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77화 (78/197)

77.

그 대답에 난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대륙에 하나뿐인 정령사를 내 수하로 얻으면 생기는 메리트들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네시아도 정령사가 될 테지만, 킬리언이 더 특별해.’

눈의 정령은 비교적 사람에게 호의적이었지만, 불의 정령은 그동안 누구와도 계약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화제성도 희귀성도 킬리언이 우세였다.

‘그걸 이용하면…….’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팽팽 돌아가는 내 검은 속내를 전혀 모를 그가 순수한 얼굴로 웃었다.

“여기 머물면 벨라디가 계속 절 지켜 주는 건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를 이 저택에 데려오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곳에 당신을 감시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어요. 있다고 해도 내가 지켜 줄 테니, 안심하고 편하게 지내요.

그러자 우습게도, 머릿속에서 바쁘게 굴러가던 계산이 딱 멈췄다. 욕심 많은 내게 이건 흔치 않은 경우였다.

내가 가만히 입을 다물자, 킬리언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벨라디?”

의아한 듯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천천히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입꼬리를 피식 올렸다.

“말씀드렸다시피 전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지라……. 경호의 대가는 확실히 받아낼 거예요.”

내 말에 킬리언이 소년같이 키득거렸다.

“뭘 드려야 당신이 만족할지 고민해야겠네요.”

안정감 있는 그 미소를 보며 난 들고 있던 만년필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이 새삼스러운 감정을 되새겼다.

‘킬리언을 내 밑으로 두고 싶지는 않아.’

왜?

거기에 대한 대답은 시원하게 나오지 않았다.

‘그가 불쌍하니까?’

아니, 동정으로 머뭇거렸다면 난 이 자리까지 올라오지 못했다.

‘굳이 황자라는 그릇을 품을 필요는 없어서?’

그건 맞지만, 이 의문에 딱 들어맞는 해답은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난 곧 잡념을 떨쳤다. 그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한 게 어제였다.

‘그러니 이런 생각은 의미 없어.’

화제도 돌릴 겸, 난 킬리언 앞에 쌓인 종이 뭉치들을 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전 약속을 지켰어요. 이걸 활용해 황궁에서 입지를 다지는 건 당신 몫이죠.”

내 말에 킬리언도 장난스러운 기색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에는 제가 약속을 지킬 차례겠군요.”

“남부와 황궁 내부의 재미있는 소식들을 많이 물어 와 줘요.”

내 말에 그가 눈을 마주했다. 굳은 신뢰가 새겨진 회색 눈이 만족스러워, 난 상냥하게 웃었다.

“당신께 기대가 커요, 킬리언.”

“……영광입니다, 벨라디.”

킬리언의 대답이 한 박자 늦게 나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내게 의미 있는 건, 내가 달아 준 날개로 그가 얼마나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가니까.

***

킬리언은 이 저택에서 여섯 번의 밤을 보냈다.

그동안 그는 내 기대에 부응하듯 수많은 정보들을 자기 것처럼 흡수했다.

그 과정을 보며 난 작게 감탄했다.

‘확실히 킬리언이 비범하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

거기에 그는 종종 내게 조언까지 구했던 터라, 우리는 아침에 눈 뜨고 다시 침대에 누울 때까지 딱 붙어 다니게 됐다.

그리고 이 상황을 아주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앞으로 나도 여기서 공부할 거야!

킬리언이 이 저택에 머문 지 3일째 되던 날, 비장한 얼굴로 마법 서적을 안고 찾아온 멜도르였다.

-손님도 여기서 공부하는데, 나라고 못 할 게 뭐가 있어? 여기는 우리 아버지 집무실이잖아!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다.

내게 엉덩이를 걷어차이며 쫓겨난 멜도르는 매우 분한지 밖에서 한참을 씩씩거렸다.

참고로 쫓겨난 멜도르가 얼마나 밖에서 서성였는지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놈의 거친 숨소리가 닫힌 문 너머로 아주 선명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킬리언이 소리 죽여 웃은 건 큰 비밀도 아니었다.

‘뭐, 나도 같이 웃었고.’

멜도르의 성격상, 다시 쳐들어와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멜도르는 다시 집무실로 들어오는 대신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 걸 선택했다. 킬리언이 처음 온 날, 도 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돌아가는 길에 새로 심은 정원의 꽃들을 밟고 가서 정원사들을 울렸다지만.’

그래도 나름 잘 참았으니, 후에 따로 칭찬을 해 줘야겠지.

이런 멜도르를 제외하면 저택의 누구도 킬리언을 과하게 의식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그를 이 저택에 머무는 손님으로 대접했고, 킬리언은 이런 상황이 편한 듯 자주 풀어진 표정을 보여 주고는 했다.

‘정보 외우느라 고생깨나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요양하러 온 것 같네.’

그것도 딱히 나쁠 건 없었다. 큰일을 앞두고 컨디션 관리는 중요하니까.

그래서 킬리언을 조금 더 장기적으로 이 저택에 머물게 할까 고민이 깊어졌다. 그러던 중 딱 일주일이 되는 오늘, 이번에는 스티아가 비장한 얼굴을 한 채 내 침실을 찾아왔다.

“벨라디 님.”

늦은 밤이라 잘 준비를 마치고 소파에서 마지막 서류 검토를 하던 난, 한 발자국 물러서서 대기하는 스티아를 바라봤다.

그녀가 내 부름도 없이 이 시간에 찾아올 이유는 하나였다.

스티아의 안색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지만, 그래도 실시간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걸 알아 걱정이 들었다.

“한계니?”

짧은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면목 없습니다. 벨라디 님께서 더 긴 시간을 바라보고 계신 것은 알지만…….”

“아니야, 애초에 일주일을 계획하고 있었어. 넌 충분히 할 일을 다했다.”

난 격려의 말을 하며, 스티아를 살폈다.

그때 눈에 띄는 반응이 포착됐다. 언제나 공손한 자세의 스티아였는데,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움켜잡은 것이다.

“아닙니다, 벨라디 님.”

오빠인 제플린처럼……. 아니, 어떤 순간엔 제플린보다 더 무덤덤하던 스티아였다. 그런 그녀가 입술을 꾹 깨물며, 드물게 감정을 내보였다.

“사적인 감정 때문에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전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 말에 난 의문을 품고 되물었다.

“사적인 감정?”

스티아는 감시자들 중에서도 리더급의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가 감정적으로 흔들린다는 건 심각한 사안일 확률이 높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니, 스티아가 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병 안에 담긴 다홍빛 액체가 찰랑였다.

내가 그걸 받아 들자, 스티아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킬리언 황자궁 응접실에 배치된 찻잎을 추출한 용액입니다.”

“내게 보고도 없이 위험한 짓을 했구나.”

“죄송합니다. 오늘 예고 없이 일어난 일이라, 임의로 판단했습니다.”

“흐음, 알겠어.”

딱히 화가 나지는 않았다.

제플린도 스티아도 이런 첩자 노릇에 도가 튼 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주인의 허락 없이 급하게 일을 진행했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난 병에 담긴 액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추출된 성분은?”

“미약입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난 흔들던 병을 멈추고 시선을 스티아에게로 고정했다. 더 자세한 답변을 요구하는 내 눈빛에 그녀가 살짝 긴장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킬리언 황자의 궁에 갔을 때마다 오빠가 응접실에서 직접 차를 준비했습니다.”

그래, 나도 그 궁에 가 봐서 알고 있었다. 그의 응접실에는 주인이 직접 차를 우릴 수 있도록 작은 트레이가 준비되어 있지.

“오늘도 응접실에 배치된 차를 우렸고, 향을 맡은 순간 옅은 미약이 섞여 있음을 저도 오빠도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미약이라…….”

“혹시 그 외에 눈치 못 챈 불순물이 섞여 있을까 우려되어 찻잎을 빼돌려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방금 결과가 나와 보고드리기 위해 찾아온 겁니다.”

“미약 외의 다른 건.”

“없었습니다. 미약의 효과도 그리 강력한 건 아닙니다.”

그 말에 난 유리병을 가만히 바라보다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정말…… 깜찍한 짓을 했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차는 킬리언이 우리지만, 그 찻잎은 킬리언 궁의 시종들이 준비했을 것이다. 킬리언의 표현을 빌려 표현하자면, ‘황태자의 끄나풀’ 말이다.

꼬리에 불과한 놈들이 윗선의 명령 없이 일을 꾸미지는 않았을 테니, 이 미약은 전부 황태자의 꿍꿍이일 확률이 높았다.

황태자의 속셈이 너무 뻔했다.

‘킬리언에게는 아직 결혼이라는 강력한 동맹 수단이 남아 있지.’

황태자는 어떻게든 이 패의 가치를 떨어트리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봤을 것이다. 이번 미약도 그 계략의 일종일 테고.

‘마침 힘없는 사생아로 위장한 스티아가 궁에 몇 번 방문했으니, 좋은 먹잇감으로 삼았나 보군.’

그동안 킬리언과 염문이 퍼진 여성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녀들이 킬리언과 티벤 후작의 연락책인 건 진작 들어 알고 있었다. 굳이 후작이 눈에 띄는 이들에게 은밀한 역할을 맡긴 건, 애초에 황자와의 루머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최소한 황태자가 쉽게 건들 수 없는 이들로 고른 거라 했어.’

그녀들 중에 사생아는 물론 평민도 섞여 있었기에, 스티아의 위장 신분이 딱히 이질적인 건 아니었다. 다만 내세울 게 없는 설정이 황태자의 구미를 당긴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놈들이 이번 수작질에 진심이 아니라는 것 정도?’

만약 오늘 킬리언의 발목을 붙잡을 셈이었으면, 쉽게 발각될 찻잎을 이용하지 않았을 테니까. 미약도 효과가 미미한 것으로 준비하지 않았을 테고.

그렇다고는 해도…….

‘아주 불쾌하단 말이야.’

일을 할 거면 확실히 하고, 아니면 시도나 하지 말지.

같잖은 짓으로 간만 보는 점에서 딱 놈의 수준이 보였다.

난 치밀어 오는 짜증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어쩐지 평소보다 더 화가 올라오는 게 의아했지만, 그래도 금방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감았던 눈을 뜨며, 스티아에게 물었다.

“차에 미약이 섞인 걸 안 후에는 어떻게 행동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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