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그딴 건 안 하느니만 못했다.
무엇보다…….
‘아버지에게 내 계획을 밝히고 싶지 않아.’
회의의 분위기는 완전히 황태자에게로 기울었다.
이런 상황이면 더 이상 일을 추진할 수 없었다.
‘다행히 벌여 놓았던 것들은 많지 않으니, 수습은 문제없겠어.’
프레도 공작과의 거래도 당장 멈출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그에게 원하는 것을 얻어 내는 일은 상당한 여유를 가지고 진행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공격에 실소가 흘러나오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먼저 굽히고 들어온 다음, 이런 방식으로 뒤통수를 쳐?’
응? 케스퍼 아글라.
난 맞은편에서 실실 웃고 있는 케스퍼를 주시했다.
이미 투자자는 남부 귀족들을 포함해 선별했고, 연락까지 모두 돌린 상태였다. 그러니 이제 무를 수도 없었다.
‘남부 귀족들의 요구는 요구대로 들어주면서, 황태자와 손잡고 내 앞길까지 막아서겠다?’
아주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마당 쓸고 동전 주웠구나.
내가 아직 아동에 포함된다는 점, 그리고 그게 이런 식으로 이용당했다는 점이 놀랍고 어이없었다.
그들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날 공격하는 이유는 뻔했다.
‘마법 루비 이상으로 북부 세력이 커지는 걸 방지하려는 거야.’
물론, 저 둘이 북부를 방해할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나’를 콕 집어 견제할 줄은 몰랐다.
‘그만큼 내가 위협적으로 느껴진다는 건가?’
난 케스퍼에게서 시선을 돌려 황태자를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황태자는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북부의 임시 가주는 이 안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군. 발언권을 줄 테니 한번 말해 봐.”
“그리리카 선황께서 추진하셨던 법의 범위가 넓어지다니. 저희 북부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습니다.”
“아니, 북부의 입장 말고. 벨라디 앨턴, 네 개인적인 입장이 궁금하다니까?”
“당연히 저 역시 그 안건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전하.”
그렇게 대답하며 난 속으로 이를 갈았다.
‘기고만장하기는.’
어차피 저 수정안으로 날 막는 것도 3년이 한계다.
그리고 그 3년 동안 내가 손가락만 빨고 있을 리 없었다.
‘그래, 오히려 잘됐어.’
일이 너무 쉽게 진행되면 재미없잖아?
이 기회에 황태자와 케스퍼를 철저히 파헤치고, 다시는 이딴 일이 없도록 방지해야지.
‘우선 윌리엄이 황태자의 사주를 받고 첩자가 되었나 진위부터 확인해야겠어.’
마지막에 누가 다시 미소 지을지, 어디 한번 가 보자고.
짜증 나는 마음 한편으로 승부욕이 끓어올랐다. 그사이, 회의의 투표가 진행되었다.
당연히 결과는 과반수 찬성으로 통과.
하지만 걸어 온 싸움에 절대 질 생각이 없는 난 포커페이스를 잃지 않으며 유유히 웃었다.
“그럼 오늘 긴급회의를 끝내겠다.”
황태자가 기분 좋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난 서두르지도, 그렇다고 느긋하지도 않은 속도로 돌아갈 채비를 한 후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그때 케스퍼와 황태자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으스대기라도 할 셈인가.’
그 몰골을 상상만 해도 이가 아득 갈렸지만, 내가 먼저 피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 바에야 그냥 참지 않고 케스퍼 얼굴에 주먹을 꽂지.’
가까워지는 두 머저리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난 술렁술렁 올라오는 얄미운 감정을 능숙하게 다스렸다.
‘난 이미 다음을 기약했다. 그러니까 이 정도는 얼마든지 웃어넘길 수 있다.’
저들이 뭘 어떻게 하든, 결국 최후의 승자는 내가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1보 후퇴한 채 얼마든지 웃어 줄 수 있다.
그렇게 자기 최면을 하며 전투용 미소를 장착하는데, 엉뚱한 방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벨라디.”
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긴급회의 내내 상황을 관망하던 프레도 공작이 서 있었다.
프레도 공작은 입가에 시원한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잠시 할 이야기도 있고 하니, 마차까지 같이 가는 건 어떻겠니?”
그 말에 난 힐끔 케스퍼와 황태자를 바라봤다.
케스퍼는 큰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황태자는 대놓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난 그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내 긍정에 프레도 공작이 황태자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나도 뒤이어 가볍게 인사했다.
“평안한 하루 보내시길.”
제멋대로인 황태자지만 인상을 찡그릴 뿐, 이런 우리를 막지 않았다.
천하의 놈도 서부의 주인에게 괜한 시비를 거는 건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내겐 잘된 거고.’
쓸데없는 감정 소비를 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회의장을 나와 프레도 공작과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이 뒤를 서부와 북부의 가신들이 거리를 두고 따라왔고.
커다란 아치형 창 너머로 햇빛이 쏟아졌다. 그걸 맞으며 앞으로 향하니, 프레도 공작이 먼저 운을 뗐다.
“폐하께서 설마 저 엉터리 수정안에 동의하셨을 줄은 몰랐어.”
“그러신가요?”
“그래. 폐하께서는 무척 합리적이고 효율을 중시하시거든. 그리리카 선황의 정책을 정치 싸움에 활용하는 것도 싫어하시고.”
그렇게 중얼거린 프레도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를 상당히 신뢰하시는 모양이야.”
“능력 있으신 분이니까요.”
그래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불었겠지.
문득 수정안이 통과되던 순간, 보란 듯이 히죽이던 황태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동적으로 한쪽 눈썹이 까딱 움직였다.
‘난 이런 걸 철저히 갚아 줘야 속이 풀리는 사람이고.’
이런 날 힐끔 본 프레도 공작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상황도 이렇게 되었으니, 일전에 나누었던 대화는 잠시 중단할 생각이니?”
“아니요. 법이 제한하는 건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모든 활동이지만, 제가 부탁드린 건 그런 게 아니니까요.”
“흐음……. 뭐, 아직은 그렇겠지.”
프레도 공작은 의미심장하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게 구체적인 목적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뭔가 꾸미고 있음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뭐, 상관없었다. 프레도 공작이 이걸 어딘가에 유출할 사람도 아니었고.
앞으로의 계획에는 서부의 협력이 지속적으로 필요했으니까.
“네가 뭘 하려는지 궁금해지는구나.”
공작의 그 말에 난 가지런히 입꼬리를 올렸다.
“저도 빨리 보여 드리고 싶은데, 아쉽게도 3년은 기다리셔야겠네요.”
“그 정도는 금방이지. 무릇 신사란 기다림의 미덕을 가져야 한단다.”
“그런가요? 모스틴은 아닌 것 같던데.”
“이런,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내 아들은 아직도 애송이인 모양이군! 네 똑 부러진 면모를 조금이라도 닮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각자의 마차에 금방 도착했다.
계속 친근한 말투를 사용하던 프레도 공작이 마지막 순간만큼은 예를 갖추며 정중히 인사했다.
“그럼 앨턴 양. 자세한 거래 조건은 서면으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 말은 내가 성인이든 아니든, 일단 동등한 거래 상대로 대하겠다는 뜻이었다.
나 역시 예를 갖추며 진중하게 답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프레도 공작님.”
그렇게 말한 후, 내가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내가 타자마자 마차가 출발했다.
난 빠르게 바뀌는 밖을 보며 툭툭 검지로 창틀을 쳤다.
‘일단…… 킬리언에게 먼저 연락해 볼까.’
오랜만에 머리가 빠릿빠릿 굴러가기 시작했다.
***
“야호-!”
“안녕, 아이닝.”
킬리언과 정보를 교환하자고 약속한 시간이 됐다.
하녀들을 방에서 내보내고 기다리니, 정령검에서 소환진이 생기며 아이닝이 튀어나왔다.
“벨라디! 잘 지냈어? 아이닝 보고 싶었어? 응? 응?”
아이닝이 내 품에 안기며 해맑게 물었다.
난 그런 사막여우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그래, 아이닝. 오늘은 킬리언이 무슨 소식을 전하라고 그랬니?”
“특별한 건 없대! 그냥 라벤더 향초를 보낼 수 있냐 물어보랬어!”
“향초? 그 정도는 바로 줄 수 있지.”
난 자리에서 일어나 향초들을 진열해 놓은 장식장에서 라벤더를 집어 건넸다. 그러자 아이닝이 꺄르르 웃으며 그걸 챙겼다.
난 그 웃음을 보며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건 황궁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을 텐데…….’
향초는 귀족들이 흔히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나도 훈련 후 마사지를 받을 때마다 피워 놓았고.
그런데 굳이 나한테 부탁했다는 건, 뭔가 일이 있는 건가?
그렇게 추측하는데 아이닝이 물었다.
“아! 긴급회의 결과 들었대! 괜찮냐고 물어봐 달래!”
“……괜찮지.”
난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
“오히려 갚아 줄 생각에 더 신이 나는걸?”
“헉, 벨라디 표정 무서워!”
아이닝의 말에 난 느긋이 표정을 수습하며 미소 지었다.
“아이닝.”
그리고 상냥한 목소리를 내며 아이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전에 킬리언에게 편지나 기록은 보낼 수 없다고 그랬지?”
“응! 황태자 때문에 안 된다고 했어!”
아이닝을 소환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었다.
그래서 난 초반에 아이닝에게 이런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종이에 정보들을 적어서 킬리언에게 전달할 수 있니? 이렇게 말로 하는 것보다 그게 더 편할 텐데.
-킬리언에게 물어볼게!
그렇게 사라진 아이닝은 잠시 후 다시 돌아와 해맑게 말했다.
-황태자가 킬리언 몰래 궁의 시종들을 시켜서 방을 뒤지고 있대! 주기적으로!
-방을 뒤진다고?
-응! 마법 다이아몬드를 킬리언이 숨겼다고 확신해서 그러는 거래! 킬리언 궁의 모든 사용인은 전부 황태자의 사람이라 방심할 수 없다고 그랬어!
-대신 킬리언에게는 매혹이 있잖아.
-으음, 매혹을 쓰면 타인에게 쉽게 호감을 살 수는 있지마안…….
-그래. 호감 정도로는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어길 수 없겠구나.
-응! 단편적인 정보는 바로 불태우면 되니 그나마 괜찮지만, 두고두고 봐야 하는 정보는 보관이 마땅치 않대!
그 말을 듣자마자 한숨이 먼저 나왔었다.
‘만약 내가 없었으면 이 싸움은 킬리언에게 무척 불리하게 흘러갔겠어.’
황궁은 이미 오래전, 황태자가 장악한 모양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킬리언을 향한 황태자의 감시는 생각 이상이었다.
정말 단순히 황후의 다이아에 대한 물증을 찾기 위해 저러는 걸까? 아니면 놈에게 또 다른 목표가 있는 걸까?
‘황태자에 대한 건 이제 차차 알아 가면 되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닝에게 말했다.
“그럼 킬리언이 정보를 적어서 나에게 보내는 건?”
“벨라디에게?”
“그래. 내가 킬리언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세 가지야.”
난 아이닝이 이해하기 편하게 손가락 세 개를 쫙 편 후, 하나하나 접으며 말했다.
“하나, 황태자의 최측근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세세한 건 필요 없고, 직책과 이름 정도만 적어서 나에게 보내 달라고 해 줘.”
“응!”
“둘, 킬리언 본인에 대한 정보도 필요해. 본인의 버릇과 평소 뭘 하고 지내는지 일정을 정리해서 달라고 말해 줘.”
“응! 그건 아이닝도 도와줄 수 있어!”
“좋아. 마지막 셋은 이거야.”
난 아이닝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 말을 들은 아이닝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킬리언에게 알려 줄게!”
아이닝은 그렇게 말하며 곧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