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교장에게 엘린을 언급하며 일자리를 내어 주라고 지시한 건 바로 나였다.
언젠가 내가 쓰게 될 원석이 벌써 부서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죄인의 가족을 대놓고 도와줄 수는 없었으니까.’
그때 당시 노쇠한 조부모와 어린 동생들이 있음을 감안해 가문 전부를 체포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난 최대의 자비를 베푼 셈이었다.
그러니 엘린에게 직접적으로 돈을 주거나 일자리를 연결해 주는 건 모양새가 이상했다.
‘그래서 교장을 이용해 우회적으로 엘린을 지원했지.’
고지식한 엘린의 조부모도 황제의 비호를 받는 수도 켄뉴브 학교의 선생 자리만큼은 반대하지 않았다. 덕분에 엘린은 무사히 켄뉴브 학교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물론 이 사실을 엘린에게 알릴 생각은 전혀 없지만.’
감시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엘린은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절체절명의 순간, 자신을 구해 준 이가 나였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든 은혜를 갚으려 들겠지. 혹여 내게 충성을 바칠지도 몰랐다.
하지만 난 엘린이라는 원석을 이용하되, 가공하여 내 것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내게 쓰이기에는 엘린이 책임져야 할 몫이 너무 많아.’
나같이 앞만 보고 질주하는 이에게는 그에 맞는 성향의 부하가 제격인 법.
자기 가족에게 헌신적인 엘린은 이런 나를 따르다가 가랑이가 찢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 적당한 계약 관계가 좋았다.
“물론 네게 아무런 보수도 없이 일을 시킬 생각은 없어.”
난 그렇게 말하며 소파 옆에 있는 협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내가 미리 작성해 교장에게 보낸 봉투가 담겨 있었다.
그걸 꺼내 엘린에게 넘겼다.
“열어 봐.”
내 말에 엘린이 조심스럽게 봉투를 받고 입구를 열었다.
그 안에는 종이 한 장이 접혀 있었다.
그걸 펼쳐 본 엘린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이, 이건!”
종이를 쥔 엘린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매우 놀랐는지 그녀는 아까보다 더 말을 더듬으며 사양하려고 했다.
“이, 이, 이건 너무 과, 과, 과.”
“엘린 돈티오.”
난 엘린의 말을 끊었다. 엘린이 몸을 움찔거리며 날 바라봤다.
난 그런 그녀를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과분하다고 거절하는 건 네 자유야. 하지만 지금 같은 기회가 언제 또 찾아올지 잘 판단해 봐.”
내 말이 정곡을 찌른 듯 엘린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그렇게 잠시 동안 종이를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에서 난 많은 걸 읽을 수 있었다.
‘그래, 소시민인 엘린에게는 내 부탁도 저 종이도 부담스럽겠지. 하지만 어떻게 거절하겠어.’
엘린에게는 어린 동생이 두 명이나 더 있다.
그것도 쌍둥이로.
‘그리고 둘 다 마법에 소질을 보였지.’
마법에 소질을 보이는 어린아이는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다만 그 소질이란 건 나이를 먹을수록 흩어지기에, 마법사가 희귀한 것이고.
그러니 아이를 마법사로 만들고 싶다면 소질을 빨리 발견하고 마법 교육소나 뛰어난 마법사에게 데려가 마력을 개화해 주는 것이 관건이었다.
‘나와 멜도르도 어머니가 일찍부터 마력을 개화시켜 주었으니까.’
하지만 소질은 눈에 띄는 것이 아니라 눈치채기도 힘들었고, 운 좋게 눈치챘다고 해도 마법 교육소나 뛰어난 마법사는 인기가 많아 함부로 찾아갈 수 없었다.
‘그들이 아무나 봐주지도 않았고.’
덕분에 수많은 아이가 이 마력 개화 시기를 놓쳐 마법사가 되지 못했다.
엘린의 동생들도 그런 아이가 될 팔자였다. 지금 돈티오 가문의 형편상 마법은커녕, 입에 풀칠도 겨우 하고 있으니까.
‘차라리 쌍둥이에게 소질이 있다는 걸 몰랐으면 마음이 편했겠지.’
하지만 이미 아는데 어떻게 하나.
동생을 사랑하는 엘린이 얼마나 속상했을지, 눈에 훤히 보였다.
이런 때 내가 건넨 게 바로.
‘마탑의 초대장’.
마탑은 명실상부 제국 최상의 자리를 지키는 마법 연구소다. 그리고 마법사라면 누구나 이 마탑의 초대장을 받고 싶어 했다.
‘마법사가 마탑에 소속되기 위해서는 마탑의 초대가 유일하니까.’
사실 마탑은 일일이 아이들의 마력을 개화해 주지 않았다. 이미 완성된 실력을 가진 마법사들만 모이는 곳인데, 뭐가 아쉬워서 아이들을 살필까.
하지만 난 당당하게 엘린에게 말했다.
“이미 마탑과 이야기는 끝냈어. 그걸 들고 마탑으로 가면 네 동생들을 봐줄 거야.”
콧대 높은 마탑도 지금은 내게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기 때문이다.
‘다들 마법 루비가 탐이 나거든.’
사실 내겐 스티아를 비롯한 감시자도 있고 멜도르도 있어서 마탑의 힘이 급한 건 아니었다. 거기에 최근 마탑의 명성은 예전만 못한 터라, 큰일을 맡기기에는 영 못 미덥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 호의를 그냥 날리면 너무 아까우니까.
‘이렇게라도 활용해야지.’
“이걸 받아들이면, 네 쌍둥이 동생들은 마법사가 되는 게 확정이야. 마탑이 단순히 개화만 도와주지 않을 테니까.”
“…….”
“너도 알지, 엘린?”
엘린이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다. 난 그녀의 눈을 빤히 주시했다.
“마법사는 귀족이 아닌 여자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직업 중 하나라는 거.”
순간 종이를 쥐고 있던 엘린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내가 저렇게 말한 이유는 하나였다.
‘엘린의 교육열을 자극시켜 줘야 동기를 가질 테니.’
그녀도 어쩔 수 없이 수도에서 나고 수도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덕분에 엘린도 이런 욕망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어린 동생들만큼은 자기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바라는 욕망.’
나도 이 소설 속에 환생하기 전에는 그런 생각을 얼추 가지고 있었으니까.
예상대로 내 마지막 말이 엘린의 무언가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입가를 굳게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벨라디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 초대장, 정말 감사히 받겠습니다.”
“네 능력에 대한 보수를 미리 지불한 거야. 절대 날 실망시키면 안 돼, 엘린.”
“예, 벨라디 님. 부인들께…… 정말 최고의 연주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엘린의 눈에는 약간의 부담감, 그리고 처음에는 볼 수 없었던 의욕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만족스러워 난 방긋 웃었다.
“좋아, 자세한 일정은 나중에 알려줄 테니 이만 나가 봐.”
“예!”
엘린은 초대장을 곱게 접어 봉투에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했다. 그러고는 기세 좋은 걸음으로 응접실을 나섰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난 닫힌 문을 보며 소파에 편히 앉았다.
‘사실 내가 이렇게까지 엘린을 도와줄 필요는 없었는데.’
애초에 엘린은 죄인의 동생이었고, 내 아량으로 구금되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건 무엇이든 해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난 그녀를 조사하며 약간의 동정심을 느껴야 했다.
‘원래 철없는 오빠를 가지고 있으면, 여동생이 맏이 노릇을 해야 하니까.’
가뜩이나 안쓰러운 엘린의 삶을 오빠라는 족쇄로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예 이용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고.
‘이용할 거면 차라리 동생이란 족쇄가 낫다는 거지.’
오빠의 죄 때문에 내 명령을 듣는 것과, 동생의 출세를 대가로 내 부탁을 수행하는 것.
‘느낌이 전혀 다르잖아?’
시기도 적절했다.
막 스파이를 체포했을 때에는 공정함을 위해 직접적으로 엘린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스파이의 처분도 끝났고, 시간이 흐르면서 엘린의 힘든 사정이 북부 사교계에 동정론을 일으켰다.
이런 때 내가 그녀의 사정을 안타깝게 여기고, 동생들을 마탑에 소개해 줬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날 죄인의 가족도 품을 줄 아는 포용력 있는 귀족이라고 칭찬할걸?’
좀 과하다고 여기는 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렇게 생각해도 속으로 삼키고 날 칭찬해야지.
‘그게 권력의 힘이니까.’
물론 그만큼 엘린은 누군가의 시기와 질투를 받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엘린도 눈치가 없는 이가 아니니, 그걸 다 감안하고 내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하며 소파에서 일어나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마침 시계를 보니, 슬슬 약속 시간이 다가와 있었다.
‘첫 번째 목표였던 엘린을 잡았으니, 바로 다음 목표를 데리고 와 볼까.’
테라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잘 정리된 산책로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 길을 걷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고.
그중 남들보다 머리 하나 큰 적발의 남자가 눈에 띄었다.
‘왔군.’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의 회색 눈이 드물게 조금 커졌다.
“벨라디……?”
그의 입 모양이 나지막이 내 이름을 중얼거린 걸 확인했다.
난 그걸 보며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킬리언 전하.”
내 인사에 조금 동요하던 킬리언도 즉시 표정을 수습하고 웃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앨턴 양.”
겉은 여유로운 듯 보이지만,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지 전부 예상이 갔다. 아마,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그래도 아이닝이 내 부탁을 잘 전달해 줬나 보네.’
일전에 난 아이닝에게 세 가지 부탁을 전달해 달라고 했다.
하나는 황태자의 최측근에 대한 정보.
그리고 또 하나는 킬리언 본인에 대한 정보.
마지막으로.
‘켄뉴브 학교 교장의 초대에 응할 것.’
내가 이렇게 말하니 킬리언은 아이닝을 다시 보내 초대에 응하기만 하면 되는 거냐 물었다. 난 거기에 자세한 말을 더하지 않고 그러라고 답했고.
굳이 설명을 하지 않은 건, 나름의 이유가 있기도 했지만…….
‘그게 더 재밌잖아?’
킬리언은 항상 웃는 얼굴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장난기 짙은 난 그런 이들을 놀리는 데에 재미를 붙이는 사람이었고.
‘할아버지의 유전자가 어디 가지는 않았나 봐.’
자주 만나 뵌 적은 없어도, 원작을 통해 본 할아버지는 이런 면에서 나와 비슷했다. 그래서 원래 무뚝뚝한 성격인 첫째가 할아버지를 많이 어색해했지.
‘그럼 할아버지와 난 어떤 사이가 될지 조금 궁금하네.’
지금 그걸 생각해 봤자 의미 없지만.
하여튼 킬리언이 스치듯 보여 줬던 동요가 만족스러웠으니, 오늘 장난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난 킬리언을 보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