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67화 (68/197)

67.

“교장 선생님, 엘린 돈티오입니다!”

“들어오세요.”

교장의 허락에 문이 열렸고, 무늬는 없지만 깔끔한 옷차림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사과한 여자는 잠시 숨을 고르며 흐트러진 머리를 바로 했다. 와중에도 자세는 흐트러짐 없이 단정해 교육을 잘 받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수도에서 선생으로 일하기에 손색없군.’

교장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여자에게 다가갔다.

“자, 자. 괜찮아요, 엘린 선생. 벨라디 님도 엘린 선생의 사정을 다 이해하고 온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요.”

“아, 네!”

교장은 그렇게 말하며 힐끔 날 살폈다.

난 교장과 시선을 교환하며 눈짓을 보냈다.

‘이만 나가도 좋아.’

내 신호를 바로 감지한 교장은 웃음을 잃지 않으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이야기 잘 나누시길.”

교장이 내게 다시 인사한 후, 응접실을 나가려 했다.

그 모습에 여자가 빠르게 눈을 깜빡이더니 급하게 교장을 잡았다.

“교, 교장 선생님……! 같이 있는 게 아니었나요?”

여자가 아주 조용하고 빠르게 속삭였다. 물론, 내 귀에는 그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지만.

보아하니 나와 단둘이 남는 상황은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입장상 내가 불편할 만해.’

여자의 사정을 잘 알기에 따로 불쾌하지는 않았다.

교장은 여자를 잘 다독이며 말했다.

“벨라디 님이 엘린 선생에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나 봅니다. 마침 다음 시간에는 수업이 없다고 했지요?”

“그렇긴 한데…….”

“허허! 잘됐네요. 그럼 벨라디 님과 천천~히 이야기 나누도록 해요.”

교장은 이 한마디를 남기며 방을 나서 버렸다.

쿵-.

여자는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 살짝 고개를 돌려 내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숨을 훅 들이쉬며 고개를 다시 돌렸다.

덩치도 작고,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를 가진 탓일까? 그런 여자가 꼭 경계심 많은 소동물 같았다.

팔짱을 끼며 가만히 그녀를 관찰하던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앉지.”

난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아까 앉았던 소파에 다시 앉았다.

이런 내 모습에 여자가 조심스럽게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무릎을 살짝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마, 마, 만나 뵙게 되어 너무나 영광입니다, 벨라디 님. 엘린 돈티오입니다.”

덜덜덜 떨며 간신히 예를 차린 여자, 엘린은 내 옆 소파 끄트머리에 간신히 엉덩이를 걸쳤다.

엘린이 생각 이상으로 긴장한 것 같아, 난 긴말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널 찾은 이유는 한 가지 부탁을 하기 위해서야.”

“부, 부탁……이요? 제게요?”

“그래.”

내 말에 엘린이 불안한 모습으로 눈을 좌우로 굴리다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제가 벨라디 님의 부탁을 잘 수행할 수 있을지…….”

“어려울 것 없어. 네가 제일 잘하는 걸 하면 되니.”

“아.”

내 말을 바로 이해한 듯, 가만히 굳어 있던 엘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피아노 연주인가요?”

그렇게 말하는 엘린은 용기를 냈는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난 엘린을 보며 생긋 웃어 주었다.

“그래. 네 솜씨가 뛰어나다고 들었거든.”

내 칭찬에 엘린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벨라디 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언제든 하겠습니다.”

“흔쾌히 수용해 줘서 기쁘네. 네 연주를 들으면 그분들도 무척 즐거워할 거야.”

엘린이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닌 모양이다. 내 말에 이상한 부분이 있음을 알아채고는 손끝이 살짝 움츠러드는 걸 보면.

‘내가 그분이라고 존칭할 사람이 몇 없다는 걸 아는 거지.’

잠시 머뭇거리던 엘린이 아까보다 훨씬 더 신중하게 물었다.

“그런데 제가 어디서 연주를 하면 되는지…….”

그런 엘린을 보며, 난 별거 아닌 목소리로 말했다.

“아글라 공작 부인의 개인 살롱.”

아, 물론 나에게만 별것 아니고.

“아, 아글라……?!”

다른 이들에게는 충분히 별것인 소식일 테지만.

예상대로 엘린의 얼굴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어떻게 제가 아글라 공작 부인의 개인 살롱을! 저 따위는 절대 가지 못하는 곳입니다, 벨라디 님!”

굳이 그 말을 반박할 생각은 없었다.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엘린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 원래 네 신분이었다면 발도 못 붙일 곳이지. 하지만 말했잖아?”

그 말에 엘린이 눈을 껌벅이며 날 바라봤다.

난 소파에 등을 떼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넌 그곳에 손님으로 가는 게 아니야. 살롱의 부인들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러 가는 거지.”

아글라 공작 부인의 개인 살롱.

그곳은 수도에서 가장 전통 있는 모임 중 하나로, 대대로 아글라 공작 부인들이 운영해 왔다. 그만큼 회원들은 나이 든 귀부인들이 많았고.

난 그 살롱의 회원이 아니지만, 그들이 재능 있는 예술가 아가씨를 좋아한다는 건 사교계에서 유명한 정보였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엘린은 참 적절한 인물이었다.

‘이제 귀족이라 불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예법이 몸에 배었고…….’

난 슬쩍 고개를 내려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엘린의 손을 바라봤다.

엘린의 손가락은 다른 이들보다 가늘고 길었다.

‘무엇보다 피아노 연주가 일품이니까.’

엘린의 피아노 녹음본을 구해 멜도르에게 들려주니, 클래식에 정통한 놈이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아아……. 축음기의 악몽이 전부 사라지는 연주야. 아름다워……!

‘그 정도 반응이면 부인들도 충분히 만족시키겠지.’

그곳에서 엘린의 역할은 하나다.

살롱의 회원들은 전부 가입한 지 오래되었기에 친목과 결속력이 강했고, 가드도 든든했다. 엘린은 그런 노부인들의 경계심을 푸는 윤활제 역할을 해 줘야 했다.

‘내가 엘린과 함께 살롱에 심어 놓을 감시자들이 정보를 원활하게 수집하게끔 도와줄, 그런 윤활제 말이야.’

난 검은 속내를 능숙하게 감추며 엘린에게 물었다.

“이번 일이 부담되니?”

내 물음에 엘린이 잠시 멈칫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담이 됩니다. 하지만…….”

엘린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제가 거부할 수 없겠죠.”

“그것도 그렇지.”

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죄인의 동생이 어떻게 내 말을 거역하겠어.”

그 말에 엘린의 표정이 시꺼멓게 죽어 갔다.

난 그녀의 반응을 보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모두 가족이 웬수지.’

돈티오 가문의 둘째, 엘린 돈티오.

그리고 내 주위에 이 성을 쓰는 이가 딱 한 명 더 있었다.

‘황태자의 사주로 우리 가문을 배신한 스파이.’

현재는 루비 광산으로 노역을 보낸 그 스파이가 바로 엘린의 친오빠니까.

사실 난 스파이를 잡은 후, 꽤 꼼꼼하게 놈의 집안을 탐색했다.

‘단물을 뺄 수 있으면 빼고……. 아니면 원칙대로 처벌할 예정이었는데.’

그렇게 살펴본 돈티오 가문은 참 쓸모도 없고, 답도 없는 곳이었다.

일단 돈티오 가문은 단승 작위를 가지고 있는 남작가였다.

스파이의 아버지는 남작이었지만, 스파이는 아무리 장남이어도 그 작위를 세습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다 남작 부부가 사고로 죽었고, 스파이는 가장이 되어 가문을 책임지게 됐다.

‘그래도 놈이 우리 가문의 기사가 된 덕에 귀족 취급은 받고 있었어.’

돈티오 가문은 전적으로 스파이에게 모든 걸 의지했던 집안이었다. 특히 아직 살아 있는 그의 조부모는 철저히 남아 선호에 물든 자들이었다.

그래서 스파이의 여동생들에게는 아무런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오로지 장손만 예뻐했었고.

그런데 참 어리석게도…….

‘믿었던 장남이 헛짓거리를 했다는 거지.’

책임질 이들이 있는 와중에 말이다.

그렇게 스파이는 지하 감옥에 수감됐고, 이제 이 가문은 귀족이라고 칭할 수도 없게 됐다.

원래 가지고 있던 재산도 모조리 앨턴 공작가에 압수되었기에, 정말 쫄딱 망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애초에 저들 모두 스파이의 가족이라 연좌제로 함께 처벌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난 저 별 볼 일 없는 가문에서 그나마 쓸모 있는 원석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놈의 여동생 말이야.’

엘린 돈티오.

타고난 피아노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빠에게 밀려 빛을 보지 못한 천재.

원래 스파이는 집안의 일에 관심이 없어서, 모든 잡일과 대소사는 자연스럽게 엘린의 몫이 되었다.

늙은 조부모의 수발부터 어린 동생들의 케어까지. 거기에 각종 돈 관리는 물론이요, 일상에서 발생하는 트러블 전부를 엘린이 책임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스파이가 수감되었고, 충격으로 조부모가 쓰러졌다. 이런 그녀에게 들이닥친 가장 큰 문제는 지금 당장의 생계였다.

‘엘린의 밑으로는 아직 어린 동생이 둘이나 더 있었으니까.’

갑작스럽게 가장 역할까지 하게 된 엘린은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문제는 그녀의 조부모였다.

아직 자신들이 귀족이라는 자부심에 취해 있던 그들은 엘린의 행동에 펄쩍 뛰며 반대했다.

내가 직접 듣지 않았지만, 그들이 했을 말은 뻔했다.

-어떻게 귀족가 영애가 돈을 벌 생각을 하느냐! 넌 그냥 앨턴 공작가로 가서 눈물로 네 오라버니의 억울함을 호소하면 돼!

-그래! 얼른 우리랑 가자! 네 오빠가 얼마나 착하고 듬직한 아이인데, 전부 오해일 거야!

그렇게 조부모는 꽉 막힌 소리나 하고 있지, 동생들은 불안감에 매일 울지, 재산은 압류당했고 당장 먹을 음식은 떨어져 가지.

장남의 죄목이 배신이니, 병사들이 언제 자신을 잡으러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엘린 역시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던 암흑의 순간.

그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이 바로 켄뉴브 학교의 교장이다.

-마침 우리 학교의 종소리를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로 바꾸고 싶었답니다.

교장은 그렇게 말하며 엘린을 학교의 선생으로 스카우트해 갔다.

아마 엘린의 눈에 교장은 은인이나 다름없어 보였겠지.

뭐, 사실을 말하자면.

‘교장은 단지 내 명령을 수행한 것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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