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79화 (80/197)

79.

‘켄뉴브 학교라면 몰라도, 여기는 네놈들 억지를 들어주는 곳이 아닌데.’

제플린이 무슨 말을 해도 호위 기사들은 답답할 정도로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저 실랑이도 슬슬 질려 왔기에,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저택에서까지 킬리언 황자님을 보호하겠다는 건, 황실이 북부를 경계한다고 봐도 되는 건가?”

내 질문에 완강하던 호위 기사들이 멈칫거렸다. 그러더니 실컷 떠들던 입을 다물고, 서로 눈빛으로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그 꼴이 너무 눈에 잘 들어와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런 질문에 제대로 답도 못 하면서 잘하는 짓이다.’

애초에 무장한 호위 기사들을 저택 내부에 들이는 것 자체가 귀족이 황족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였다.

그러니 여기서 더 나아가 응접실까지 들어오겠다는 건 당연히 큰 무례였고, 놈들도 귀족인 이상 이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는 이유는…… 황태자를 믿어서겠지.’

어지간한 귀족들은 황태자의 눈인 황실 호위 기사들의 무례를 적당히 넘어갔으니까.

하지만 난 그런 어지간한 귀족이 아니었다.

‘감히 북부 연합의 우두머리인 앨턴 공작가를 뭐라고 여기는 거야.’

오랜 평화에 찌든 황실 기사단은 어쩔 수 없이 고이게 되고, 그런 놈들은 자신들의 우물 속밖에 보지 못한다. 눈앞의 놈들 역시 황태자에게 굽신거리는 수도와 남부의 귀족들만 상대했을 테니, 오만해진 것이 분명했다.

‘황태자의 이름을 들이밀면 아무리 공작가라고 해도 한 수 접어 줄 거라 여긴 건가?’

거기에 내가 일전의 켄뉴브 학교에서도 꽤 부드럽게 상황을 넘어가 주었기에 날 만만히 봤을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이런 놈들을 질리도록 봤던 난 놈들의 오만과 실수를 내 기회로 삼는 것이 특기인 사람이었다.

‘그래. 재미있는 생각이 났어.’

마침 의견 교환이 끝났는지, 전에 봤던 호위 기사 중 대장 격인 놈이 입을 열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경.”

호위 기사의 변명으로 시간 낭비할 생각 따위 없었다.

난 간단하게 말을 끊으며 물었다.

“이름과 소속이 뭐지?”

“예?”

“이름. 소속.”

내 질문에 말을 하던 호위 기사는 머뭇거렸다.

그 머뭇거림에 난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호위 기사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세 번이나 물어야 알아듣나?”

이번에는 봐주는 것 없이 살기를 띠며 물었고, 호위 기사들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특히 내 기세를 정면에서 받게 된 대장 격의 기사는 주먹을 쥐며 손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감추려 했다.

“……황실 제2 근위대 소속 루카스 버튼입니다.”

“나머지는.”

다른 기사들도 서둘러 자신의 이름과 소속을 밝혔다. 역시나 다 황태자가 관리하는 제2 근위대 소속이었다.

난 호위 기사들을 보며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버튼 경. 난 북부의 임시 가주로서, 오늘 경들이 벌인 이 무례를 그냥 넘어갈 생각이 추호도 없어.”

넘어가기는커녕, 아주 싹싹 이용해야지.

내 말에 루카스 버튼이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실례를 끼쳤다면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께 항의를 하시고 전하께서 저희에게 처벌을 내리신다면, 그 벌 달게 받겠습니다.”

마치 황태자가 자신들에게 처벌을 내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말투였다. 그러나 내가 그 속셈을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직접 벌을 받겠다고 말하니 그나마 다행이네. 참고로 난 황태자 전하께 항의할 생각이 없어.”

내 말에 호위 기사들이 의문을 품고 날 바라봤다.

놈들은 내 기세에 눌렸을지언정 표정만큼은 여유로움이 남아 있었다. 믿는 구석이 있는 놈들의 전형적인 표정이었다.

“내 항의는 임시 가주의 권한으로 황제 폐하께 직속으로 갈 거다. 알아 둬.”

그리고 난 그런 표정들을 깨트릴 때 통쾌함을 느끼는 부류이고.

역시나 호위 기사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눈에 띄게 당황스러워했다.

특히 대장 격인 기사가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래도 황실의 기사로서 우아함은 잃지 않았던 놈이 저렇게까지 놀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황제에게 직접 항의를 하면, 황태자가 커버해 줄 수 없거든.’

황제가 황태자의 위에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황제에게 항의를 할 수 있는 귀족은 몇 되지 않았다. 최소한 후작 가문 이상, 거기에 가주들과 임시 가주들만 직접 불만을 언급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난 까다로운 두 가지 조건 모두에 해당했다.

그런 사례가 워낙 드물다 보니 저들도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이 닿지 못했던 것이겠지.

‘거기다 저 어리석은 기사들은 다수의 사람 앞에서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다고 했으니.’

잘하면 바로 기사 자격을 박탈당하겠군. 이 위기 앞에서 너희가 그렇게 충성하는 황태자가 어디까지 책임져 주는지 어디 한번 보자고.

난 호위 기사의 물음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제플린, 정확히는 아직 킬리언 행세를 하는 제플린에게 다가갔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황태자 전하께서 붙여 주셨다던 저 호위 기사들이 아주 방자하더군요.”

내 말에 제플린이 킬리언 특유의 단정한 미소를 따라 하며 입을 열었다.

“아랫사람을 다스리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대신 사과드립니다.”

“전하의 사과는 기쁘게 받아들이겠어요. 이참에 제 항의를 기회 삼아 믿을 만한 기사들로 다시 호위대를 꾸리시는 건 어떠세요?”

“정말 좋은 충고군요. 새겨듣도록 하죠.”

나와 제플린은 대놓고 이런 대화를 하며 응접실로 향했고,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문을 열었다.

그 모습에 대장 격인 호위 기사가 다급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앨턴 양!”

그 행동에 어찌할 줄 모르고 대기하던 다른 호위 기사들도 우리를 붙잡으려는 듯 움직였다. 급한 마음에 힘이라도 쓰려는 모양이지만, 안타깝게도 그게 통할 리 없었다.

‘순수한 힘겨루기도 나한테 졌겠지만, 애초에 여기는 내 홈그라운드거든.’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우리 가문의 충성스러운 기사들이 호위 기사들을 포위했다.

“이 이상은 임시 가주님의 허락 없이 다가갈 수 없소.”

그 말에 호위 기사들이 격하게 반항했다. 그러나 그들은 수부터 우위에 있는 우리 가문의 기사들을 이길 수 없었다.

“이것 놓으시오! 우린 잠시 앨턴 양과 할 말이 있단 말이오!”

“킬리언 전하! 기다려 주십시오!”

난 그 꼴들을 유심히 보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며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사태까지 포함해서 항의하도록 하지.”

내 말에 호위 기사들이 반항하던 소리가 딱 멈추었고, 응접실 문이 닫혔다.

보지 않아도, 놈들의 표정이 어떨지 눈에 선했다.

‘그러니까 왜 까불어?’

그렇게 천지 분간 못 하고 까불다가 나처럼 속내 검은 사람한테 걸리면 즉시 이용당한다는 것도 모르나?

난 터벅터벅 내 자리인 상석 소파로 다가가 앉으며 웃었다.

‘이걸로 킬리언의 호위 기사 문제도 해결이군.’

내가 앉자마자 자연스럽게 내 뒤에 선 제플린이 눈을 빛내며 날 바라봤다.

“오만한 호위 기사도 혼내고 황태자의 감시망에 구멍을 뚫으시다니. 역시 벨라디 님……!”

그렇게 익숙하게 주접을 떠는 제플린은 어느새 본래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동시에 파티션 뒤에 대기하고 있던 킬리언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웃었다.

“고마워요, 벨라디. 덕분에 좋은 기회를 얻었어요.”

응접실은 문이 닫히면 소리 차단 마법이 발동된다. 덕분에 안의 소리는 새어 나가지 않지만, 바깥의 소리는 잘 들렸다.

아마 여기서 날 기다리고 있던 킬리언도 아까의 소란을 전부 들은 모양이었다.

“별말씀을, 킬리언. 이제 한동안 바빠지실 테니, 제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마지막…….”

킬리언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방긋 웃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제가 반드시 보답할 테니, 마지막은 아닐 거예요.”

“……그렇네요. 아까는 선물이지만, 그 전에는 전부 당신에게 보답을 받을 속셈으로 일을 꾸몄으니까.”

내 진심 어린 농담에 킬리언이 키득거렸다. 그러더니 곧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그 속셈 덕분에 전 당신에게 큰 은혜를 입었어요. 외적으로도 그리고 내적으로도요.”

그 말에 난 그와 눈을 마주했다. 킬리언의 회색 눈동자에는 아침에 일렁이던 상처의 기색이 하나도 없었고, 오로지 날 향한 곧은 감정만이 가득했다.

신뢰, 호감, 의지……. 뭐, 그런 것들.

“앞으로 당분간은 이 저택에서의 일주일을 양분 삼아 버텨야겠죠. 형님이라는 두꺼운 벽을 뚫고 복수를 완성하기까지.”

그의 한탄 같은 중얼거림에 난 가볍게 물었다.

“킬리언, 당신한테는 뭐가 있다고요?”

그가 맑게 웃었다.

“벨라디, 당신이라는 무기요.”

난 그 대답을 들으며 손을 내밀었다. 킬리언은 뻗은 내 손을 살포시 잡으며 악수했다.

‘이제 다시 앞으로 향해야지.’

달콤한 휴식이 끝날 시간이었다.

***

킬리언과 헤어지기 직전 나눈 이야기는 미약에 관한 것이었다.

-그 전까지는 아무리 형님이라도 미약이라는 강한 수를 두지 않았어요.

-그럼 정말 제 하녀를 만만하게 생각해서 그딴 장난질을 건 거군요.

-돌아가면 궁에 숨겨진 미약이 있나 탐색할게요.

킬리언은 내가 내민 미약을 따로 챙기며 말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원하신다면 제가 대신 알아봐 줄 수도 있어요.

이런 내 말에 킬리언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 정도 일은 자신이 직접 해야 한다며, 조금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말한 그는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굳게 다물었다.

나 역시 그걸 굳이 캐묻지 않았다. 나도 그에게 모든 걸 오픈하지 않았듯, 그 역시 그럴 권리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킬리언도 충분히 능력이 있으니, 알아서 해결하겠지.’

그러니 그에 대한 관심은 이제 접어 두고, 난 내 할 일이나 해 볼까.

나는 뒤에서 줄곧 대기하고 있던 더너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디에 가뒀지?”

“지하 감옥입니다.”

“증거는?”

“여기 있습니다.”

난 더너스가 건네는 증거물을 집어 들며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