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맞는 말입니다.”
내 웃음에 킬리언도 미소 지었다. 그러나 미소 짓던 얼굴은 문득 어딘가 공허한 표정으로 변했다.
“이런 말을 하면, 절 못 미덥게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운을 뗀 그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스스로가 부끄러워요, 벨라디. 제가 아직도 수하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을 만들지 못해서 당신 도움만 받았네요.”
그렇게 말한 킬리언은 어두운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아까까지 유쾌해 보였던 킬리언이 갑자기 침울해진 이유가 무엇인지 얼추 짐작이 갔다.
‘나와 자기를 계속 비교하는 거야.’
난 내게 충성을 바친 부하들을 곁에 뒀지만 본인은 믿을 사람 하나 없이 고군분투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지친 거지.’
내 예상을 증명하듯 킬리언이 조용히 속삭였다.
“사실, 아이닝과 계약을 맺었을 때는 빠르게 목표를 이룰 줄 알았어요. 사람의 호감을 단숨에 사는 능력을 얻었고, 그 덕분에 냉랭하던 마갈라 제국의 사람들이 완전히 변했으니까.”
난 킬리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하지만 황궁으로 돌아오니, 형님은 예상보다 더 강력하고 단단하게 세력을 구축했더군요.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벽처럼.”
동요한 티는 몇 번 보였지만, 여유만큼은 잃지 않았던 킬리언이었다.
그런 그가 조금은 무기력하게 중얼거렸다.
“너무 높아 끝이 채 보이지도 않는……. 전 그 벽을 오를 수 있을까요?”
딱히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는지, 그는 부정적인 모습을 빠르게 수습하고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죄송해요, 벨라디.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네요.”
만약 그가 앞의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난 그걸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까의 불안과 무기력함이 킬리언의 진심일 거야.’
하긴, 이 데커딜 제국에서 황태자라는 벽은 생각보다 훨씬 더 견고했다. 차기 황제로서 지닌 강력한 권력과 남부 세력을 통해 얻은 막대한 부. 이건 나조차 인정하는 부분이니까.
‘그래서 킬리언의 손을 잡았고.’
하지만 삶의 절반을 타국에서 보낸 킬리언은 귀국하기 전까지는 그걸 미처 실감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실감하지 못한 채 마주한 벽은 상상 이상의 패배감을 선사했을 테고.
그것이 나와 본인을 비교함으로써 무의식중에 본심이 튀어나왔을 확률이 높았다.
나로서는 차라리 다행인 일이었다.
‘이런 건 탈이 나기 전에 잡아 줘야지.’
애초에 파트너가 혼자서 구멍 파고 좌절하는 꼴, 난 못 본다.
난 그가 만들어 낸 반듯한 미소를 주시하며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그 벽을 올라간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킬리언.”
또랑또랑한 내 목소리가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평생 그런 벽을 마주했던 사람으로서 말해 주자면, 그런 건 오르는 게 아니에요. 부수는 거지.”
내 말이 의외였는지, 킬리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부순다고요?”
“잠깐 제 이야기를 해 보자면……. 저 역시 다양한 벽에 둘러싸인 적이 있어요. 가족이란 벽, 제도라는 벽, 성별이라는 벽. 전 그 벽에 순응하며 살았죠.”
내 말에 킬리언이 잠시 멈칫거렸다. 이때까지 내가 보여 줬던 모습과는 다른 과거에 호기심이 동한 걸까.
그는 눈을 깜빡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째서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럼요.”
난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 벽을 사랑했기 때문이죠.”
머릿속에 어머니의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서글픈 과거였지만, 딱히 숨길 것도 없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날 가로막는 가족을, 전 사랑했거든요.”
내 대답에 그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난 그걸 보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어요. 아, 난 이 벽과 함께 살 수 없구나.”
아까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킬리언이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집중하는 킬리언을 보니 편하게 말이 나왔다.
“내 숨통을 조이는 것과 공존할 수는 없어요. 그럼 결론은 단순해지죠. 내가 부서지거나, 그걸 부수거나.”
난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먼저 부서질 수는 없으니, 전 그 두껍고 거대한 벽들을 꿰뚫기 시작했죠. 준비하고, 공격하고, 틈을 만들고. 그 틈을 차지한 채 다시 준비하고, 공격하고, 틈을 키우고.”
“…….”
“그렇게 구멍을 넓히니 날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났어요. 그렇게 임시 가주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죠.”
물론 여기서 만족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어때요, 킬리언. 당신은 그 벽과 공존할 수 있나요?”
내 물음에 그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니요. 그랬다간 제가 먼저 부서질 거예요.”
내가 원하는 대답에 방긋 입꼬리가 올라갔다.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으니 그를 설득하는 것이 한결 편했다.
“저는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섞인 경우예요. 하지만 당신은 상대적으로 간단하죠. 사람이 만든 벽은 커다란 구멍 하나만 뚫어도 와르르 무너진답니다.”
난 킬리언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인 채 말했다.
“그러니 그 ‘하나’를 준비하면 그만이에요. 마침 당신은 그의 죄를 알고 있잖아요?”
“죄…….”
영원히 씻을 수 없을 황태자의 죄. 그건 다름 아닌 황태자가 자신의 친모를 살해한 ‘패륜아’라는 점이다.
이걸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반은 먹고 들어간 셈이었다.
“그걸 입증할 증거만 찾으면 우리가 이기는 게임이에요. 그걸 위해서 제가 당신을 돕는 거고요.”
킬리언이 입을 다물었다. 난 그가 충분히 생각에 잠길 수 있도록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렇게 고요한 시간이 흐른 후, 그가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남은 벽들을 부술 셈이죠?”
킬리언의 물음에 난 간결하게 답했다.
“약점을 이용한 협박, 뒷감당을 수습할 능력, 그리고 여론몰이 약간.”
그러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킬리언, ‘나’라는 무기는 그런 것에 특화돼 있어요. 상대가 황태자라고 해도 약점만 잡으면 언제든 뒤흔들 준비가 돼 있답니다. 이런 날 손에 넣었으니, 잘 활용해야죠.”
내 말에 킬리언이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곧 그의 입가에 서서히 호선이 그려졌다. 그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자신이 없군요. 당신을 무기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흐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이 계속 머뭇거리면 내가 알아서 공격할 테니까.”
“그렇게 되면 입장이 바뀌잖아요. 그럴 바에는 제가 당신의 무기가 되는 게 낫겠어요.”
“이런, 몰랐나요? 당신 역시 내 무기라는 걸. 난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거든요.”
내 농담에 그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 소년 같은 웃음에 난 조금 마음을 놓으면서도, 이대로 그를 놔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킬리언의 멘탈 부분까지 챙겨 줘야겠어.’
엘린도 그렇고, 킬리언도 그렇고.
다시는 남 생각하지 않고 나 좋은 일만 하겠다고 다짐했건만.
자기 속마음 하나 표현하는 법도 모른 채 가면 쓰기에 급급한 저 남자에게 연민을 느껴 버렸다.
어쩌겠는가.
‘내가 이렇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인걸.’
물론 내게 이용당한 사람들이 들으면 기겁할 생각이지만.
내가 이유 없이 그런 건 아니잖아?
난 그렇게 생각하며 킬리언과의 수다를 이었다. 그의 불안감을 해소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황태자를 빠르게 무너트릴 거라는 생각은 좀 오만했네요.”
“부끄럽습니다. 그때는 아이닝과 계약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의욕만 넘칠 때라.”
겸연쩍게 대답하는 그에게 내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아, 그 말 들으니 생각났어요, 아이닝이 말하길, 마갈라 제국에서 당신과 춤을 추기 위해 모든 여성이 순번을 정했다고 하던데.”
“하아, 언제 한번 아이닝의 입단속을 해야지.”
킬리언이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그는 표정을 꾸미지 않은 채였다.
킬리언을 위해서라곤 하지만 나 역시 머리를 굴리지 않고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게 즐거워, 나도 그냥 편하게 웃어 버렸다.
***
마차가 앨턴 공작가의 대문을 통과했다.
마부는 익숙하게 현관 앞에 마차를 댔고,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문을 열었다.
킬리언이 다시 로브의 후드를 쓰려고 하길래, 난 그걸 가볍게 저지했다.
“이제는 쓸 필요 없어요.”
“하지만 아직 보는 눈이 많은데.”
“이 저택의 모든 사용인은 전부 내 사람들이에요.”
난 당당히 입을 열었다.
“걱정되면 그들을 믿지 말고, 날 믿어요.”
그렇게 말하며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 킬리언도 잠깐 머뭇거리다 조용히 마차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
뚜벅뚜벅.
우리는 나란히 현관의 계단을 올랐다. 내 옆에서 걷고 있는 그를 보자 문득 그때가 생각났다.
“당신이 절 처음 궁으로 초대했을 때가 떠오르네요.”
“가주 회의 때 말이군요. 저도 그 생각 하고 있었어요.”
“참 적막했죠. 로비에는 아무도 없고.”
“벨라디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래서 재밌었잖아요?”
그 말에 난 후후 웃었다.
그렇게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계단을 다 올랐고 하인들이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로비에서 가지런히 서 있던 사용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벨라디 님.”
그리고 맨 앞에 있던 로버가 내게로 다가왔다.
“옆에 계신 분이 오늘 오신다는 손님이시군요. 전 앨턴 공작가의 총집사, 로버입니다. 저택에 계시는 동안 편히 모시겠습니다.”
“그래, 환대 고맙네.”
로버와 킬리언이 인사를 나눈 후, 난 발로 바닥을 두 번 쳤다.
탁, 탁!
그러자 모인 사용인들이 신속하고 조용하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마치 훈련받은 병사들처럼.
‘실제로 나와 수신호 몇 가지를 맞추긴 했지.’
일일이 말로 하는 것보다는 이런 신호들이 편해서.
그 장면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킬리언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혹시 저들은 제가 누구인지 모르는 건가요?”
“굳이 누가 온다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난 그렇게 말하며 킬리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누가 봐도 얼굴을 붉힐 만한 수려한 외모였다.
“당신 인상이 흔하진 않으니. 눈치챌 이들은 눈치챘겠죠.”
“그럼…….”
“킬리언.”
조금은 소심한 킬리언이 불안해하기 전에, 난 다정한 목소리로 토닥였다.
“이곳에 당신을 감시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어요. 있다고 해도 내가 지켜 줄 테니, 안심하고 편하게 지내요.”
내 말에 킬리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