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제가 갑자기 등장해서 많이 놀랐죠?”
내 물음에 킬리언이 잠시 눈을 깜빡이다 피식 웃었다.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조금은?”
저 반응을 보니, 아마 킬리언도 내 장난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난 테라스 난간을 잡고 몸을 조금 숙이며 말했다.
“교장에게 이야기는 전해 들었어요. 킬리언 전하께 조언을 얻고자 오늘 켄뉴브 학교에 초대했다고.”
초대의 명분도 확실했다. 마갈라 제국은 원래부터 아이들을 한 공간에 모은 후 공부를 가르치는 아카데미 교육 시스템을 운영했으니까.
‘그리고 데커딜 제국은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지.’
그러니 아카데미 출신인 킬리언에게 켄뉴브 학교의 교장이 조언을 구한다는 명목은 내가 봐도 그럴싸했다.
‘그러니 황태자도 킬리언의 일정에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난 시선을 뒤로 옮겨 킬리언을 따르는 시종들과 호위 기사들을 바라봤다.
수도를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평민들의 학교에 오는 것임에도, 그 수가 유독 많았다. 그리고 아무리 티 나지 않게 행동한다지만…….
‘내 눈썰미를 피해 갈 수 있을 리가.’
저들 모두, 킬리언의 말과 행동을 낱낱이 주시하고 있었다.
난 그걸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렇게 감시책을 많이 붙이다니.’
아무리 자연스러운 명분이라도 경계를 풀지 않으시겠다?
……하긴, 황태자의 생각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황궁을 나서면 황후의 다이아를 자유롭게 쓸 수 있으니까.’
그러니 킬리언의 외출을 오히려 기회라 여길 수도 있지.
자신의 심증에 더해 물증을 발견해 낼 기회.
‘아무래도 황태자의 의심은 어쩔 수 없나 보군.’
뭐, 나도 그놈이 킬리언을 쉽게 보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 상응하는 대책도 미리 준비해 놓았고.
그렇다고 저렇게 많은 인원을 붙여 놓을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괜찮아.’
어차피 켄뉴브 학교는 내 무대니까.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름없었다. 아래에서 사람 좋게 웃고 있는 켄뉴브 학교의 일인자, 교장이 바로 외부에서 활동하는 앨턴 공작가의 감시자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앨턴 공작가의 직계라면 무조건 따르는 충성스러운 감시자.’
외부 감시자인 교장은 제플린의 관리하에 있었는데, 제플린은 교장을 조금 떨떠름하게 평가했다.
‘교장의 충성심이 때때로 앨턴 공작가를 향한 덕질로 보인다나 뭐라나.’
생각해 보면, 교장은 내가 감시자의 존재를 몰랐던 어렸을 때부터 유독 날 좋아했다.
그래서 내가 켄뉴브 학교에 방문하는 날이면 무조건 내 곁에 붙어 이것저것 챙겨 주고 싶어 했지.
별관 정원에 동상을 세우자고 제안했던 것 역시 시온과 모스틴은 핑계고, 내 동상을 세워 본인 사심을 채우기 위해서였다고 실토한 적도 있었고.
‘……흠, 뭐든 상관없지만.’
날 아이돌이나 우상으로 숭배하는 이들은 교장 말고도 여럿 있었다. 당연히 그중에는 제플린도 포함됐다.
‘본인도 그런 이들 중 하나면서 교장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모습이 나름 웃겼지.’
뭐, 내가 그들의 아이돌이든 주인이든 그들이 내 사람이란 건 변함 없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자, 그나저나 슬슬 쓸데없는 꼬리들을 잘라 볼까.’
난 교장에게 살짝 눈짓을 주며, 킬리언에게 말했다.
“저도 마침 이곳에 잠시 볼일이 있어서 방문했답니다. 그러다 전하께서 지나가시는 걸 보고 말을 걸게 됐어요.”
내 말에 킬리언이 가만히 날 올려다봤다.
난 그를 향해 호감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이리로 올라와서 저와 차 한잔 어떠신가요?”
내 신호를 읽은 교장도 껄껄 웃으며 응수했다.
“벨라디 님께서 킬리언 전하의 방문 소식을 듣고도 약속 일정을 변경하지 않아 의아했는데. 두 분께서 이렇게 친분이 있으셨군요!”
그렇게 말한 교장이 킬리언을 바라보았다.
“아까 산책을 하며 얼추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위로 올라가시죠, 전하.”
교장의 말에 킬리언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바로 인지한 듯싶었다.
그는 내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영광입니다, 앨턴 양.”
“자, 그럼 이리로.”
교장이 킬리언을 산책로 방면에 위치한 입구로 안내했다. 그러자 뒤따르던 황궁 시종들도 우르르 움직였는데, 교장은 헛기침을 하며 그들을 막아섰다.
“크흠. 죄송하지만, 이곳은 아이들이 공부를 하는 공간입니다.”
그렇게 말한 교장은 킬리언 뒤에 서 있는 시종 무리를 쓰윽 둘러봤다. 확실히 위에서 봐도 그 수가 꽤 많았다.
“그러니 갑작스럽게 낯선 분들이 들어오면 아이들이 혼란스러워할 겁니다.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교장의 말에 킬리언을 따르려던 시종들이 멈칫했다.
킬리언은 지금이 그들을 자연스럽게 떼어 놓을 수 있는 타이밍임을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교장의 말이 맞아. 너희는 마차에서 대기하고 있어라.”
“……예, 알겠습니다.”
시종들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킬리언 곁의 호위 기사들을 믿는 듯, 생각보다 쉽게 물러났다.
시종들은 마차 보관소가 있는 중앙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교장은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질 않았다. 그러자 가만히 서 있던 호위 기사 중 한 명이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황자 전하를 기다리게 할 셈인가?”
“그것이 말입니다.”
교장이 이번에는 곤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고민을 했는데……. 아무래도 기사님들 역시 이 건물에 들어오시기 힘들 것 같습니다.”
“뭐라?”
“원칙적으로 이 건물에는 무기를 소지하고 들어오실 수 없는데…….”
교장은 그렇게 말하며 호위 기사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바라봤다.
“물론 기사님께서 검을 놓고 들어오시면 괜찮습니다만.”
“말도 안 되는 소리! 기사에게 검은 생명이다!”
교장의 말에 호위 기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대답을 들은 킬리언이 남모르게 피식 웃었다. 나도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고.
‘저런 반응일 줄 알았어.’
제국의 모든 기사단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한 가지 규율이 있다.
-임무 수행 중에는 절대 주인의 명 없이 검을 놓아선 안 된다.
이 규율은 황실 근위 기사단같이 전통 있고 명예 높은 기사단일수록 반드시 지켜야 했다.
호위 기사들도 황태자의 명을 받는 근위 기사단 소속일 테니, 당연히 이 규율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그걸 증명하듯, 호위 기사가 단호한 눈빛으로 교장을 바라봤다.
“난 황실의 기사로서 절대 이 검을 놓을 수 없다.”
기사의 말에 킬리언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허락할 테니, 검을 두고 따라오게.”
우습게도 이런 킬리언의 반응은 생각 못 했는지 기사가 잠시 멈칫했다.
기사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슬쩍 눈을 굴려 한 사람을 응시했다. 호위 기사들 중 맨 앞에 서 있는 이였다.
그는 시선을 느꼈는지 킬리언 쪽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전하. 저희의 주인은 황태자 전하이시기에, 그 명은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 그럼 어쩔 수 없이 원칙에 따라야지. 경들도 시종들과 함께 마차 앞에서 대기하고 있어라.”
“그것 역시 안될 말입니다.”
“어째서?”
“저희는 황태자 전하의 명으로 무조건 킬리언 님을 보호해야 하는 호위입니다. 그러니 한시라도 떨어질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위험한 곳에 가는 것도 아니지 않나.”
“용서를. 전부 킬리언 전하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안전은 무슨. 감시를 하기 위해서겠지.’
저렇게 나서는 걸 보니, 저자가 호위가 기사들 중 대장인 모양이었다. 어기찬 말투로 보아 킬리언과 떨어질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고.
‘황태자가 절대 떨어지지 말라고 신신당부라도 했나 봐?’
호위 기사가 지껄이는 말을 들으며 난 다시 교장과 눈길을 교환했다.
교장의 눈빛에서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읽을 수 있었다.
‘이제 벨라디 님이 등장하실 차례입니다!’
그래, 나도 이 순간을 은근히 기다렸어.
난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어 이목을 집중시켰다.
“경은.”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들어 날 올려다봤다. 난 그중 호위 기사의 눈을 냉정하게 주시하며 말했다.
“꼭 내가 킬리언 전하를 해치기라도 할 것처럼 구는군.”
내가 생각해도 킬리언을 대할 때와는 온도가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호위 기사는 방금 전 내가 낸 상냥하고 호의 가득한 목소리가 아닌 딱딱하고 차가운 어투에 조금 당황한 듯싶었다.
“그것이 아닙니다.”
“아니면, 그렇게 날 경계하는 이유가 뭐지?”
“앨턴 양을 경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킬리언 전하를 혼자 두는 것은 호위 기사의 도리가 아니라 판단한 것뿐입니다.”
그 말에 난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내 호위는 원칙대로 학교에 들어오지 않고, 마차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 그 기사는 도리를 어겼다고 판단하는가?”
“……앨턴 공작가의 기사는 공작가 기사단의 규칙을 따르겠지요.”
함부로 공작가의 기사단을 비난하기는 부담이 됐는지, 호위 기사는 잠시 망설이다 어정쩡한 대답을 내놓았다. 나는 계속해서 따져 물었다.
“그럼 넌 황실의 기사이니 황실 기사단의 규칙을 따르겠다?”
“그렇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물러나라고 해도 그렇게 군소리를 하며 자리를 지킬 건지 궁금하군.”
“황태자 전하께서는 저희의….”
“주인이니 명을 따를 거라고? 경들은 지금 킬리언 전하의 호위 중이라고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애초에 황태자 전하의,”
“명령이라서 호위를 맡은 거라고?”
내가 계속 자기의 말을 가로채자 호위 기사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난 그걸 보며 놀리듯 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실의 기사가 그딴 식으로 호위를 하다니. 그것도 직계 황족을 말이야. 황실 기사단의 규칙은 원래 그런 식인가?”
“그건!”
“자, 자.”
호위 기사가 목소리를 높이려던 찰나, 교장이 막아섰다.
교장은 나와 계획한 대본대로 호위 기사에게 거래하듯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