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황실의 모든 공간에는 마력 감지 시스템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킬리언이 마법 다이아를 한 번이라도 썼다가는 전부 기록으로 남을 거야.’
설령 마법 다이아를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마음 편하게 황궁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킬리언은 소년 시절, 황후궁에 한 번 왔다 간 전적이 있었다.
‘분명 그게 기록에 남았을 테고.’
킬리언의 말에 따르면 기록에 사람과 장소가 표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의심 많은 황태자는 아직도 그를 의심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킬리언의 이동에는 제약이 많았다.
그에 반해 자연 친화력은 감지할 이도 수단도 없으니.
‘일단은 안전하게 아이닝의 도움을 받아야겠어.’
마침 나한테 정령의 마법이 담긴 이 검이 있으니 망정이지, 없었으면 지금 방법도 이용하기 힘들 뻔했다.
뭐, 사실 큰 문제는 아니지만.
방법이 없으면 만들면 그만이니까.
‘가령…… 연락책으로 킬리언 주위에 이성들을 심어 놓는다든가?’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다시 벽면에 걸어 두는데,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벨라디 님, 소공작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스티아의 목소리였다.
난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멜도르가?’
“응접실로 안내해.”
“예, 벨라디 님.”
스티아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난 습관처럼 옷매무새를 간단히 정리한 후, 방 안에 있는 또 다른 문을 열었다. 2층 응접실과 내 방은 이 문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기에 문을 여니 바로 응접실이 보였다.
안에는 오랜만에 보는 멜도르가 서 있었다.
“이제 돌아다닐 수 있나 보네.”
그날 이후, 놈이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관심만 받으며 자란 아이가 처음으로 자기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마주하고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고작 그런 어리광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 굳이 멜도르를 찾지 않은 참이었다.
“무슨 일이야?”
난 그렇게 말하며 멜도르 쪽으로 향했다.
“누나한테 할 말이 있어.”
그 말에 멜도르를 바라봤다. 그새 키가 컸는지 전보다 눈높이가 가까워져 있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럴까.’
녀석의 얼굴이 나름 결연했다.
난 상석 소파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전처럼 무의미하게 끝날 대화는 시작할 가치가 없는데.”
내 말에 발끈할 줄 알았던 멜도르가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안 그래.”
그 반응에 난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
“응!”
내 허락과 함께 멜도르가 손님용 소파에 앉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내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멜도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잔뜩 긴장한 걸 보니 대충 감이 왔다.
‘뭘 주워들었는지 몰라도, 사과 비슷한 걸 하려는 모양이군.’
이런 내 예상은 완벽하게 적중했다.
“미안해, 누나.”
멜도르는 나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난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고개까지 숙일 줄은 몰랐는데.’
전에 비하면 훨씬 제대로 된 사과였다.
하지만 난 아직 약간의 회의감을 가진 채였다.
‘지금 내가 놈을 받아들여서, 얻는 게 뭐지?’
다시 가족을 사랑하는 고운 마음씨? 형제간의 사이 좋은 우애?
내게는 이제 필요 없는 것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고, 저절로 조소가 나왔다.
‘그냥 내보낼까.’
그렇게 고민하는데, 멜도르가 입을 열었다.
“내가 그동안…… 누나한테 너무 버릇없고 함부로 대했어. 누나를 무시하고 상처 줘서 미안해.”
“이번에는 저자세로 나오는 거야?”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렇게 답한 멜도르가 심호흡을 하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에 누나가 말했던 것처럼 사람에게 화풀이하면 안 됐었는데, 내가 그걸 미처 몰랐어. 미안해.”
“……용케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구나.”
멜도르의 말은 확실히 예상외였다.
난 멜도르를 내보내겠다는 생각을 치운 채,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리고 물었다.
“내가 검을 배우니 없던 호감이 절로 생기니? 그래서 사과를 하는 거야? 넌 기사를 좋아하잖아.”
“그냥 기사가 좋은 게 아니야.”
멜도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실력이 매우 출중해서 다른 이들을 압살해 버리는 기사가 좋은 거지.”
그래, 네 취향 참 확고하다.
난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멜도르를 주시했다.
“그럼 내가 검을 배우지 않았으면?”
“어?”
“내가 검을 배우지 않았으면, 넌 나한테 사과할 마음이 들었을까?”
그 말에 멜도르는 잠시 머뭇거렸다.
난 차분히 멜도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런 내 태도에 용기를 얻었는지 멜도르는 아까보다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부정은 못 하겠어. 누나가 검을 배운 후부터 다르게 보인 건 사실이니까.”
항상 성질을 내거나 인상을 찡그리기만 했던 멜도르가 드물게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난 가만히 멜도르의 말에 집중했다.
“그래도…… 단지 검 때문에 누나와 가까워지고 싶어진 건 아니야.”
“그럼?”
“누나가 가진 그릇이 나보다 크다는 걸, 이제는 알아.”
멜도르는 조곤조곤 본인의 생각을 입에 담았다.
“그때 더너스 로건과의 대련을 보고 깨달았어. 누나는 결국 법을 바꾸고 우리 가문의 가주가 될 사람이라는 거.”
“…….”
“난 한 번도 나 외의 다른 사람이 가주가 된다고 생각한 적 없어. 상상해 본 적도 없고. 그런데 순간 가주가 된 누나를 떠올리니까…….”
멜도르의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나도…….”
말하다 보니 부끄러워졌는지, 놈은 자신의 바지를 꽉 쥐어 잡았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도 누나 옆에 있고 싶었어.”
“……내 옆에 있고 싶다고?”
내 되물음에 멜도르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보다 누나가 더 가주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야. 그리고 난 그 옆에 당당히 서 있고 싶어. 누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그렇게 외친 멜도르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멜도르는 차마 내 눈을 보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난 놈의 정수리를 가만히 보다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잠깐! 지금 창피해서 죽고 싶으니까 아무런 말도 하지 마!”
멜도르는 그렇게 외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고는 괴로운 신음을 내며 머리를 헤집었다.
슬슬 사춘기에 접어들 아이가 저렇게 속마음을 솔직히 말한다는 게, 꽤나 용기 있는 행동임을 알았다.
난 기꺼이 멜도르의 의견을 수용해 입을 다물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좀 놀랍네.’
사실 멜도르가 저런 생각을 할 줄 몰랐다.
언제까지고 놈은 날 무시할 거라 여겼고, 난 그런 놈을 쳐 내면 그뿐이라고 판단했으니까.
‘심지어 난 최근 멜도르의 호의를 거절하기도 했었지.’
물론 그 호의가 제대로 된 건 아니었지만.
여하튼 그걸로 놈의 자존심은 큰 스크래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다시 한번 다가올 줄이야.’
그것도 진심 어린 사과를 배우고서는.
부끄러워 죽으려 하는 멜도르를 보며 난 새삼스러움을 느꼈다.
‘저 녀석도 성장하는구나.’
뭔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아예 메말라 죽은 줄 알았던 식물 사이로 새로운 싹이 피어오른 걸 발견한 기분?
물론 과거 멜도르의 언행을 떠올리면 여전히 짜증이 치솟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반성하는 모양이야.’
멜도르를 향한 마음의 추가 조금 긍정적인 방향으로 기울었다.
‘기회 정도는 줘 볼까?’
물론 이게 멜도르를 다시 동생으로 받아들이고 사이좋은 형제로 지내겠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아이에게 너무 회의적으로 대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날 인정하는 멜도르를 보는 게 기분 나쁘지 않아.’
오히려 과거를 조금이나마 보상받은 느낌도 들고.
그때 멜도르가 얼굴을 감싸고 있던 두 손에서 빼꼼 눈만 내밀고는 날 바라봤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달아오른 이마와 대비되는 푸른 눈은 멜도르 특유의 천진함이 담겨 있었다.
그 눈이 처음으로 얄밉다고 느껴지지 않아 신기했다.
“용서를 원하는 거야?”
난 그렇게 물었다.
만약 그렇다면, 사과를 받아 주겠다고 말할 참이었다.
결국 근본적으로 날 상처 준 이들은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그러니 이쯤에서 멜도르의 사과를 받아 줄 의향이 있었다.
내 말에 멜도르가 얼굴에서 완전히 손을 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누나가 날 용서해 줬으면 좋겠어.”
그런데 놈은 그 뒤로 다시 예상치 못한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원하지 않으면 굳이 용서하지 마.”
“뭐?”
난 가만히 멜도르를 바라봤다.
저건 내가 아는 ‘오만한 온실 속 왕자님’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내가 먼저 용서를 입에 올리면 당연히 바로 승낙할 줄 알았는데?
나와 시선을 마주한 멜도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한 눈으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대신 날 사용해 줘.”
“사용해 달라고?”
“누나가 원하는 만큼 날 이용해. 가주가 되기 위해 법을 바꿀 때도 좋고, 마법에 관련된 아무 일이나 시켜도 좋아. 누나 말은 뭐든지 따를게.”
난 가만히 멜도르를 주시했다.
멜도르는 내 시선을 올곧이 받으며 말을 이었다.
“꼭 날 용서하지 않아도 좋아. 그래도 내 쓸모를 입증할 기회를 주면 좋겠어.”
장담할 수 있었다.
저 생각은 분명 멜도르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멜도르는 언제나 남들의 시중을 받으며 살아온 아이니까.’
그런 아이에게 자신이 사용된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할 리 없었다.
그런데 본인이 먼저 저런 말을 꺼내다니, 이건 필시 누군가가 조언했을 확률이 높았다.
-벨라디한테 용서를 받으려면 일단 나를 사용해 달라고 말해 봐. 쓸모를 입증할 수 있게 기회라도 달라고.
대략 이렇게?
상대는 내가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이를 곁에 둘 리 없다고 판단한 눈치였다.
딱히 반박할 생각은 없었다.
‘나름 정확한 판단이라서.’
그래도 저 조언에 틀린 점이 있다면, 내가 그렇게까지 인간미 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칼같이 대하는 건 나이 먹어서까지 철없는 어른 한정이고.
‘나도 마음 깊이 반성하는 아이에게는 관용을 베푸는 사람이라고.’
하여튼 저런 조언을 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후보로는 지난 1년간 내 곁을 지킨 제플린과 스티아. 그리고 나와 가장 마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스틴과 시온.
이 네 명 중, 멜도르가 무시하지 않고 조언을 따를 만한 이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시온 아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