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드디어 잠을 자서 그런가.’
애초에 킬리언은 잠을 자지 않는 것에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카데미 재학 시절, 정령과 계약을 하기 위해 밤새 마갈라 제국의 오지를 헤매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아무리 잠이 없다고 해도, 킬리언에게 황궁에서의 몇 개월은 숨 막힐 듯 무거운 시간이었다.
분명 아이닝 덕분에 몸은 아카데미 시절보다 멀쩡했다. 피곤함을 느끼지도 못했고, 육체적으로 무리가 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이들 사이에 있다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그들은 킬리언의 일상 곳곳에 침투해 있었고, 모두가 휴식을 취해야 할 밤에도 스스럼없이 그의 방에 침입했다.
‘그놈들을 잡아서 벌을 내려도 그 순간뿐. 다시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어.’
심지어 이 소동은 소문도 만들어지지 않은 채 조용히 지나갔다.
황태자의 유능한 수하들이 모든 걸 처리했기 때문이다. 마치 대비라도 했던 것처럼.
그때 킬리언은 자신이 적진의 한가운데에 봉쇄되었음을 뼈저리게 자각했다.
‘그래, 데커딜 제국으로 돌아오면서 각오했던 일이었지.’
그러나 그걸 자각한 순간, 예상보다 더한 무기력감이 그를 덮쳤다. 그래서 잠시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고민도 했었다.
곧 그만두었지만.
킬리언은 기나긴 세월 눈치를 보며 살았고, 덕분에 사람을 관찰하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그가 살펴본 황제는 머나먼 타국에서 장성해 돌아온 아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자식이라고는 자신의 옆을 든든히 지켜 온 황태자 퍼델과, 사랑하는 여인이 낳은 어린 황녀 헤라뿐이었다.
애초에 킬리언이 머무는 궁의 모든 것들을 퍼델에게 준비하라 지시한 이도 황제이니, 도움을 요청해도 무언가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차라리 놈들의 목표가 단순히 어머니의 다이아몬드를 찾는 것이라면…….’
그러면 더 나았다. 킬리언이 이리 예민하게 반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그 다이아는 절대 찾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 애써 무시하고 지내면 그만이지. 하지만 그들은 다이아몬드 외에도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건 겨울의 추위가 서서히 누그러지던 날, 그가 깜박 잠이 든 밤에 일어난 일이었다.
잠시 숙면에 빠졌던 킬리언은 아이닝의 다급한 외침에 눈을 떴다.
-킬리언! 일어나!
머릿속에 울리는 정령의 공명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동시에 그는 방에 낯선 향기가 감도는 것을 느꼈다.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다. 향기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곧 머리맡 협탁에서 처음 보는 향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느새 소환된 아이닝이 그 향초에 붙은 불을 꺼 버렸다.
-불길해…….
그러고는 킬리언의 품에 안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닝이 스스로 나타났다는 것은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의미했다. 킬리언은 경계를 조금 풀며 자신의 작은 정령을 진정시켰다. 그러며 향초를 살폈다.
백화점에서 귀족들이 가장 흔하게 사들이는 고가 브랜드의 향초였다. 냄새 역시 그저 라벤더 향기에 불과했다.
향초에는 어떠한 마력도, 다른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닝은 향초를 보기도 싫은 듯 킬리언에게 응석을 부렸다.
-킬리어언, 그거 빨리 버려. 아이닝이 태워 줄까? 재도 남지 않게 태울까?
그 말에 킬리언은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아이닝, 뭐가 불길한지 설명할 수 있겠어?
-미안, 킬리언. 나도 느낌뿐이라 잘 모르겠지만……. 무척 불길한 물건인 건 틀림없어!
자연의 순수함을 가지고 있는 정령의 직감은 아주 매서웠다.
정령이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것에는 전부 이유가 있었다.
-혹시 이걸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봤니?
이번에는 아이닝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킬리언에게 꽃을 선물했던 아이들 중 한 명이 놓았어!
그 말에 킬리언은 깊이 탄식했다.
아이닝이 말하는 아이들은 황궁 시종들의 심부름을 드는 하녀였다.
아직 어린 하녀들은 킬리언이 굳이 매혹을 사용하지 않아도 그의 수려한 외모와 목소리에 호감을 품었다. 그래서 매일 돌아가며 그의 책상에 싱그러운 생화를 장식하고는 했다.
‘그런 아이들이 무언가 알고 이 향초를 놓았을 리 없어.’
아마, 황태자의 끄나풀이 시킨 일이겠지.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었을 때 모든 죄를 뒤집어쓸 꼬리로 사용하기 위해서.
다정한 킬리언은 자신을 동경하는 소녀들을 탓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이 일을 함구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자신을 찾아온 웨일 남작 부인에게 향초를 맡겼다. 남편과 사별 후, 킬리언과 연애 중이라 소문이 난 부인이었다.
-이 향초를 조사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각하께 전달하겠습니다.
뜨거운 소문과 대비되게 킬리언과 웨일 남작 부인은 무척이나 사무적인 얼굴이었다.
사실 부인을 비롯해 킬리언과 염문이 난 여성들은 전부 킬리언의 외가인 동부의 티벤 후작이 심은 첩자였다.
킬리언을 향한 감시가 유일하게 낮아지는 때가 있었는데, 바로 바람둥이로 널리 알려진 그가 여자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킬리언은 이걸 놓치지 않고 티벤 후작과의 연락책으로 삼았다. 이 연락책들은 황궁에서 킬리언이 일을 맡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력이기도 했다.
시종들의 눈을 속일 평범한 향초는 벨라디의 도움을 받았다. 이렇게 일을 수습하긴 했지만 킬리언은 그날 이후 경계를 놓을 수 없었다.
다이아몬드를 찾는 것 외에 퍼델이 꾸미고 있는 속내는 무엇인가. 그걸 확신하기 전까지는 잠들 수 없었고, 아이닝의 도움으로 버텼다.
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육체가 아닌, 정신이 온전하지 않게 될 수 있다는 아이닝의 경고.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킬리언의 신경은 예민해졌고 쓸데없는 생각과 망상들이 그를 괴롭혔다.
마갈라 제국에서 느꼈던 외로움, 사무치는 무력함. 퍼델을 꺾을 수 있다고 호기롭게 돌아온 과거의 자신이 너무 멍청하게 느껴졌다.
잡생각이 많아질수록 그냥 다 포기하고 싶어졌다.
퍼델이 황후를 죽였다지만, 킬리언에게도 황후는 다정한 어미가 아니었다. 간직할 추억 하나 없는 어머니를 위해 자신을 이렇게 갉아먹을 필요가 있을까?
그럴 때마다 킬리언은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잠 좀 자지 않았다고 이렇게 나약해지는 자신이 싫었고, 어머니에게 큰 죄책감까지 느꼈다.
‘정신 차리자. 이 복수만이 지금 내가 살아 숨 쉬는 유일한 이유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극단적으로 몰았다. 사실 퍼델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든 벽에 압박감을 느끼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걸 입 밖으로 내뱉었던 순간.
거침없이 그 벽을 꿰뚫고 멱살을 낚아채 준 이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사고의 흐름을 끊듯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로버입니다. 혹시 일어나셨습니까?”
그 말에 킬리언은 눈을 가렸던 손을 치웠다.
“들어오게.”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앨턴 공작가의 집사라던 남성이 조심스럽게 방에 들어왔다.
킬리언은 상체를 일으키며 물었다.
“지금 몇 시지?”
“점심 무렵입니다. 저녁도 드시지 않고 주무셔서 시장하실까, 간단한 식사를 준비해 왔습니다.”
“그래, 고맙네.”
때마침 배가 고팠다. 몇 개월 만에 취한 단잠으로 잊고 있던 식욕이 돌아온 느낌이었다.
킬리언의 말이 끝나자 집사 뒤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침대에서 먹을 수 있게 베드 트레이와 음식을 준비했다.
킬리언은 그걸 보며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제 이불을 덮고 잤던가?’
입고 있는 옷은 어제 외출복 그대로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재킷을 벗고, 침대에 앉아 아이닝을 소환한 후 그대로 쓰러지듯 잠들었으니까.
혹시 자는 와중에 스스로 이불을 덮은 건가?
그때 하녀 몇이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방 안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킬리언은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이불은 그렇다 치고……. 내가 커튼도 쳤나?’
어제 저 집사가 이 방을 소개하며 커튼을 열고 창 너머 정원을 보여 줬던 기억은 있다. 그 후 본인이 치지 않았으니, 커튼은 그대로여야 하는데…….
자신이 잠든 사이 누군가 방에 들어오는 것에 민감한 킬리언이었다.
벨라디를 믿으니, 이곳 하인들은 그럴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그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어젯밤에 누가 내 방에 들어왔나?”
단정하게 웃으며 말하는 목소리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누구도 그 목소리 너머에 초조함이 담겨 있는 걸 몰랐다.
집사, 로버도 방긋 웃으며 공손히 답했다.
“저녁 식사 준비가 끝나고 벨라디 님이 한 번 들르셨습니다.”
“벨라디가……? 그 외에는 아무도 안 들어온 건가?”
“예, 벨라디 님만 손님분이 걱정되어 잠시 들어가신 걸로 압니다.”
타인이 들어왔다는 생각만 해도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킬리언이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 상대가 벨라디라는 말을 듣자마자 킬리언은 마음속 깊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 벨라디가 왔다 간 거구나.’
하긴, 주인으로서 손님이 식사 초대에 나오지 않으면 당연히 걱정되지.
‘그럼 커튼과 이불도 벨라디가 봐 준 걸까?’
그 광경을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자연 친화력 보충을 위해 사막으로 돌아간 아이닝이 들으면 펄쩍펄쩍 뛰며 울먹일 생각이었다.
커튼은 벨라디가 친 것이 맞았지만 이불은 자신의 여린 계약자가 혹시 추울까, 아이닝이 조그마한 몸을 끙끙거리며 겨우 덮어 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목 끝까지 꼼꼼하게 말이다.
하지만 그걸 알 길이 없으니, 킬리언은 그저 키득 웃을 뿐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동적으로 벨라디와 나눈 대화가 재생됐다.
-킬리언, ‘나’라는 무기는 그런 것에 특화돼 있어요. 상대가 황태자라고 해도, 약점만 잡으면 언제든 뒤흔들 준비가 돼 있답니다.
킬리언에게 짙은 패배감을 선사하는 퍼델을 그렇게 쉽게 말하는 점이 참 신기했다.
그 자신감이 대단하기도 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것뿐인데, 킬리언은 벨라디가 너무나 든든하게 느껴졌다.
‘내 무기라.’
그리고 자신 역시 그녀의 무기라 이 말이지.
참 마음에 드는 관계라고, 킬리언은 조용히 곱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