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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76화 (77/197)

76.

간단한 식사 후, 깔끔하게 씻은 킬리언은 로버가 준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벨라디가 집무실에서 그를 기다린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로버를 따라가며, 킬리언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들뜬 걸 느꼈다.

‘내가 왜 이러지.’

어쩐지 발걸음이 가벼웠고, 조금만 방심을 풀면 저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올 것 같았다. 그만큼 벨라디를 보러 간다는 사실이 그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킬리언은 자신의 낯선 감정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했다.

‘아무래도 벨라디를 만날 때마다 강렬한 사건들을 마주해서 그런가.’

그녀를 처음 만났던 장소는 황궁의 겨울 연회. 그곳에서 킬리언은 벨라디에게 매혹이 통하지 않자 큰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두 번째 만남이었던 가주 회의에서는 케스퍼와 퍼델에게 역공을 날리는 모습이 통쾌했다. 거기에 그녀가 자신이 내민 손을 잡아 주었을 때, 묘한 벅참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남이었던 어제는…….

‘정말 여러모로 날 놀라게 했지.’

아이닝을 통해 정보를 주고받으며, 그녀가 남들보다 머리가 잘 굴러가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만큼 대범하고 추진력이 좋을 줄은 몰랐다.

‘날 이 저택에 불러내서 또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걸까.’

킬리언은 벨라디의 속내를 추측하며 즐거움을 느꼈다.

벨라디가 꾸민 일들은 대체적으로 그에게 유쾌함을 선사했다.

‘그래, 그래서 지금 기분이 좋은 거야.’

이렇게 결론을 내린 그는 이런저런 기대를 품으며 5층에 위치한 집무실에 도착했다. 앞서갔던 로버가 가볍게 노크를 했다.

“벨라디 님, 손님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와.”

벨라디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집사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선 킬리언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정오예요, 킬리언. 잠자리는 괜찮았나요?”

응접실 한쪽에 종이 뭉치가 산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힐끔 본 킬리언은 곧 단정한 미소를 지으며 벨라디의 인사에 답했다.

“덕분에 푹 쉴 수 있었습니다. 대신 저녁 식사 자리에 나가지 못한 무례를 저질렀네요. 미안해요, 벨라디.”

“아니에요, 킬리언. 휴식은 중요하죠.”

그렇게 말한 벨라디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쌓인 종이 뭉치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맨 윗면을 턱 치며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당신은 오늘부터 이것들을 전부 암기해야 하니까요.”

예상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방금 생각하긴 했다.

그러나 지금 저 말은 정말 예상치 못한 말이라, 킬리언의 입에서 어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

그 모습에 그녀가 소리 내 웃었다. 호쾌한 웃음소리가 집무실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킬리언이 미처 자각하지 못한 사실 하나.

그는 언제부턴가 벨라디의 환한 미소를 마주하면, 머릿속이 하얘지고는 했다.

마치 지금처럼.

***

봄 햇살이 내리쬐는 집무실.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책상에서 쉴 틈 없이 서류를 체크하던 난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응접실 소파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킬리언과 눈이 마주쳤다.

난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다 읽었나요?”

내 말에 킬리언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제본된 종이가 들려 있었다. 소파 앞 티 테이블 위에는 그런 종이 뭉치가 과장 조금 보태서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전부 킬리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원작의 정보들을 엄선해, 감시자들의 보고서와 함께 정리한 것들이었다.

뭐, 사실 저렇게 많이 작성할 생각은 없었지만…….

‘정리하다 보니 욕심이 생겼달까.’

자료가 워낙 많으니 그가 벌써 다 읽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냥 눈이 마주쳐서 예의상 한 질문이었는데, 종이를 보던 그는 방긋 웃으며 답했다.

“예, 정리가 잘되어 있어서 중요한 건 바로 외웠어요.”

그 말에 난 놀라움을 얼굴에 내비칠 뻔했다.

‘외웠다고?’

이 단시간에?

그가 내 집무실에 들어오고 이제 겨우 세 시간이 지났다. 그 안에 저걸 전부 읽은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암기까지 했단 말이야?

살짝 의구심이 든 난 들고 있던 만년필로 책상을 툭툭 치다가 입을 열었다.

“황태자의 보좌관 중 당신이 가장 먼저 포섭해야 할 이의 이름은?”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킬리언의 답은 막힘없이 나왔다.

“아넌 마치니. 29살. 마치니 남작가의 셋째 아들.”

“왜 그를 포섭해야 할까요?”

“그가 형님의 보좌관들 중 유일하게 수도와 남부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죠.”

“아넌에 대한 주변의 평판은?”

“할 말은 반드시 해야 하는 올곧은 성격.”

시험하는 듯한 내 질문에 킬리언이 즐겁다는 듯 웃었다.

그는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티 테이블 위, 종이 산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덕분에 윗선에 밉보여 3년째 제대로 된 업무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에요. 표면적으로는.”

그 여유로운 태도에 나 역시 몸을 살짝 앞으로 숙였다. 그러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가 업무에서 배척된 진짜 이유는 뭘까요?”

그가 깔끔하게 답했다.

“아넌은 사실 마치니 가문에 입양된 평민이니까.”

‘역시.’

어제 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킬리언이 능력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아넌 마치니에 관한 건 내가 중요하다고 별표를 치긴 했다. 그렇다고 아무나 처음 본 정보를 저리 자연스럽게 머리에 넣을 수는 없었다.

‘괜히 마갈라 제국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이 아니었어.’

심지어 그때는 정령을 찾아 헤맬 때이니, 더 열악한 환경이었을 텐데 말이야.

원래 목표는 제플린과 스티아가 버텨 줄 일주일 동안 최소한 아넌에 대한 것만이라도 외우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속도라면, 저기에 쌓인 정보들을 전부 암기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욕심내길 잘했네.’

“완벽해요, 킬리언.”

“감사합니다, 벨라디.”

난 후후 웃으며, 킬리언이 말한 ‘아넌 마치니’에 대해 생각했다.

그에 대한 한 줄 평은 이렇다.

‘원작에서 킬리언 황자가 등장하면 세트로 따라붙었던 캐릭터.’

그는 마치니 영지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듣던 영재다. 그 영특함을 기특히 본 마치니 남작은 아넌을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그러다 킬리언의 눈에 들어 그의 최측근이 되었다는 설정이었지.’

그러나 이번에는 킬리언이 마갈라 제국으로 강제 유학을 떠났으니, 둘이 마주칠 리 없었다. 그래서 난 아넌이 마치니 영지의 관리 일이나 하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엉뚱하게 황태자의 보좌관이 되었다는 조사 보고서를 받았을 때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안 봐도 뻔해.’

황태자가 뭔가 술수를 써서 그를 가로챘겠지.

그렇게 남의 인재를 자기 사람으로 삼았으면 활용이라도 잘하든가. 아까 킬리언이 대답했던 것처럼 황태자는 그 뛰어난 인력을 그저 방치하는 중이었다.

그럴 거면 도대체 왜 본인이 손수 마치니 영지에 가서 아넌을 데리고 갔을까.

‘뭐, 이쪽으로서는 잘된 일이지만.’

아넌이 처음 황궁에 왔을 때는 의욕 넘쳤다고 들었다. 황태자가 직접 데리고 온 인재라는 타이틀 덕에 모두의 주목을 받았고, 그 역시 황태자의 곁에 딱 달라붙어 여러 조언들을 했다고 하니까.

그러나 얼마 안 가, 황태자는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대는 너무 말이 많아.

황태자의 말은 여파가 컸다.

그 한마디로 아넌은 즉시 황태자파 귀족들에게 내쳐졌고, 여러 회의에서도 발언권을 잃었다. 그것도 모자라 같은 보좌관들이 그에게 정보를 공유하지 않아 여러 번 주요 정책들에서 자리를 빼앗겼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게 된 거지.’

그리고 회유는 원래,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에게 더 잘 먹히는 법 아니겠어?

난 생각에서 빠져나와 킬리언을 응시했다.

사실 어제 킬리언이 보여 준 불안정한 상태 때문에 살짝 불안하긴 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어제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소파에 앉은 자세는 예법의 정석처럼 가지런했고, 풍기는 분위기는 무척 여유롭고 안정적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자기 집 안방에 있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저 모습을 보니, 굳이 걱정할 필요 없겠어.’

킬리언이라면 충분히 아넌을 자기편으로 만들 것이다. 내가 그의 손을 잡게 만든 것처럼.

그렇게 되면 더 이상 황궁에서 잠도 자지 못한 채 불안해하지 않겠지.

흡족한 미소를 짓는데, 킬리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런데…… 이 정보들은 벨라디가 직접 작성한 건가요?”

그 물음에 난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런 걸 누구에게 부탁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렇게 대답한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제게 부탁했던 형님의 최측근에 대한 정보만으로 여기까지 알아낸 건가요? 그때 분명 이름과 간단한 신상만 알려 드렸던 것 같은데.”

“그것만으로 충분하죠.”

내 대답에 킬리언은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긴, 그가 놀랄 만했다. 저 종이 뭉텅이에는 아넌 마치니뿐만 아니라, 그가 이름을 알려 준 황태자의 최측근들에 대한 고급 정보가 모조리 적혀 있었으니까.

황태자궁의 시종장, 황실 근위 기사 단장, 황궁 마법 기록 시스템을 관리하는 마법사 기타 등등.

‘황족에 대해 조사하는 게 어렵지, 황궁에서 일하는 관리들을 조사하는 건 어렵지 않거든.’

우리 가문의 감시자들이 그 정도 능력은 되니까. 거기에 나 역시, 감시자들이 물고 온 정보를 훌륭히 정리할 능력이 되고.

‘이게 진정한 시너지 아니겠어?’

이런 우리의 영향력을 전혀 모를 킬리언은 신기한 듯 제본된 종이를 바라봤다. 언뜻 그의 입에서 ‘저걸 전부 다? 어떻게?’ 이런 혼잣말이 나오기도 했다.

사실 나도 조금 놀랐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킬리언은 내가 인정할 만큼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했다.

물론 어제 흔들린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하루 푹 쉬었으니 다시 가드를 단단히 세웠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놀라긴 해도, 내가 눈치챌 정도로 티 내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킬리언은 아까부터 표정이 꽤 풍부했다.

“정말 대단하네요, 벨라디.”

순수하게 감탄하는 그를 보자 웃음이 조금 나왔다.

‘내게는 경계심을 조금 낮춘 건가.’

그래,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긍정적인 변화라고 판단하며 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죠?”

“알려 주실 건가요?”

그 말에 난 턱을 괴고 짓궂게 물었다.

“이걸 알면 킬리언 당신은 이제 꼼짝없이 우리 저택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저 농담으로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대답하는 킬리언의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

“그것도 괜찮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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