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내 물음에 스티아가 공손히 보고했다.
“응접실 문 너머로 시종들이 귀 기울이고 있어, 실수인 척 찻잔을 떨어트렸습니다. 그 후 하녀들이 들어와 찻잔을 치울 때 잎을 챙겨 돌아왔습니다.”
“그래, 잘했다.”
칭찬을 해 주었음에도 스티아의 표정은 전혀 펴지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벨라디 님. 그렇지만…….”
스티아가 잠시 머뭇거리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오빠의 애인 연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다른 걸 다 떠나, 이제 생리적으로 무리예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안색은 파리하게 변해 있었다.
스티아가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무슨 심정일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당장 나였어도 혈육과 마실 차에 미약이 섞여 있다는 상황을 알게 되면…….
‘으, 속이 매스꺼워.’
심지어 이 이후에 황태자 쪽에서 또 어떤 술수를 부릴지 몰랐다.
난 깔끔하게 스티아가 임무를 끝내려 하는 사유의 타당성을 인정했다.
“이미 목표한 바를 이뤘으니, 임무는 완수한 거야. 수고했어, 스티아.”
내 말에 스티아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황궁에 있는 제플린에게는 별다른 수정 사항을 내리지 않았으니, 원래 계획대로 움직이면 되었다.
난 들고 있던 미약을 따로 챙기며 스티아를 내보냈다.
“이만 나가 봐.”
“예, 벨라디 님.”
스티아가 고개를 숙인 후, 침실을 나섰다.
난 소파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푹 쉬었다.
‘내일도 할 일이 많겠어.’
일단 킬리언을 만나서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야지.
킬리언을 생각하니, 문득 편안한 표정으로 집무실 소파에 잠든 모습이 떠올랐다.
이때까지 잠들지 못한 걸 보충이라도 하듯, 킬리언은 나와 함께 있던 일주일 내내 나른한 오후가 되면 단잠에 빠지곤 했다. 그는 평소 단정한 자세의 영향인지 소파에 푹 기댈 때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새근새근 잠들었다.
‘꼭 아이같이…….’
그 모습이 떠오르니, 킬리언을 벌써 황궁으로 보내야 한다는 게 살짝 걱정됐다.
‘또 밤잠 못 이루면 안 될 텐데.’
그러다가 다시 멘탈이 흔들리면…….
여기까지 생각하던 난 고개를 저으며 의식의 흐름을 바꿨다.
‘아니야, 킬리언이 진짜 아이도 아니고. 여기까지 챙겨 줬으면 많이 해 준 거지.’
애초에 그를 이 저택에 부른 건 내가 수집한 정보들을 전부 외우게 한 다음 황궁에서 입지를 다지라고 그런 것이다.
그러니 목표를 이뤘으면 하루빨리 황궁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이제 그 후의 일을 생각하자.’
내가 이용할 수 있는 건 뭐가 있는지, 남은 3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그리고 킬리언이 내게 가져다줄 정보들은 어떤 것이 있을지.’
원래는 일찍 잠들려 했지만, 이런저런 정보들을 떠올리고 조합하는 것에 불이 붙은 난 결국 밤늦도록 깨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
다음 날, 킬리언이 정해진 시간에 맞춰 내 집무실로 찾아왔다.
그는 날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벨라디, 오늘 외출하시나요?”
창가에 서서 정원을 바라보던 난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집무실에서는 주로 편안한 실내복을 입었지만, 오늘은 약간의 단장을 마친 상태였다.
“제플린이 돌아오는 날이잖아요. 손님맞이를 준비해야죠.”
“아, 그게 오늘이군요.”
희미하게 웃으며 내 곁으로 다가온 킬리언은 옆에 서서 같이 정원을 바라보았다. 난 그런 그를 흘깃 보았다 다시 창가로 시선을 고정했다.
킬리언과 제플린이 서로의 위치로 돌아갈 때는 앨턴 공작가에서 진행하겠다고, 사전에 제플린과 말을 맞췄다. 감시가 살벌한 황궁보다는 내 통제 아래에 있는 곳이 훨씬 안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며칠 전, 공식적으로 킬리언 황자 궁에 초대장을 보냈지.’
열연 중인 제플린은 흔쾌히 승낙의 답장을 보냈고.
초대의 명분은 일전에 켄뉴브 학교에서 언급했던 말을 이용했다.
-마갈라 제국에 관한 책을 구매했는데, 언제 한번 저희 저택에 초대해 같이 봐 주셨으면 해요.
그 자리에 황태자가 심은 호위 기사도 함께 있었으니, 진작 보고를 했겠지. 그러라고 대놓고 말했었고.
그러니 내 초대가 갑작스러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스티아가 전달한 제플린의 쪽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벨라디 님의 초대를 승낙한 그날, 황태자가 찾아왔습니다. 아무리 여자가 좋아도 벨라디 님과는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말라 충고하더군요. 이유를 물으니 우물쩍거리며 답을 넘겼습니다.」
‘그래, 예상했던 반응이야.’
이런 순간만큼은 킬리언과 내 성별이 다른 게 나쁘지 않았다. 그와 내가 단둘이 만난다고 하면, 누구든 가장 먼저 남녀 간의 사적인 관계를 떠올리니까.
우리가 큰일을 도모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말이다.
‘가뜩이나 황태자는 킬리언이 아직 미혼인 것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지.’
그런데 나이도 비슷하고 약혼자도 없는 나와 접점이 늘어나니, 그 방향으로만 생각이 굳어지는 듯했다.
‘일부러 그걸 의도하기도 했고.’
킬리언이 황궁으로 돌아간 후, 아예 만나지 못하는 건 곤란하니까.
그러니 황태자의 경계를 적당히 사면서, 자연스럽게 만남을 지속할 수 있는 명분 정도는 만들어 둬야 했다.
‘친구 정도면 괜찮으려나.’
그때 옆에서 킬리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에 서면 앨턴 공작가의 대문이 잘 보이네요.”
그 말에 난 가볍게 답했다.
“전망이 좋으니까요.”
“마차가 다가오면 바로 확인할 수 있겠어요.”
“덕분에 편하답니다.”
그러자 빤히 날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난 고개를 돌려 킬리언과 눈을 마주했다. 입을 꾹 다문 그는 어딘지 섭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킬리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지만, 난 모르는 척 물었다.
“왜 그래요, 킬리언?”
내 물음에 킬리언이 잠시 머뭇거렸다.
난 차분히 다음 말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만약 여기서 그가 약한 소리를 한다면…….’
킬리언이 이 저택을, 정확히는 내 옆을 편하게 여기고 있는 건 진작 눈치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그가 싫지는 않았다.
‘내가 먼저 저택에 더 머물게 할까, 고민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곤란한 일이었다. 이것도 결국은 필요 이상의 동정심과 연민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킬리언과 내 사이에 신뢰가 생기는 건 환영할 일이지만, 그게 목표의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 돼.’
단 며칠 만에 그와 내 거리는 눈에 띄게 가까워졌다. 그러니 이쯤에서 슬슬 우리의 거리감을 다시 조절할 필요가 있다 판단하는데, 킬리언과 스치듯 눈이 마주쳤다.
그의 회색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걸 목격한 순간, 난 내가 간과한 것을 떠올렸다.
킬리언이 나 못지않게 사람을 잘 관찰한다는 사실을…….
어느새 그의 표정은 특유의 단정한 미소로 돌아와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챘구나.’
그럼 그에게 굳이 감정 상할 말을 할 필요 없으니, 오히려 편한 일이었다. 애초에 그와 거리를 벌리자고 판단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이제 자연스럽게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이 왜 이렇게 불편하지?’
킬리언의 포커페이스는 그의 장점 중 하나다.
하지만 그 장점이 무색하게도 지금의 그는 표정만 포커페이스일 뿐, 그 외의 다른 곳에서는 숨기지 못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흔들리는 호흡, 머뭇거리는 손. 그리고 뒤로 물러난 발걸음이 눈에 밟혔다.
난 방긋 웃고 있는 킬리언을 응시하며 미간을 약간 찡그렸다.
‘상처받은 건가.’
그게 뭐라고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건지…….
나도 모르게 킬리언을 달래려 입을 열었다가, 그냥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와서 모든 걸 상냥함으로 덮으면 본전도 찾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제 수하에게 보고를 하나 받았는데.”
화제를 바꾸기 위해 미약 이야기를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툭-.
어깨 부근에 따뜻한 무언가가 닿았다.
“죄송해요, 벨라디. 머리가 어지러워서…….”
그 말과 함께 결 좋은 붉은 머리가 내 뺨을 간지럽혔다.
“조금만 이러고 있어도 될까요?”
킬리언이 말할 때마다 등 뒤로 옅은 숨결이 느껴졌다.
난 잠시 눈을 깜빡였다. 창가에 비친 그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평소라면 그 누구에게도 쉽게 허락하지 않을 접촉이다. 하지만 지금은 킬리언의 미약한 움직임을 제지할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그에게 상처를 줘서 그런가?’
난 딱히 그를 말리지도,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도 않은 채 서서히 자기 합리화를 시작했다.
‘그래. 이런 마음이 드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야. 나도 전에 킬리언의 뺨을 만진 적이 있잖아.’
킬리언이 처음 우리 저택에 온 날, 잠든 그의 머리를 정리해 주며 딱 한 번 그의 뺨을 누른 적이 있었다. 아무런 사심 없이, 그저 무의식중에 아이닝을 따라 한 것뿐이었다.
그러니 킬리언에게 이 정도는 허용해 줘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맞아, 그래야 공평하지.’
나답지 않은 어영부영한 판단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지금만큼은 타당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난 제플린을 태운 황궁 마차가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킬리언에게 어깨를 내주었다. 그리고 그 역시 내게서 끝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
킬리언의 얼굴을 한 제플린이 저택으로 돌아왔다. 난 현관에서 그를 맞이하며 제플린의 뒤를 살폈다.
역시나, 켄뉴브 학교에서 본 호위 기사들이 그대로 그를 따라왔다.
‘그나마 이번에는 시종들이 없네.’
난 제플린을 2층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리자 호위 기사들은 당연하다는 듯 응접실 안으로 따라 들어오려 했다.
제플린이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놈들은 켄뉴브 학교에서보다 더 의욕적이고, 고집스러웠다.
“어떤 상황에서든 전하의 곁을 떠나지 말고 목숨같이 보호하라는 황태자 전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그 말에 난 피식 웃었다.
‘황태자가 내린 명은 그런 게 아닐 텐데.’
킬리언과 내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우리 사이의 어떤 기류가 오갔는지.
아주 낱낱이 파헤쳐 오라고 했겠지.
하지만 어떻게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