 사용하려고?”
“실험과 시범 운행은 철도가 깔리는 즉시. 본격적인 건 올해가 끝나고 내가 성인이 되면.”
임시 가주로 임명받은 후, 내게는 여러 권한이 생겼다. 그중 철도 사업에 가장 필요했던 권한은 이것이었다.
「임시 가주는 가주의 허락 없이, 앨턴 공작가의 자금으로 개인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
프레도 공작이 내 거래에 가볍게 응한 것도 내가 저 권한을 이용할 생각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어쩌다 보니 3년 동안 발이 묶였지만.’
그래도 이번 겨울이 지나면 성인이 되니까.
난 모스틴과 토지 양도 계약서를 한 장씩 나눠 가진 후, 앞으로 할 일들을 정리하며 방에서 나왔다.
방 밖에는 눈에 익은 모스틴의 하인이 서 있었다. 모스틴이 그 하인에게 계약서가 담긴 종이봉투를 넘겼다.
“이거 내 방에 가져다 놔.”
“예, 소공작님.”
나 역시 뒤따라 나온 제플린에게 계약서를 맡겼다.
“연회가 끝날 때까지, 제자리에서 대기해.”
“예.”
그렇게 각자의 수하가 갈 길을 가고, 모스틴과 난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모스틴이 룰루랄라거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아, 시온한테 물어보니까 북부 철광석 사업에 투자했대.”
“그래?”
“시온도 참 말 잘 듣는단 말이야.”
“……네가 할 말이야?”
내 기준에서는 모스틴도 참 말 잘 듣는 놈인데. 지금도 내 말대로 이렇게 계약서를 작성한 것 봐라.
내 말에 모스틴이 칭찬은 넣어 두라며 웃었다.
‘이게 칭찬이 되나?’
뭐, 모스틴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긍정적인 말이 되는 거지.
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아글라 공작가만 루비 투자를 막아서 조금 미안했는데, 마음이 놓여.”
“철도 사업이란 걸 하면 철광석의 가치도 올라가겠지? 시온도 우리랑 같이 돈 좀 벌겠는걸-?”
“우린 이미 부자지만.”
“그건 그래.”
참고로 시온은 우리 셋 중 가장 욕심이 없는 놈이었다.
그래서 내가 남몰래, ‘너 개인으로 루비에 투자할 생각이 있으면 조용히 받겠다.’고 했을 때도 정중히 거절했다.
-괜찮아, 벨라디. 나 괜히 형한테 거리끼는 일 하고 싶지 않아.
시온은 그렇게 말하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지.
난 그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철광석에는 투자해 줘서 고맙네.”
“철광석은 걔네 형이랑 관련 없으니까. 아아, 시온은 남부에서 잘 지내고 있으려나~.”
시온은 현재 아글라 영지로 내려가 남부 연합의 연말 연회에 참석한 상태다.
날이 추운 북부와 아직도 텔레포트 진이 적은 서부는 수도의 저택에서 연말 연회를 열지만, 날씨 좋고 텔레포트 진이 많은 남부는 꼭 본인들의 영지에서 연말을 보냈다.
‘본인들이 얼마나 잘나가는지 다른 연합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거지.’
특히 아글라 공작이 살짝 뒤로 물러나고, 케스퍼가 본격적으로 가문의 키를 잡으며 그런 기세는 더 심해졌다. 허영심 많은 케스퍼는 남부를 과시하는 종류의 연회와 모임을 자주 열었다.
‘그리고 그걸 감당할 만큼 막대한 돈을 벌고 있고.’
케스퍼가 손을 대는 사업마다 족족 대박이 터졌거든.
그리고 난 이제, 이게 순전히 케스퍼의 능력만으로 이룬 결과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케스퍼에게도 킬리언의 매혹이 통하지 않았으니까.’
이건 킬리언이 추가로 알려 준 정보였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였다.
‘케스퍼도 황태자와 마찬가지로 정령의 마법과 엮여 있다는 거지.’
뭐, 예상하고 있었기에 놀랍지도 않았다. 황태자와 케스퍼는 짝꿍과 마찬가지지 않은가?
그리고 참 짜증스럽게도, 지난 3년간 내가 해 왔던 일 중 가장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것이 황태자와 케스퍼에 대한 조사였다.
물론, 윌리엄이라는 꼬리를 따라 차근차근 안으로 들어가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아주 꼼꼼하게 정보를 숨겼어.’
만만하게 보지 말라는 거지?
그런데 어쩌나, 이쪽은 오히려 더 불타올랐는데.
난 활활 타오르는 호승심을 숨기며, 모스틴과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그때 내게 다가오는 인물들이 있었으니.
“누나! 프레도 소공작이랑 어디 있다 온 거야?”
“벨라디 누나아-.”
“야! 너 우리 누나한테 누나라고 하지 마!”
“하지만 전에 누나라고 불러도 된다고 허락받았습니다, 앨턴 소공작님.”
기어코 여기까지 따라온 멜도르. 그리고 그런 멜도르의 옷자락을 꼭 쥐고 있는 모스틴의 동생, 류스펠이었다.
모스틴과 똑같은 디자인의 흰색 연회복을 입은 류스펠은 쥐고 있던 멜도르의 옷자락을 놓았다. 그러고는 쪼르르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아까 인사하고 싶었는데, 너무 바빠 보이셔서 못 다가갔어요.”
류스펠은 멜도르에게 내뱉던 퉁명스러운 목소리와 사뭇 다른, 애교 섞인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걸 보며 난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류스펠. 키가 많이 컸네.”
“헤헤, 저 곧 있으면 11살이나 되는걸요!”
그 순간, 내 옆에 있던 모스틴이 살짝 타박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류스펠, 너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까지 연회장에 있어? 친구들은 이미 다 돌아갔는데.”
그러면서도 몸은 상냥하게 류스펠을 안아 주었다.
류스펠은 익숙하게 모스틴의 품에 안기며 머리를 비비적댔다.
“형아, 나 조금만 더 놀면 안 돼? 벨라디 누나도 이제야 만났는데.”
동생의 애교에 모스틴의 표정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모스틴은 류스펠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럴까, 우리 동생? 형이랑 누나랑 조금만 더 놀까?”
“응!”
그 모습에 어느새 내게 다가온 멜도르가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흥, 저렇게 풀어진 표정이라니. 프레도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부끄럽지도 않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멜도르를 보며 난 입을 열었다.
“류스펠이랑 원래 아는 사이였니?”
“아니, 저 꼬맹이가 나보고 앨턴 공작가 사람 맞냐고 다가오잖아. 머리가 검은색이라고.”
멜도르는 본인의 머리를 툭툭 치더니, 매고 있던 타이를 조금 풀었다.
“그래서 맞다고 했더니, 나한테 들러붙은 거야. 누나 어디 있냐면서. 귀찮아 죽을 뻔했어.”
그렇게 말하는 멜도르의 목소리는 변성기가 끝나 매우 낮아진 상태였다. 키도 어느새 나와 비슷할 만큼 자랐다.
‘멜도르도 이제 16살인가.’
전생을 깨달았을 때의 나와 나이가 같아지네.
내가 곧 성인식을 앞둔 것처럼 멜도르 역시 아이 티를 많이 벗었다. 그래서 그런가,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들어선 멜도르를 힐끔거리는 영애들이 많았다.
그래 봤자 녀석은 아마 한동안 이성을 거들떠보지도 않겠지.
‘곧 네시아가 돌아오니까.’
네시아가 우리 가문의 막내가 되면, 멜도르는 여동생 바보가 되어서 매 순간 네시아만 챙기는 팔불출 오빠가 될 예정이었다.
이 부분은 크게 뒤틀 생각이 없었다.
‘내가 시키는 일만 잘한다면 딱히 상관없어.’
멜도르는 자신을 사용하라고 한 이후부터 충실히 마법 실력을 쌓아 갔다. 검술 실력은 몇 년을 해도 지지부진하더니, 마법은 재능도 있고 좋아도 해서 그런가 날이 갈수록 실력이 늘었다.
난 최근 그런 아이에게 숙제를 하나 내렸다.
-마법 루비를 연구해 봐.
-루비를? 어떻게?
-네가 편한 대로.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되었으면 해. 할 수 있겠니?
멜도르는 그동안 제플린과 더너스, 심지어 스티아까지 부러워하던 놈이었다. 그들은 내 최측근이라 내가 자주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명령의 빈도를 신뢰의 척도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정작 본인에게는 임무를 주지 않으니, 놈은 대놓고 그 셋을 매섭게 노려보곤 했다.
‘그러다 드디어 내가 일을 맡긴 것이고.’
내 예상대로 멜도르는 아주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누나! 최고의 결과를 완성해 올게!
-그래, 믿을게. 멜도르.
믿다마다.
원작에서도 놈은 첫째의 부탁을 받고 이맘때 루비 연구에 들어갔다. 그리고 아주 괜찮은 성과를 가지고 왔지.
‘물론 그 과정이 조금 오래 걸리고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그걸 기다릴 만큼 멜도르의 연구 결과는 가치가 있으니까.
난 사이 좋게 웃는 프레도 형제를 보며 아직도 툴툴거리는 멜도르에게 물었다.
“부럽니?”
“뭐가?”
“류스펠이 귀여움받는 게.”
멜도르의 시선이 류스펠의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았거든.
이런 내 말에 멜도르가 발끈해서 외쳤다.
“아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