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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61화 (62/197)

61.

시온은 새삼 자신의 친구가 어디까지 냉정해질 수 있는지 떠올렸다.

한번 목표를 정한 벨라디는 정말 거침없고 과감했다.

일례로 그녀가 사교계에 막 데뷔했을 무렵, 이런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너도 알지, 시온? 난 내가 속한 무리에서는 정상을 차지해야 만족한다는 거.

그렇게 말한 벨라디는 사람을 모으기 시작하더니, 채 반년이 지나기도 전에 명실상부 사교계의 실세가 되어 버렸다.

그 과정에는 물론 앨턴 공녀라는 신분의 힘도 한몫을 했겠지. 하지만 모든 공녀가 저런 단기간에 세력을 형성하고 리더가 될 수는 없었다.

‘거기에 그만큼의 결속력과 충성심을 다지지도 못할 거야.’

벨라디를 따르는 영애들은 거의 그녀를 우상시하고 있었다. 이건 벨라디의 추진력과 장악력이 얼마나 높은지 보여 주는 단편적인 사례였다.

‘그 벨라디가 이제 사교계를 벗어나 더 큰 자리에 도전하려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멜도르의 사과가 귀에 들어가기는 할까? 가뜩이나 멜도르가 쌓아 온 잘못들이 어마어마한데?

시온은 생각에서 빠져나와 멜도르를 바라봤다.

멜도르는 특유의 천진한 눈으로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흠…….”

그 눈빛을 보며 시온은 그나마 기회라도 받을 마법의 키워드를 떠올렸다.

“멜도르, 벨라디에게 정말 용서받고 싶은 거지?”

“네.”

이제 온전히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멜도르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 확고한 모습을 본 후, 시온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에는 사과할 때 이렇게 덧붙여 봐.”

***

킬리언과 대화를 끝내자 날이 어둑해졌다. 돌아갈 시간이 되어, 킬리언의 궁에서 나와 대기하고 있던 우리 가문 마차에 올라탔다.

함께 밖으로 나온 킬리언은 부드럽게 웃으며 날 배웅했다.

“오늘 정말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벨라디.”

“저도 그래요, 킬리언.”

“그리고 여기.”

킬리언이 내게 고급스러운 편지 봉투 한 장을 내밀었다.

“중요한 정보들은 아까 말씀드린 방법을 통해 전달하겠습니다. 이 안에 든 것을 이용하면 돼요.”

“알겠어요.”

그렇게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킬리언이 몸소 마차의 문을 닫았다. 곧 마차가 출발했다.

덜커덩거리는 마차의 흐름에 몸을 맡기다 잠시 뒤를 돌아봤다. 킬리언은 그때처럼 가만히 서서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그런 킬리언을 잠시 마주 보다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킬리언과 이런 관계가 될 줄이야.’

계획에 없던 일이었지만, 마음에 들었다.

자고로 포부와 야망은 클수록 좋은 법. 일을 크게 벌여도 책임질 자신이 있는 난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걸쳤다.

‘서로의 이해득실이 맞으니, 시너지를 기대해도 좋겠어.’

난 킬리언이 남긴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정령사인 것도 내 판단에 한몫했다.

정령들은 기본적으로 신의를 지키고 선한 자들을 좋아했다. 그러니 아이닝의 선택은 일종의 보증과 같았다.

‘날 선택했다는 점에서 사람 보는 안목도 있고.’

원작에서 킬리언은 능력 있는 인물이라 언급되었으니 일을 그르치지는 않겠지.

무엇보다 지금 내가 신경 쓸 문제는 킬리언의 자질이 아니었다.

난 마차 안에서 오늘 나눈 대화를 곱씹으며 황태자를 어떤 방향으로 파헤칠까 고민했다.

‘꼴에 황족이라고 가드가 단단하던데.’

일전에 스티아를 시켜 킬리언의 과거를 조사할 때, 황태자도 얼핏 알아보라고 일렀다. 하지만 황태자는 공식적인 과거와 사소한 스캔들 외에는 영 접근하기 쉽지 않은 인물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마차가 부드럽게 멈췄다. 창밖으로 익숙한 현관이 보이니, 그새 저택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마차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오자 날 마중 나온 로버가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벨라디 님.”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섬광처럼 정보 하나가 스쳐 갔다.

‘그러고 보니…….’

난 대답 없이 로버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로버가 몸이 움찔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 제가 무슨 실수한 거라도 있습니까?”

그 물음에 난 시선을 돌려 앞을 본 후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내 말에 로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계단을 오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그 작자가 있었지.’

로버와 찰스 이전에 이 저택의 총집사를 맡았던 인물.

내가 태어나고 얼마 안 가 감시자들에게 처리된 가문의 배신자.

‘윌리엄.’

윌리엄처럼 우리 가문을 배신한 스파이는 한 명 더 있다.

아직도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어머니의 전 호위 기사.

놈을 심문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결국 스파이는 모든 일을 실토해야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본인 조부모와 여동생들의 신상이 전부 나한테 있는데, 뭐 어쩌겠어.’

정말 놈의 가족을 건들 생각은 없었지만, 스파이의 입을 열기 위해 그 정도 연기는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얻어 낸 스파이의 실토에 따르면 황태자 측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우리 가문에 첩자를 심으려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윌리엄도 황태자의 사주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어.’

한번 윌리엄을 조사해 봐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현관문에 도달하자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문을 열었다.

내부로 들어선 내게 일렬로 가지런히 서 있던 사용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벨라디 님.”

원래부터 그들은 내게 충성스러웠지만, 지금은 가주인 아버지에게 행하는 것처럼 모든 태도가 지극히 공손했다.

이것만으로도 내 위치가 얼마나 상승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냥 공작의 딸이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환대네.’

물론 여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이 대접을 유지하려면 난 가지고 있는 패를 이용해 더더욱 위로 치고 올라가야 하니까.

‘일단 킬리언과의 연락 수단을 확인해야겠어.’

방으로 향한 난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후, 스티아를 포함한 하녀들을 전부 내보냈다. 그리고 방 한쪽 벽면에 장식된 정령검을 들었다.

내가 매일 직접 관리해서 그런가, 칼날이 더 반짝이는 것 같았다. 검을 잠시 쓰다듬던 난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따로 관리할 필요는 없지만.’

정령의 마법이 걸려 있어 검의 날은 절대 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건 원작에서 첫째의 검이기 이전에, 나의 첫 번째 검이다. 따라서 쏟고 있는 애정도 남달랐고, 관리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잠시 뿌듯한 눈으로 검을 보던 난 방 가운데에 있는 테이블에 그걸 올려 둔 후 편지 봉투를 꺼냈다. 헤어지기 전 킬리언이 내민 그 편지 봉투였다.

편지 봉투를 열어 보니 빳빳한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종이에는 글씨가 아닌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마름모 모양 안에 기이한 도형들이 뒤섞인 형태.

바로, 아이닝을 소환했을 때 킬리언의 발 아래에 그려졌던 모양이었다.

처음 봤을 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이게 뭔지 감이 왔다.

‘정령의 소환진.’

정확히는 아이닝 전용 소환진이겠지.

정령들은 수식은 물론 소환진도 전부 달랐다.

참고로 눈의 정령 섀넌의 소환진은 마법진과 비슷하게 생겨서, 무의식중에 다른 정령들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마름모 모양도 있을 줄이야.’

내가 소환할 정령의 소환진도 이것처럼 예측하기 힘들려나?

하지만 뭐, 별 상관 없었다.

‘정령석으로 소환하면 소환진은 따로 필요 없으니까.’

올바른 수식만 있으면 되지. 그 수식의 단서는 이미 내 손 안에 있고.

난 느긋하게 정령검 위에 아이닝의 소환진이 그려진 종이 한 장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종이가 화르륵 타오르더니 검 안으로 스며 들어갔다.

잠시 후, 칼날 위로 작은 사막여우가 뿅 튀어나왔다.

“야호!”

아이닝은 허공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에너지를 뿜어냈다.

“우와! 처음 보는 방이다! 벨라디 방이다!”

“아이닝, 이리 와.”

내 말에 방을 구경하던 아이닝이 한달음에 품에 폭 안겼다.

난 아이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내 검에 소환진이 잘 입력된 거니?”

“응! 이제 내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어!”

“다행이네.”

내가 입가에 호선을 그리자, 아이닝이 말꼬리를 늘이며 물었다.

“벨라디이, 나 벨라디한테 도움이 된 거야아-?”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닝이 꺄하항 웃으며 애교를 부렸다.

초반에 보였던 경계심이 단숨에 녹아내리다니, 애초에 이 정령은 예쁨받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상냥한 사람이 좋다고 했지.’

그럼 아무나 상냥하게 대해 주면 다 좋은 건가?

속은 음흉해도 겉만 상냥하면 괜찮은 거야?

의문을 가지고 물어봤다.

“아이닝, 넌 왜 상냥한 사람이 좋아?”

내 말에 여우는 귀를 쫑긋거리다가 꺄하항 웃으며 말했다.

“왜냐면 킬리언이 상냥한 사람을 좋아하니까!”

“호오, 그래?”

난 아이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씨익 웃었다.

마침 킬리언에게 부탁할 것들이 많았다. 남부의 소식은 물론, 어머니의 일기장에서 발견한 수식 연구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정령의 소환진까지.

‘원래는 대책이 다 있지만.’

정령사가 옆에 있는데 굳이 돌아갈 필요 없지 않은가.

다만 킬리언은 내게 충성을 맹세한 수하가 아닌, 동등한 위치의 동업자였다. 따라서 내가 필요하다고 마구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기분 상하지 않게 일을 맡길까 고민 중이었는데.’

타이밍 좋게 아이닝이 해결책을 알려 줬네.

그가 상냥한 이를 좋아한다면, 기꺼이 거기에 맞춰 줄 수 있었다.

‘미인계로 타인의 환심을 사는 건 나도 뒤지지 않는 분야거든.’

그렇게 킬리언의 호감을 사고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면, 일도 수월하게 맡길 수 있겠지.

물론 킬리언을 이용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도 그만큼 그에게 도움이 될 예정이니까.

‘내게 손 내민 걸 절대 후회하지 않게 만들겠어.’

킬리언에게 전달할 정보들을 떠올리며 후후 웃었다.

그때 아이닝이 내 품에서 빠져나왔다.

“시간 다 됐다! 나 이제 가야 해!”

“잘 가.”

“또 봐, 벨라디!”

그렇게 말한 아이닝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졌다.

그걸 보며 난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생각보다 시간이 짧네…….”

지금 내가 아이닝을 소환한 건 전부 킬리언의 자연 친화력과 정령검에 있는 정령의 마법 덕분이었다.

이 방법을 제시한 건 킬리언이었다.

-정령사가 그린 소환진을 정령의 마법이 깃든 물건 위에 두면, 정령이 자유롭게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길을 만들어 놓고, 정해진 시간에 아이닝이 오가며 나와 킬리언의 연락책 역할을 할 예정이었다. 단점이라면, 아까처럼 아이닝이 머물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급하게 필요할 때 정령사가 아닌 나는 따로 아이닝을 부를 수 없다는 것 정도.

‘살짝 아쉬워도 하는 수 없지.’

사실 아이닝의 입을 통해 연락을 취하는 것보다 더 깔끔한 방법이 있었다.

바로 킬리언이 가지고 있다는 황후의 다이아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 다이아에는 텔레포트가 담겨 있으니까.’

직접 얼굴을 보고 정보를 공유하는 게 최고지.

하지만 그 다이아몬드는 지금 사용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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