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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73화 (74/197)

73.

그 표정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내 귓가에 익숙한 외침이 들렸다.

“누나!”

2층 난간을 붙잡고 있는 멜도르였다.

놈은 한달음에 계단을 내려오더니 이곳까지 달려왔다. 그러고는 인상을 팍 쓰며 킬리언을 노려봤다.

“뭡니까? 지금 우리 누나랑 얼굴이 너무 가까운 거 아닙니까?”

“아…….”

확실히 멜도르의 말처럼 우리는 상당히 붙어 있었다. 애초에 내 키가 컸고, 거기에 굽을 신은 덕에 눈높이가 비슷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고개를 조금만 더 돌리면 서로의 숨결이 섞일 만한 거리였다.

킬리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한 걸음 내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조금 당황이 섞인 목소리로 내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벨라디. 제가 거리감을 재지 못했습니다.”

“사과할 필요 없어요, 킬리언. 그만큼 우리가 친해진 거니까.”

난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말에 킬리언의 표정이 다시 묘하게 변했다.

동시에 멜도르가 중얼거렸다.

“나한테도 저렇게 안 웃어 주는데……!”

멜도르는 충격받은 표정을 하더니, 내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러고는 삐뚤어진 눈으로 킬리언을 훑어봤다.

“검 배웠습니까?”

갑자기 들이민 질문에 킬리언은 잠시 멈칫하다 특유의 단정한 미소를 지었다.

“기본적인 건 배웠습니다.”

“그래, 몸을 보니 딱 기본만 한 것 같더라.”

멜도르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대놓고 킬리언을 휙휙 살펴봤다.

그러더니 미간을 찡그리며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아글라 공자한테도, 모스틴 프레도한테도 그런 미소 안 지어 주면서……. 저 작자가 뭐라고…….”

쟤는 또 왜 저럴까.

일단 멜도르는 무시하고, 난 킬리언에게 시선을 돌린 채 말했다.

“방으로 가서 조금 쉬어요. 저녁 식사 준비가 끝나면 식당으로 부를게요. 필요한 건 언제든 집사나 하인에게 말하고.”

내 말에 킬리언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며칠 실례하겠습니다.”

우리의 대화가 끝나자 로버가 킬리언을 준비한 손님방으로 안내했다.

난 움직이지 않고 멀어지는 둘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자 옆에 있던 멜도르가 힐끔 내 눈치를 살폈다.

“누나?”

그 말에 난 천천히 고개를 내려 멜도르와 시선을 마주했다.

자기 잘못은 아는지, 멜도르가 슬쩍 눈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난 그런 놈을 보며 입을 열었다.

“굳이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저 손님이 누군지 다 알았을 텐데.”

“…….”

“그런데 그렇게 무례하게 굴면, 내 체면이 어떻게 될까?”

내 말에 멜도르가 인상을 쓰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쳇, 몰라. 저 작자가 황자든 말든, 지금은 그냥 우리 저택에 체류하는 손님이니까. 난 그렇게 대할 거야.”

“멜도르 앨턴.”

“자기 집도 번듯이 있으면서 왜 여기서 자고 가는 거래? 가뜩이나 소문도 안 좋은데. 마음에 안 들어.”

‘그래, 저 성격이 어디 가지 않지.’

내게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고 해서 멜도르가 갑자기 착해질 리 없었다. 나를 대하는 태도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변했지만, 까탈스러운 성질은 여전했다.

그래도 나름 선을 배웠다고, 멜도르는 슬쩍 날 보더니 조심스럽게 투덜거렸다.

“그래도 존댓말은 썼잖아.”

난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멜도르를 주시했다.

내 시선에 놈은 잠시 버티다 이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으으, 알겠어. 도 넘는 행동은 하지 않을게.”

그 모습에 난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건 원작과 똑같아졌네.’

멜도르는 형의 결정에 불만이 생겨도 저렇게 툴툴거리며 곧잘 따랐다.

난 평생 그런 모습은 못 보겠구나, 싶었는데.

이렇게 놈이 변한 모습을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살짝 유해졌다. 난 놈의 머리를 한 번 헝클이고 자리를 떴다.

“잘해.”

그렇게 걸으니, 뒤에서 멜도르가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우씨, 이제는 저런 것도 멋있어.”

쟤도 참 중증이었다.

***

저녁 식사가 다 준비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잠시 업무를 보던 난 식당으로 향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며 스티아에게 물었다.

“킬리언은 불렀니?”

“집사님이 말을 전하러 가셨습니다.”

그럼 곧 나오겠네.

난 5층 집무실에서 나와 식당이 있는 1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중에 멜도르와 마주쳤다. 멜도르는 나와 나란히 걸으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는 정말 보고하지 않을 거야?”

난 멜도르가 무슨 의미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면서 모르는 척 물었다.

“뭐를?”

내 되물음에 멜도르가 한층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저택에 손님을 받아들인 거. 잠깐 초대하는 거라면 몰라도, 며칠 머물게 하는 거면 말하는 게 낫지 않아?”

게다가 손님의 신분도 신분이고. 멜도르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난 멜도르에게서 눈을 떼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덫을 놓으려고.”

“……덫?”

“잡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원래 덫은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정공법만으로 맞서기에는 상대가 워낙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꾸준히 타이밍만 보고 있었는데, 킬리언을 이 저택에 들이면서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니 더더욱 아버지께 알리면 안 되지.’

“생각해 둔 바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

내 말에 멜도르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나도 모르는 척할게.”

그 대답에 힐끔 멜도르를 내려다봤다.

놈은 계속 날 보고 있었는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아이의 표정이 결연하고 뿌듯해 보였다.

그걸 보며 난 입가에 진한 미소를 그려 넣었다.

‘말 잘 듣네.’

표정을 보니, 이걸 일종의 비밀 임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뭐, 따지자면 맞는 말이었다. 멜도르를 비롯한 이 저택의 모든 이가 아버지께 오늘 일을 함구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도록 두는 편이 멜도르의 의욕도 자극하는 모양이고.’

그래서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식당에 도착했다. 직사각형의 테이블에는 다양한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멜도르가 자신의 자리에 앉고, 난 상석에 앉았다. 원래 상석은 아버지의 자리지만 지금은 내가 그 대신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킬리언은 아직인가.’

내 왼쪽에 준비해 둔 손님석을 보는데, 마침 식당 문이 열리며 로버가 들어왔다.

그런데 그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지?’

내 의문을 해소해 주기 위해 로버가 한달음에 다가왔다.

“벨라디 님.”

“무슨 일이지?”

“그게……. 손님의 방 문을 두드렸는데, 계속 대답이 없습니다.”

뜻밖의 보고에 나는 눈썹을 까딱였다.

“대답이 없어?”

“예. 그렇다고 허락 없이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 일단 보고하러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로버의 태도가 한층 조심스러웠다.

그걸 보아하니 이놈도 손님의 정체가 누구인지 단번에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래, 그랬으면 평소처럼 행동하기 어려웠겠지.’

만약 킬리언이 평범한 귀족이었다면 로버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문을 열고 들어갔을 것이다. 하인이라면 몰라도 우리 가문의 총집사에게 그 정도 권한은 있었다.

하지만 손님의 신분이 황족이다 보니, 아무리 공작가의 총집사라 할지라도 벌컥 문을 여는 행위는 부담이 됐을 터. 로버가 문 앞에서 얼마나 고민했을지 눈에 선했다.

‘어쩔 수 없네.’

난 흐트러진 치마를 정리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앉아 있던 멜도르가 따라서 일어났다.

“누나, 어디 가? 손님한테 뭐 문제 생겼대?”

“그래, 아무래도 내가 가 봐야겠어.”

난 그렇게 말하며 멜도르를 바라봤다.

“괜찮으니 너 먼저 먹고 있어.”

“으음…….”

내 말에 멜도르가 고민하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난 그런 놈에게 새삼스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뭘 고민하고 그래? 어차피 우리는 따로 먹는 게 더 익숙하잖아?”

“그렇지만……. 앞으로 누나랑 함께 식사하는 비중을 늘리려 했단 말이야.”

“어째서?”

“사이좋은 가족은 원래 그렇게 한다던데?”

어쩐지.

최근 멜도르가 유달리 내게 ‘밥 먹었어? 밥 먹을래?’ 이런 질문을 쏟아붓는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속셈이 있었나 보다.

난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가차 없이 말했다.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쓸데없는 거에 집착하지 마.”

“그래도…….”

“원래 네 식사 시간도 지났잖아. 배고프다며 하인들한테 성질내지 말고 그냥 먹어.”

신체적으로 한창 자랄 시기여서 그런가, 멜도르는 배가 고프면 평소보다 성격이 더 더러워졌다. 그래서 괜히 놈의 심통에 고생할 사용인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는데, 놈이 오히려 감동받은 눈빛을 보냈다.

“내 식사 시간을 알고 있었던 거야? 나한테 아예 관심이 없던 건 아니구나?”

저택의 모든 것이 내 통제하에 있어서 저절로 외워진 것뿐인데. 하지만 굳이 정정하는 것도 뭔가 우스워 그냥 놔두었다.

“알았으면 말 들어.”

“응, 누나!”

힘차게 대답한 멜도르가 자리에 앉았다.

난 그걸 보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식당을 나왔다. 그러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킬리언에게 내어 준 방으로 향했다.

그에게는 원활한 소통을 위해 일부러 내가 생활하는 2층의 방을 내어 준 참이었다. 거침없는 내 뒤를 로버가 헉헉거리며 따라왔다.

“베, 벨라디 님. 그런데 정말 손님분이 제가 생각하는 그분이 맞습니까?”

“왜? 그렇다면 아버지께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

내 되물음에 로버가 휙휙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전부 계획이 있으신 거겠죠. 전 벨라디 님을 믿습니다!”

“그래? 그거 고맙네.”

“혹시 저한테 계획이 뭔지 조금이라도 알려 주실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해.”

내 가벼운 대답에 로버가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내 귀에도 또렷이 들릴 만한 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말씀해 주시는 게 더 기쁜데.”

너한테 말할 리가 없잖니.

그래도 로버 역시 많이 성장했다. 과거였다면 내 되물음에,

-그, 그래도 공작님께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하고 대답했을 텐데.

‘이제는 완벽하게 이 저택의 실세가 누군지 감 잡았나 보군.’

호기심이 많은 건 여전하지만 말이야.

이런 로버도 파악했는데, 아직 그걸 모르는 이들이 있다는 게 참 거슬렸다.

‘그러니 이 기회에 전부 정리해야지.’

난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씨익 웃었다. 내 미소를 용케 봤는지, 로버가 아주 조용하게 히익! 소리를 내더니 한층 공손해진 모습으로 날 따랐다.

그렇게 킬리언에게 내어 준 방 앞에 섰다.

난 망설임 없이 그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킬리언?”

그러고 잠시 기다려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난 방 안으로 귀를 기울였다.

‘인기척은 확실히 있는데.’

내 행동에 로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난 잠시 고민하다 여상한 목소리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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