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넌 돌아가 있어. 내가 들어갈 테니.”
“알겠습니다.”
로버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인 후, 자리를 피했다.
난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에밀리를 부를 수고는 덜었네.’
문을 열어 보니 사용인들을 시켜 단정히 정리한 손님방이 보였다.
불은 전부 꺼져 있었고, 커튼이 열린 테라스 창 너머로 푸르무레한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 방은 유달리 채광이 좋아 달빛만으로도 사물의 윤곽이 전부 눈에 들어왔다.
난 천천히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킬리언?”
그의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다가가 보았으나 여전히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킬리언은 눈을 감고 미동도 없이 쓰러진 상태였다. 이불도 제대로 덮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혹시라도 그가 아픈 걸까 걱정이 되었다.
“킬리언, 잠시 실례할게요.”
그가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예의상 그렇게 말하며 이마에 손을 올려 보고 코 아래에 검지를 대기도 했다.
숨결도 고르고, 체온도 정상이었다. 무엇보다 너무 평온해 보이는 모습에 난 옅게 한숨을 쉬었다.
‘그냥 잠든 거네.’
예정보다 켄뉴브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지체된 탓에 평소보다 저녁 식사가 늦게 준비되기는 했다. 그래도 잠들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이었다.
“벨라디이!”
이불 안에서 흰 무언가가 폴짝 내 품으로 뛰어 올라왔다.
아이닝이었다.
“아이닝? 네가 어떻게?”
“킬리언이 나 부르고 바로 잠들었어! 피곤했나 봐!”
아이닝은 그렇게 말하며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었다.
난 그런 정령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킬리언 옆, 침대 빈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아이닝이 내 품에서 나와 잠든 킬리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솜방망이 같은 손으로 그의 뺨을 토닥였다.
“킬리언이 드디어 잘 수 있어서 다행이야. 자장자장.”
아이닝의 손짓에 킬리언의 뺨이 꾸욱꾸욱 눌렸다.
그걸 가만히 보던 난 아이닝 쪽으로 더 다가가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재운 거니?”
내 물음에 아이닝은 고개를 휙휙 젓더니, 눈을 감은 킬리언을 빼꼼히 바라보았다.
“킬리언이 당분간 벨라디 집에서 생활하게 됐다고 말한 다음, 스르륵 잠들었어!”
“갑자기?”
무슨 수면제를 먹은 것도 아니고, 이렇게 잠이 든다고?
내 물음에 아이닝이 고개를 돌려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킬리언은 데커딜 제국으로 돌아온 후부터 계속 깨어 있었거든!”
그러고는 제자리에서 폴짝 뛰며 말을 덧붙였다.
“밤마다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 방에 들어와서 잠들 수 없다고 그랬어!”
그 말에 난 작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황태자가 킬리언이 잠든 사이에도 시종들을 시켜 방을 뒤진 모양이었다. 그걸 눈치챈 킬리언은 쉽사리 잠들지 못했던 것이고.
‘방을 뒤진 시종들을 처벌하려고 해도, 황태자가 뒷배로 있으니 여의치 않았겠지.’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이었다.
성질 급한 황태자의 성격상, 그렇게 킬리언이 의심되면 그냥 내쳐 버리면 그만일 텐데. 왜 황궁에 고이 놔두며 우애 좋은 형제인 척하는 건지…….
문득, 일전에 킬리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게 대공의 지위를 줄 테니, 자신을 도우라고 지시했으니까요. 아직은 저를 말 잘 듣고, 착한 동생으로 여기는 모양이죠.
‘설마, 정말로 킬리언을 자신의 수족으로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황후의 마법 다이아몬드를 킬리언이 가지고 있다 확신하면서?
황후가 그걸 넘겼을 때, 킬리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 리 없잖아.
‘도대체 황태자의 꿍꿍이는 뭐야?’
황태자를 끌어내리는 것보다도 그게 더 마음에 걸렸다.
그가 정령의 마법으로 정확히 뭘 바꾼 건지. 그리고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원작이 뒤틀린 건 전부 황태자와 관련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내 빙의까지 연관돼 있는 건가?
이것들을 전부 간파하기 전까지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게 현명했다.
마침 황태자를 우습게 봤다가 뒤통수까지 맞았으니.
‘이를 계기로 더 철저히 준비해야지.’
덤으로, 당한 건 배로 갚아 주고 말이야.
그렇게 다짐하며, 초점을 킬리언에게로 돌렸다.
킬리언이 이곳으로 돌아온 지 벌써 두 계절이 다 지나간다. 아이닝의 말이 맞는다면, 그 몇 개월 동안 계속 밤을 새웠다는 건데…….
“그럼 육체적으로 버틸 수 없지 않나?”
난 그렇게 중얼거리며 킬리언의 얼굴을 관찰했다.
달빛에 드러난 그의 얼굴은 수채 물감으로 옅게 칠해진 한 폭의 명화 같았다. 다른 말로, 불면에 의한 수척함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못해도 다크서클은 내려와야 정상 아니야?”
내가 중얼거린 것을 들은 듯, 아이닝이 해맑게 외쳤다.
“그래서 아이닝이 킬리언을 보호했어! 아이닝이랑 킬리언의 몸을 연결해서 잠을 안 자도 괜찮게 했어!”
“그런 게 가능해?”
“응! 그렇게 하면 계약자가 아무런 피로도 못 느낀다고 다른 정령들이 말해 줬거든!”
이건 또 새로운 정보였다.
“정령과 계약하면 잠을 자지 않아도 된다, 이 말이지?”
“그래도 너무 자주 그러면 안 된대. 몸은 괜찮아도, 잠들지 못하면 정신적으로 힘들다고 그랬어.”
그 말에 마차에서 불안함을 보이던 킬리언이 떠올랐다.
나와 자신의 처지를 비교했기 때문도 있지만, 잠을 자지 못해 신경이 예민해진 것도 한몫했던 듯싶었다.
‘하긴 24시간 언제나 자신을 감시하는 이들과 생활하는데 편할 리가 없지.’
더군다나 복수하고 싶은 대상이 바로 옆에 있으면 더욱 힘들고 초조할 것이다. 그런 상황은 나라도 사양이었다.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더 벼랑 끝에 몰려 있는 모양이야.’
그때 아이닝이 킬리언의 배 위로 올라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누웠다.
편안한 자세를 취한 아이닝이 웅얼거렸다.
“그래서 킬리언이 잘 수 있어 다행이야. 여기가 마음 편한가 봐.”
“……그래, 다행이네.”
세상 모르게 잠든 킬리언을 보며, 순간 여러 생각들이 뒤섞였다.
킬리언에 대한 동정, 정령의 새로운 쓰임새, 앞으로 그에게 알려 줘야 할 정보들.
그의 붉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흐트러져 있었다. 난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 머리카락들을 정리해 줬다.
내 손가락 끝과 킬리언의 이마가 부드럽게 스쳤다. 감촉 때문인지 킬리언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난 그런 그에게 다정히 속삭였다.
“괜찮으니 더 자요, 킬리언.”
내 말을 듣기라도 한 걸까. 그는 이내 미간을 펴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난 고개를 기울였다.
‘곤란하네.’
복잡하게 엉킨 생각들 틈에서 제일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뿌듯함이었다.
언제나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던 사내가 내 옆에서 모든 걸 잊고 잠든 모습이…… 꼭 나를 의지하는 것 같아 내게 묘한 만족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누군가 날 의지했던 때가 있었나.’
전생에서는 그저 가족들에게 헌신만 했고, 현생에서는 언제나 존재감 없던 인생이었다. 최근에서야 날 따르는 수하들이 생겼다지만, 의지와 충성은 의미가 사뭇 달랐다.
모스틴과 시온도 서로를 의지한다기보다는 즐거움과 추억을 공유하는 사이에 가까웠고.
‘그러니까…….’
난 킬리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던 손을 내려 그의 뺨을 톡 건드렸다. 방금 아이닝이 했던 것처럼.
그의 뺨은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보들보들한 촉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여기서라도 쉬게 둬야지.”
난 일부러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에게 안식처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킬리언이 은혜를 입을수록 내가 그의 도움을 받는 것도 수월해질 테니까.
‘하지만 잊지 마. 너무 과한 연민은 일을 그르친다, 벨라디 앨턴.’
난 그렇게 냉소적인 생각을 하며 나 자신을 타일렀다.
킬리언에게 잘난 듯 떠들었지만, 내가 부숴야 할 벽은 아직 두껍고 까마득했다.
그게 두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킬리언과 계획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건 피하고 싶었다.
‘내 통제에서 벗어나는 감정 따위, 절대 용납 못 해.’
난 그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똬리를 틀었던 아이닝이 날 올려다봤다.
“벌써 가려구?”
“그래, 킬리언의 상태를 보니 당분간은 일어나지 못할 것 같네.”
그렇게 말하며 난 테라스 쪽으로 다가갔다. 커튼을 치자, 달빛마저 차단되며 어둠이 내렸다.
“오늘은 이렇게 놔두는 게 낫겠다. 좋은 밤 보내, 아이닝.”
“응! 안녕, 벨라디.”
난 아이닝의 인사에 뒤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왔다.
달칵-.
문이 완전히 닫혔다.
달빛만으로 윤곽을 비추던 그 방과 다르게 복도는 마법 전등의 빛으로 시야가 또렷했다. 그걸 보자 술렁이던 감정들이 깔끔히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이게 맞는 거지.’
난 킬리언에게 호감 가는 좋은 사람이 되고, 킬리언 역시 나에게 신뢰할 수 있는 이로 남고.
‘그렇게 담백한 협력 관계가 우리에게는 어울려.’
그렇게 홀로 결정을 내린 난 망설임 없이 킬리언에게서 멀어졌다.
***
킬리언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 왔던 두통이 사라진 걸 느꼈다.
그는 낯선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명…….’
벨라디 덕분에 자신을 감시하던 끄나풀에게서 벗어나 앨턴 공작가의 저택으로 들어온 것까지는 기억났다. 그리고 공작가의 집사에게 앞으로 머물 방을 안내받은 후, 습관처럼 아이닝을 소환했다.
그 이후로는 암전.
킬리언은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커튼이 쳐져 있었지만, 그걸 뚫고 들어온 햇빛이 방 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설마 그대로 잠든 건가?’
킬리언은 방으로 안내받기 전 벨라디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녁 식사 준비가 끝나면 식당으로 부를게요.
그는 한 손으로 두 눈을 가리며 신음했다.
“이런…….”
저택의 주인이 초대한 손님을 식사 자리에 초대하는 건 기본 예의였다. 당연히 손님도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했고.
하지만 킬리언의 머리에 같이 식사를 한 기억은 없으니. 의도치 않게 주인의 초대를 무시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군.’
그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벨라디를 만나면 바로 사과해야겠어.’
그러나 곤란한 마음과는 다르게 그의 몸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