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64화 (65/197)

64.

이 사태를 이해하려면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대략 2시간 전.

황실 측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난 북부의 대표로서 그 회의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했고.

황실 긴급회의를 개최할 수 있는 이는 딱 두 명뿐이다.

황제와 황태자.

이번 회의의 개최자는 황태자였다.

‘예감이 좋지 않아.’

황궁으로 가는 길, 난 찝찝함과 불안감을 숨길 수 없었다.

긴급회의는 수도에 사는 모든 가주들을 급하게 모으는 만큼 연마다 횟수 제한이 있었다. 그런 걸 지금 열었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안건이라는 소린데…….

하지만 원작의 흐름과 시기상 긴급회의가 열릴 만큼 인상 깊은 사건은 없었다.

‘물론 지금은 원작과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원작에서 긴급회의가 처음으로 묘사된 건 네시아가 정령과 계약한 후였다. 안건은 당연히 ‘새로 탄생한 정령사의 대우에 관하여’.

그러니 처음 긴급회의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아이가 벌써 셰넌과 계약을 했나?’ 이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의문을 지웠다.

‘만약 그랬다면, 진작 아버지가 수도로 돌아오셨을 거야.’

아니면 최소한 편지로나마 내게 소식을 알렸겠지.

하지만 북부는 루비 외의 특별한 소식이 없었다.

‘그럼 네시아에 관한 건 아니라는 건데…….’

무엇보다 난 이 회의의 개최자가 황태자라는 점이 제일 찝찝했다.

황태자는 가장 먼저 이상 행동을 보인 장본인이었으니까.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인상을 찡그리며 고민하는 사이, 내가 타고 있던 마차가 중앙궁에 도착했다.

난 마차에서 내려 곧바로 대회의장으로 향했다. 다른 마차를 타고 따라온 리켄 남작과 북부의 가신들도 부랴부랴 내 발걸음에 속도를 맞췄다.

내가 큰 보폭으로 다가오자, 대회의장의 입구를 지키던 시종들이 재빨리 문을 열었다. 그리고 보이는 회의장에는 벌써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언제나 회의에 여유롭게 참석하던 황태자도 이번에는 의기양양한 자세로 자리에 앉아 있었고.

‘오늘은 킬리언이 없네.’

그의 옆에 빈 의자를 살피는데, 황태자가 대놓고 혀를 찼다.

“북부가 제일 늦었군.”

“제국의 작은 주인이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앉게.”

그 말에 난 살짝 무릎을 숙이며 예를 갖춘 후, 자리로 향했다.

“…?”

그런데 테이블 위로 웬 보고서가 놓여져 있는 게 아닌가.

살펴보니 이 원탁 테이블 외의 모든 자리에도 보고서가 올려져 있었다.

일단 착석하니, 황태자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모았다.

“오늘 긴급회의를 소집한 이유는 기존 법안을 수정하기 위해서네.”

그 말에 모두들 황태자를 주목했다.

황태자는 턱 끝을 까딱이며 말했다.

“우선 앞에 있는 보고서를 먼저 읽어 봐.”

난 황태자에게서 시선을 떼 보고서를 넘겼다. 그리고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다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이건…….’

안에 적힌 내용은 ‘아동 노동법’에 관한 것들이었다.

‘아동 노동법’은 그리리카 선황이 만든 법안 중 하나다.

전통적인 농촌 사회였던 데커딜 제국은 마법 공학이 발달하며 점점 공장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공업 지역이 생겨나며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농촌 사회의 영향으로 애초에 어린아이들의 노동이 당연시되던 나라였다. 그런 때 공장으로 단순 노동이 증가했으니, 귀족들은 임금이 싼 아이들만 고용하려 들었다.

‘그리고 그리리카 선황은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은 이였지.’

아이들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려면 당연히 자유 시간이 확보되어야 했다.

그리리카 선황은 이를 위해 아동의 노동 시간을 제한하고, 작업 환경을 개선하는 등의 내용이 적힌 ‘아동 노동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법은 우여곡절 끝에 통과되었다.

‘그래서 성인 이전의 아이들은 일정 시간 이상 노동을 할 수 없어.’

그런데 왜 지금 이 법안을 들고 온 거지?

묘한 불길함을 느낀 난 보고서를 빠르게 넘겨 뒤의 내용을 살폈다. 그리고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아동 노동법’의 대상 범위를…… 확장한다고?’

보고서의 뒷장에는 이 법안을 수정해, 평민의 아이들 뿐 아니라 제국의 모든 아이들에게 적용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 말은 즉, 귀족에게도 이걸 적용시키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전생을 자각한 후 거의 잊고 있었지만…….

‘아직 난 성인이 아니야.’

이 법을 귀족에게 적용한다면, 내 행동에는 꼼짝없이 제한이 생기고 만다.

난 황태자와 케스퍼를 바라봤다. 그 둘은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더욱 당당한 미소를 지었다.

저 표정을 보아하니, 이건 날 저격하기 위해 만든 수정안이 분명했다.

‘뜬금없이 긴급회의를 연 이유가 이거였군.’

법안의 수정은 1년에 단 한 번, 황제가 주도하는 대 가주 회의에서만 가능했다.

하지만 단 하나, 예외의 경우가 바로 이 긴급회의다.

대신 긴급회의에서 통과한 법은 영구적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3년의 실험 기간을 거친 후, 대 가주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가결을 정하지.’

하지만 저 둘에게는 대 가주 회의의 가결이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내 성인식까지 남은 기간도 3년.

그러니 일단 이 수정안을 통과시키면 딱 알맞은 기간 동안 내 발목에 족쇄를 채울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의미 없는 수정안이 통과될 리가…….’

애초에 이 법은 극단적인 노동 환경에 노출된 평민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법이다.

그리고 기득권층인 귀족 아이들은 이런 상황에 놓일 리 없으니, 이 수정안은 유야무야나 다름없었다.

때마침 귀족 몇이 여러 의문을 표했다.

“이는 평민들을 위해 만든 법 아닙니까. 굳이 저희에게 적용할 필요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적힌 내용을 보니, 노동 시간이 제한되는 평민과 다르게 귀족의 경우 ‘교육을 제외한 모든 영리 활동을 제한한다’고 적혀 있는데. 이건 무슨 기준으로 정해지는 거지요?”

그 의문에 대표적인 황태자파 귀족들이 반박하기 시작했다.

“그 기준이 뭐 어렵습니까. 말 그대로 아이들의 독자적인 개인 활동을 막는다는 거지요.”

“흠, 안 그래도 요즘 성인이 채 되지도 않은 자제들이 사업을 한다고 섣불리 움직이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다 실패하고 좌절하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남부 귀족들이 열성적이고 큰 목소리로 떠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의견에 하나둘 다른 귀족들도 긍정의 사인을 보냈다.

“저희 같은 어른들이 그런 아이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누가 보호하겠습니까?”

“아주 시의적절한 수정안입니다.”

우스운 점은 저들 모두가 황태자의 세력은 아니라는 점이다.

대신 공통점을 하나 꼽자면, 자식이 장성하고 손자는 어려 저 수정안과 큰 연관이 없다는 것.

저절로 느낌이 왔다.

‘다 한패로군.’

내 속마음과 동시에 뒤에 앉아 있던 리켄 남작이 속삭였다.

“아무래도 황태자 전하께서 저들을 전부 포섭한 모양입니다. 긴급회의는 대 가주 회의와 다르게 참석한 가신들의 과반수가 찬성하면 법안이 통과되니.”

리켄 남작은 한숨을 푹 쉬었다.

“과거부터 이런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자신들에게 필요하거나, 반대 세력을 방해하는 법을 통과시키려 서로를 포섭할 때가.”

그리리카 선황께서도 쓰셨던 방법이고요. 리켄 남작은 나지막이 말하며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남작에게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노련한 그는 진작 알아챘을 것이다.

‘내가 루비 외에 다른 일을 준비 중이었다는 걸.’

난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치솟는 짜증을 잠재웠다.

겉으로는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바로 뒤에 있던 리켄 남작은 내 기분을 읽은 모양이었다.

잠시 헛기침을 한 그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발언권을 얻었다.

“전하, ‘아동 노동법’은 그리리카 선황의 위대한 포부가 담긴 중요한 법안입니다. 이를 수정하는 걸 폐하께서 정말 동의하신 겁니까?”

이 긴급회의는 황태자가 소집했고, 과반수의 인원도 포섭했으니 법을 통과시킬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황제는 언제든 긴급회의에서 통과한 임시 법안을 무효화시키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만약 황제가 지금 상황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추후 황제와의 거래를 통해 수정안을 취소시킬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리켄 남작은 이걸 염두에 두고 물어봤겠지.’

하지만 난 회의적이었다. 오늘 날 견제하려고 단단히 준비해 온 황태자였다. 그런데 저 경우를 대비하지 않을 리가.

내 추측대로 황태자는 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이건 폐하께서도 동의하신 일이니, 걱정 말도록.”

그 말에 의문을 표하던 귀족들도 하나둘 찬성의 의견을 보였다.

“으음, 폐하까지 찬성하셨다면야.”

“어차피 임시고.”

“한번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그래, 다 저런 반응이겠지.

애초에 엉성해 보이는 이 수정안은 귀족들에게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해 철저히 계산되어 만들어졌다. 테스트 기간이 있는 긴급회의를 이용한 것도 그렇고.

‘기존 법처럼 노동 시간으로 제한한 것이 아니라 범위를 일부러 뭉뚱그린 것도 그렇지.’

-교육을 제외한 모든 영리 활동을 제한한다.

이건 부모가 교육을 목적으로 일을 가르치는 거라면, 뭐든 허용이라는 뜻이었다.

내 또래의 귀족 자제들은 슬슬 본격적으로 가문의 사업을 이어받는다. 그러니 이런 방향으로 수정되면 이들 역시 거부감을 가지지 않을 테지.

슬슬 내 뒤편에서도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나쁜 수정안도 아니오.”

“그러게 말입니다. 안 그래도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업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으니,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도 나쁠 것 없지요.”

“우리 북부의 루비 사업은 앨턴 공작님의 허락하에 진행되는 것이니 해당되지도 않고요.”

그래, 루비는 문제없었다.

하지만 내 목표는 단순히 가문의 사업을 이어받는 게 아니었다.

‘난 누구와도 관련 없이, 독자적으로 능력을 입증해야 해.’

오로지 내 힘만으로 모든 걸 뒤집어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동의하에 일을 진행해야 한다고?

아동법에 의거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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