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63화 (64/197)

63.

아무래도 시온이 본인 성격에 못 이겨 오지랖을 좀 부린 모양이었다.

‘물론, 내게 추궁당할 각오도 끝냈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며 멜도르를 가만히 쳐다봤다.

조금 웃긴 점은, 자신을 사용해 달라고 말하는 멜도르의 두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내게 용서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더 원하는 것처럼.’

……난 정말로 지금 용서하려고 했어.

하지만 본인이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란 그만큼의 믿음을 보여 줘야 한다는 뜻이야.”

“뭐든 열심히 할게!”

멜도르가 힘차게 외쳤다. 날 향한 눈빛에는 이제 또렷한 동경의 빛이 아른거렸다.

“더너스 로건보다도! 로버보다도! 내가 훨씬 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될 거야!”

그렇게 말한 멜도르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래서! 꼭! 누나의 오른팔 자리를 내가 차지하고 말 거야!”

내 오른팔이라니.

누가 나와 같은 혈육 아니랄까 봐, 배포도 남달랐다.

멜도르의 얼굴은 어느새 열정으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난 그걸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이왕 시온에게 조언까지 구했으니 기회를 줄게.”

“정말?! ……아니!”

내 말에 눈을 반짝이던 멜도르는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말을 바꿨다.

“나, 난 아글라 공이 시킨 대로 한 적 없는데?!”

사실 시온을 만나서 조언을 구했다고 말해도 큰 문제 없었다. 특별히 이상하지도 않았고.

그런데 멜도르는 괜히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내 시선을 피하더니, 이윽고 품을 뒤적이는 등 딴짓을 했다.

난 그걸 보며 피식 웃었다.

‘시온이 비밀로 하라고 했나 보네.’

바보 같은 시온. 그래 봤자 내 추궁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텐데.

난 멜도르가 허둥지둥거리는 꼴을 가만히 구경했다. 그런데 멜도르는 단순히 당황스러워서 품을 뒤적인 게 아닌 모양이다.

잠시 손을 더듬거리던 놈은 품 안에서 조심스럽게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이, 이거…….”

얇은 직육면체 모양의 선물 상자 위에는 금색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멜도르가 자주 가는 마탑 상점의 로고였다.

난 그 상자를 받아 들며 물었다.

“이게 뭔데?”

내 질문에 멜도르는 발그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선물인데…….”

“선물? 내 생일도 잊었니?”

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묻자 멜도르는 울컥하며 외쳤다.

“아니야! 기억하고 있어!”

“그럼 이건?”

“그, 그냥 산 거야! 마탑 상점 갔다가 누나 생각이 나서!”

여기까지 말한 멜도르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익었다.

놈은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는 항상 외출할 때마다 선물을 챙겨 줬으니까.”

발음이 뭉개졌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난 잠시 시선을 내려 상자를 쓰다듬었다.

‘분명 저 이야기도 시온이 언급해 줬겠지.’

멜도르는 스스로 그걸 떠올릴 만큼 세심한 아이가 아니니까.

참고로 난 항상 가족의 선물을 챙긴 걸, 결국 자기만족이라 여겼다. 그래야 그들의 반응이 점점 미미해져도 상처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가…….’

이렇게 되돌려 받으니 다시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을 정의 내리기 힘들어 잠시 상자를 보고 있으려니, 멜도르가 나를 재촉했다.

“얼른 열어 봐.”

멜도르는 어느새 두근거림 가득한 표정으로 날 마주 보고 있었다.

난 천천히 상자의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내 눈과 비슷한 색의 사냥용 장갑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갑?”

난 장갑을 집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장갑의 손목 부근에는 총 3개의 자수정이 박혀 있었다.

내가 자수정을 쓰다듬자 멜도르가 신나서 입을 열었다.

“그거 마법 자수정인데, 각각 필요한 마법을 담을 수 있대! 유용하겠지?!”

그 설명에 난 짙게 웃어 보였다.

‘재밌네.’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원작에서는 지금처럼 멜도르가 첫째에게 붉은 사냥용 장갑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후에 개최될 가을 사냥 대회에서 그 장갑은 큰 도움이 되었고.

‘그래, 그 장갑이 분명해.’

이 장갑에 대한 정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원작처럼 멜도르에게 선물받을 줄은 몰랐다.

그냥 때가 되었을 때, 내가 직접 사려고 했는데…….

난 장갑을 한번 착용해 봤다. 조금 헐렁이던 장갑은 마법 장갑답게 곧 내 손에 딱 맞게 사이즈가 조절되었다.

손을 이리저리 돌리며 그걸 확인한 난 멜도르에게 방긋 웃어 주었다.

“고마워, 멜도르. 너에게 이런 것도 받아 보고 별일이네.”

내 말에 멜도르가 헛기침을 하며 가슴을 쭉 내밀었다.

“크흠! 이 정도는 어렵지 않지.”

난 뿌듯해하는 멜도르에게서 시선을 떼 장갑을 잘 챙겨 두었다.

킬리언의 이야기 덕분에 원작의 일부가 아주 완벽히 틀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만큼 다른 부분이 원래대로 돌아와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가령…….’

내가 이 세계관의 최강자가 될 거라는 점.

앨턴 공작가가 제국 내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이 된다는 점.

그리고.

‘멜도르라는 캐릭터가 첫째를 무한정으로 믿고 따른다는 것 역시.’

결국 멜도르는 원작대로 나를 동경하게 되고, 내 곁으로 오고 싶어 했다.

이 장갑을 보니 앞으로 멜도르가 보여 줄 활약들이 기대되었다.

‘멜도르가 자진해서 내 곁에 온 덕분에 계획이 더 빠르게 돌아가겠어.’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움직여도 괜찮을 것 같다. 지금까지 나 개인을 위해 움직였다면, 이제는 앨턴 가문을 대표해 움직일 차례였다.

내가 가문의 임시 가주로서 역사에 기록될 공을 만들어야, 후계자가 될 명분을 공고히 세울 수 있으니까.

‘마도 기술을 이용해 입지를 다진 그리리카 선황처럼.’

여자라는 이유로 이렇게 빙 돌아가는 것이 탐탁지 않았지만, 큰 걱정은 없었다.

앨턴 가문의 첫째가 가주 자리에 오르는 것까지 결국, 원작과 똑같이 흘러갈 테니.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난 내가 승리할 미래를 떠올리며 멜도르를 바라봤다.

“멜도르, 날 배신하지 마.”

앓던 이가 뽑힌 듯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멜도르가 내 말에 환하게 웃었다.

“응, 누나!”

멜도르는 나와는 다르게 가식적으로 웃는 일이 없는 아이였다. 그렇다 보니 놈이 저렇게 즐겁게 웃는 걸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나도 멜도르의 웃음에 웃음으로 화답했다.

덕분일까, 우리 남매 사이에는 처음으로 평화로운 분위기가 맴돌았다.

***

마법 루비 사업은 차근차근 이루어졌다.

애초에 마법 루비는 원작과 비슷한 시기에 발견되었으니, 그 루트만 따라가면 성공은 확보된 것이었다.

‘뭐, 남부와의 트러블은 계산 밖이었지만…….’

그래도 그것 역시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얼마 안 가 케스퍼가 호화로운 선물과 함께 몸소 날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날은 정말 미안했습니다, 앨턴 양. 제 어리석은 발언과 남부의 실수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와 독대를 요청한 케스퍼는 말투까지 바꾸며 공손히 사과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부 역시 마법 루비에 투자하고 싶다고 밝혔다.

사실 이렇게 케스퍼가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건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케스퍼는 자존심만 내세우는 얼간이가 아니라 고개 숙여야 할 때를 아는 인물이니까.’

그렇지 않으면 남부 사업을 그렇게 키울 수 없었겠지.

물론 조금 아쉬운 일이다.

‘케스퍼가 절대 굽히지 않는 사람이었으면 더 만만했을 텐데.’

하여튼 이렇게 사과하는 이를 명분 없이 쳐 내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나 역시 남부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더 나았고.

‘지금 당장 대량의 텔레포트 진으로 촘촘히 엮인 유통망을 포기하기에는 일러.’

그래서 케스퍼의 사과를 겉으로나마 받아들였고, 투자자를 고르는 과정에서 남부를 차별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아글라 공작가를 뽑을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이런 내 생각을 케스퍼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케스퍼는 별다른 말 없이 감사하다는 답과 함께 돌아갔다.

‘어차피 아글라 공작가는 새로 뚫은 무역로를 안정시키는 데에 집중해야 해.’

그러니 루비 사업에 투자를 못 했다고 해서 아쉬울 것 없었다. 하지만 아글라 공작가가 이끄는 남부 귀족들은 사정이 다르지.

그들은 분명 이미 포화 상태인 남부가 아닌,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루비 사업에 투자하고 싶었을 것이다.

케스퍼는 그런 가신들의 의견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을 테고.

‘그래서 날 찾아왔겠지.’

그 덕분에 남부의 귀족들이 루비 사업에서 배제되는 걸 막았으니 본인 목적은 이룬 셈이다.

이렇듯 루비의 원활한 유통을 위해 남부와 사이도 복구했고, 티벤 후작에게 뛰어난 보석 장인들도 소개받았고.

리켄 남작을 비롯한 북부의 가신들과 끝없는 회의를 통해 루비 사업의 투자자들까지 선별했다. 이제 북부에서 넘어올 루비들을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이렇게 급한 일은 전부 처리했으니.’

슬슬 내 개인 사업을 시작해 볼까?

…하고 프레도 공작가를 방문한 것이 어제.

프레도 공작에게 간략히 내가 원하는 바를 말했고, 공작도 나름 긍정의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차차 의견을 조율해 나가기로 했는데…….

‘이렇게 초를 치게 될 줄이야.’

난 눈앞의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고, 날 내려다본 상대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입을 열었다.

“북부의 임시 가주는 이 안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군. 발언권을 줄 테니 한번 말해 봐.”

그 말에 난 능숙하게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유지했다.

“그리리카 선황께서 추진하셨던 법의 범위가 넓어지다니. 저희 북부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습니다.”

“아니, 북부의 입장 말고.”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서 숨기지 않는 통쾌함이 느껴졌다.

“벨라디 앨턴, 네 개인적인 입장이 궁금하다니까?”

그 말에 테이블 아래에 감춰 두었던 주먹을 꽈악 쥐었다.

난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당연히 저 역시 그 안건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전하.”

내 말에 상대, 황태자는 거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맞은편에서는 케스퍼가 피식 웃으며 날 주시하고 있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