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여러분 중 한 분만 이 건물에 들어오는 겁니다.”
“우리 중 한 명만?”
“예, 사실은 그것도 안 되지만……. 귀하신 분을 호위하기 위함이니, 그 정도는 특별히 허용해 드려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한 교장이 난간에 있는 날 올려다봤다.
“어떠십니까, 벨라디 님?”
“그렇다면 마차에서 대기 중인 내 호위와 하녀까지 올라오라 하겠다. 그럼 허락하겠어.”
“하녀까지요?”
“애초에 불러올 생각이었어. 교장은 차를 잘 못 타잖아.”
“허허, 맞는 말씀이라 할 말이 없군요.”
그렇게 머쓱하게 웃던 교장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벨라디 님의 호위도 한 분 정도는 괜찮겠지요. 하녀도 무기를 소지하지 않으면 상관없고요.”
교장의 마지막 말에 호위들은 자기들끼리 뭐라고 속삭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대장 격인 기사가 나섰다.
“그럼 제가 보필하겠습니다, 전하.”
‘그래, 사실 감시는 한 명만 붙어도 충분하지.’
킬리언이 어디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한자리에서 나와 차를 마시는 거니까.
게다가 호위 기사 입장에서도 더 이상 나와 입씨름해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 싫었을 것이다.
‘이렇게 내 눈치 보라고 일부러 시비를 건 거고.’
내가 중간에 끼지 않았고, 교장이 처음부터 한 명은 들어올 수 있다고 했으면.
그러면 무조건 전부 들어가야 한다며 난리를 쳤을걸?
계획대로 순탄히 움직이는 상황에 난 은근한 즐거움을 느꼈다. 때마침 나와 시선이 마주친 킬리언 역시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휘며 웃었다.
마치 내가 느끼는 즐거움을 그도 같이 느끼는 것처럼.
‘킬리언도 교장이 내 편인 걸 알아차린 모양이니, 지금 이 연극이 우스울 수밖에.’
난 그렇게 생각하며 테라스에서 나와 소파에 앉았다. 그러며 손가락에 낀 무전 마법을 담은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루비가 영롱하게 일렁이며 목소리가 들렸다.
[부르셨습니까, 벨라디 님.]
스티아의 목소리였다.
난 반지를 입가에 댄 후, 느긋이 말했다.
“지금 올라와.”
[예.]
그리고 루비의 빛이 흐려졌다.
신호가 끊기자마자, 마법 스피커를 통해 피아노 소리가 울렸다. 아이들의 하교 시간임을 알리는 소리였다.
난 그걸 들으며 발을 까딱였다.
‘곧 오겠네.’
내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잠시 후 스티아와 제플린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열린 문 너머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앙!”
“우, 울지 마라!”
“기사님이 우리 때리려고 했어! 그냥 칼만 구경하고 싶었는데!”
“기사님 나빠요! 미워요!”
“그, 때리려는 게 아니라……. 앗! 킬리언 전하! 어딜 가십니까!”
“경이 아이들을 울렸으니 책임지고 달래도록. 난 미리 들어가 있지.”
“잠시만!”
“아니, 기사님! 우리 애들 마음에 이렇게 상처를 주고 그냥 가려 하다니, 너무하십니다!”
교장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킬리언이 문을 안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쿵-.
복도의 소란스러움은 문이 닫히자마자 차단되었다.
하지만 난 아까의 대화를 통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좋아, 아이들이 계획대로 잘 움직여 줬군.’
난 킬리언의 감시책을 제거하기 위해서 재미있는 연극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 연극의 주연 배우는 나도 아니고, 교장도 아니었다.
바로,
‘교장이 앞서 섭외한 켄뉴브 학교의 어린 학생들이지.’
교장은 내 지시대로 평소 눈여겨봤던 아이들에게 연기 하나를 시켰다.
-오늘 하교 시간에 사람 여럿이 이 복도를 지나갈 거야. 너희는 그중 내가 가리키는 기사를 붙잡아야 해. 뭣하면 울어도 된단다.
애초에 교장이 하는 메인 임무가 켄뉴브 학교에 재학 중인 아이들 중, 떡잎부터 남다른 학생들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그 아이들은 졸업 후 우리 가문으로 스카우트되는 거고.’
목록에서도 특별히 뛰어난 아이들은 아버지께 직속으로 보고가 갔다.
참고로 작년 겨울, 뛰어난 졸업생의 보고서는 아버지가 아닌 내가 받았다.
‘그래, 인재들은 이렇게 미리미리 챙겨 가야지 않겠어?
하여튼 이런 교장이 고른 아이들이다 보니, 아직 어려도 제 몫을 톡톡히 해 내는 모양이었다.
난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소파에서 일어나 스티아에게 다가갔다.
“여기까지는 잘 마무리됐네.”
“네, 벨라디 님.”
“전부 벨라디 님이 그리신 대로 실행됐습니다.”
제플린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난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제일 중요한 게 남았지.”
난 킬리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스티아와 제플린을 소개했다.
“오늘 일을 도와줄 제 수하들이에요, 킬리언. 믿을 수 있는 자들이니 정보 유출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구요.”
스티아와 제플린이 킬리언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킬리언은 그 인사를 가볍게 받으며 웃었다.
“그래서, 감시들을 이렇게 다 떼어 놓으면서까지 할 일이 뭘까요?”
“당신이 들으면 깜짝 놀라 뒤집어질 일이죠.”
내 말에 킬리언의 표정에 흥미로운 기색이 맴돌았다.
그는 마치 소년처럼 웃으며, 내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그게 뭘지 너무 기대되는데요?”
난 웃으며 문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범인보다 뛰어난 내 청각은 저 너머의 떠들썩한 소리를 금방 캐치해 냈다.
“그럼 난 이제 응접실로 들어가겠다!”
“으아아아아앙! 검 쓰는 거 보여 주기로 해 놓고서 그냥 간다!”
“기사님이 비겁하게 약속도 안 지키고 도망간다!”
“도망가는 게 아니라!”
“기사님은 애들 하나 제대로 달래 본 적이 없으십니까? 이러다 우리 애들 기사 트라우마라도 생기겠습니다!”
당황한 기사를 아이들과 교장이 몰아가는 모양새에, 나는 피식 웃었다.
‘열연 중이로군.’
하지만 언제 호위 기사가 응접실로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자, 그럼.”
난 천천히 입을 열며 킬리언의 양팔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그의 눈이 동그래졌지만, 난 아랑곳 않고 그대로 휙 킬리언의 몸을 돌렸다.
그를 돌린 방향에는 응접실에 미리 준비해 놓은 파티션이 있었다.
“저와 스티아는 테라스로 나가 있을 테니.”
내 손길대로 파티션을 보게 된 킬리언이 고개를 틀어 날 바라봤다. 그 의문 섞인 눈빛에 난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일단 저쪽에서 옷 갈아입으세요.”
***
“킬리언 전하!”
쾅!
문이 거세게 열렸다.
킬리언의 호위 기사가 다급하게 응접실로 들이닥치는 소리였다.
난 스티아가 타 준 차를 한입 마시며 혀를 찼다.
“어수선하네요.”
내 말에 맞은편에 앉은 킬리언이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아이들을 많이 만나 혼란스럽나 봅니다, 앨턴 양.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제야 호위 기사는 정신을 차린 듯, 자세를 바르게 하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한 그는 걸음을 옮겨 벽에 서 있는 제플린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제플린과 약간 거리를 두고 자리를 지켰다.
그걸 바라보던 킬리언이 피식 웃으며 호위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들은 잘 달래 준 건가?”
“예. 예상치 못한 일로 오래도록 옆을 비워 면목이 없습니다.”
“원칙을 어기고 들어온 건 우리였으니 하는 수 없지. 괜찮네.”
킬리언과 호위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난 내 바로 뒤에서 고개 숙이고 대기 중인 스티아에게 속삭였다.
“상태는?”
“아직 여유 있습니다.”
“다행이네.”
스티아의 컨디션을 체크한 다음, 나와 킬리언은 시답잖은 수다를 이어 갔다.
남들 다 아는 제국의 자극적인 소문들이 그 주제였다.
“마탑주가 세상에 모습을 감춘 지 벌써 5년이 다 되어 간다는 것, 알고 계시나요?”
“얼핏 들었습니다. 실종된 손자를 찾고 있다고요.”
“맞아요. 마탑주의 아들 부부가 마차 추락 사고로 사망했는데, 같이 타고 있던 손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이상한 일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난 시계의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스티아가 버틸 수 있고, 호위가 의심하지 않을 적정한 시간을 맞추기 위해.
시계의 초침 소리가 규칙적으로 흘러갔다.
‘티타임은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고…….’
시곗바늘이 딱 정각을 가리킨 순간이었다.
툭-.
스티아가 우리만 들릴 만큼 살짝 바닥을 발로 찼다.
약속된 신호를 캐치한 킬리언이 자연스럽게 시계를 바라봤다.
“이런,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렀군요. 전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오늘 대화 정말 즐거웠습니다, 전하.”
“저도 앨턴 양을 다시 만나 반가웠어요.”
“아,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마갈라 제국에 관한 책을 구매했는데, 언제 한번 저희 저택에 오셔서 같이 봐 주셨으면 해요.”
우리의 대화를 남몰래 듣고 있던 호위 기사가 순간 눈을 번뜩였다.
내가 조만간 킬리언을 저택에 초대한다는 정보를 흘렸으니, 아마 곧바로 황태자에게 보고하리라.
‘그렇게 하라고 일부러 말을 꺼낸 거지만.’
나와 미리 말을 맞춘 킬리언도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 불러만 주세요. 저에겐 영광입니다.”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한 후, 킬리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나도 소파에서 일어나 가볍게 예를 취했다. 그러다 그와 내 시선이 허공에서 딱 마주쳤다.
난 킬리언을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부디 무사히 돌아가시길.”
내 마지막 인사가 무슨 의미인지 파악했을 킬리언도 마주 웃었다.
“걱정 감사합니다, 앨턴 양.”
그렇게 대답한 킬리언이 먼저 응접실을 나섰고, 호위 기사도 내게 예의상 묵례를 한 후 따라 나갔다.
쿵.
응접실 문이 닫혔다.
“어떠셨나요?”
난 느긋이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자신의 얼굴을 타인의 시선으로 본 소감이?”
그 말에 벽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플린이 입을 열었다.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제플린은 그렇게 말하며 내 쪽으로 다가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긴장이 풀린 듯, 그가 소파에 등을 기댄 순간이었다.
변신 마법이 풀리며 제플린의 얼굴과 목소리가 킬리언으로 되돌아왔다.
“당신 말대로,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피식 웃었다.
난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만큼 재밌었죠?”
내 질문에 킬리언은 자신이 입고 있는 제플린의 옷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던 그는 눈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당신은 언제나 제 예상보다 더 짓궂어요, 벨라디.”
그 말에 내 입가에는 저절로 장난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