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K-장녀가 육아물에 빙의하면-60화 (61/197)

60.

“예? 제가 누나 선물을 왜 챙깁니까?”

나 싫다는 사람, 나도 싫어.

멜도르는 그런 심보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러자 시온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구나. 그 장갑, 사냥용 장갑이라 물어봤어.”

때마침 차가 나왔다.

시온이 잔을 들고 우아하게 향을 음미했다.

“손목 부근에 자수정이 박혀 있거든? 그래서 간단한 마법을 담을 수 있지.”

그랬었나? 색만 보고 집은 거라 자세한 디자인은 기억나지 않았다.

멜도르는 차를 홀짝이며 뚱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시온은 그걸 보며 말을 이었다.

“벨라디가 유용하게 사용할 것 같은데, 선물하는 건 어때? 마침 색도 잘 어울릴 것 같고.”

“아까도 말했지만, 누나가 뭐가 좋다고 제가 그런 걸 줍니까? 무슨 기념일도 아니고.”

“하지만 벨라디는 기념일이 아닐 때도 너희 가족 선물을 자주 챙겼는걸?”

우리랑 놀 때도 좋아 보이는 게 있으면 무조건 사던데. 선물로 줄 거라면서.

시온은 그렇게 말하며 차를 한입 마셨다. 그리고 악의 없는 목소리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

“벨라디가 보답받는 경우는 많이 못 봤지만.”

그 말에 멜도르는 우뚝 차를 마시던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벨라디는 어디를 가든, 외출하고 오면 선물을 하나씩 가지고 왔었다.

그건 주로 가족 개개인의 취향을 고려한 것들이었고, 때때로는 그 순간을 공유하고 싶다며 본인이 감명받은 것일 때도 있었다.

멜도르의 방에서 벨라디가 선물한 것들을 찾으면 아마 두 손에 꼽고도 남을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자기는…….

“그래도 생일 선물은 챙겼습니다.”

비록 어머니가 고른 선물에 숟가락만 얹은 격이긴 했지만.

제가 생각해도 쓸모없는 변명에 멜도르는 어쩐지 부끄러움을 느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시온은 그걸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이번에는 생일이 아니라 그냥 챙기는 건 어떨까?”

그 말에 멜도르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내가 무슨 선물을 줘도 귀찮아할 게 틀림없어요.”

-그러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고 나가. 멜도르 앨턴.

하필이면 이런 때 저 말이 떠오를 건 뭐람.

멜도르는 순식간에 풀이 확 죽었다.

“누나는 어차피 날 싫어하니까.”

멜도르의 중얼거림에 시온이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그는 잠시 과거를 회상하며 중얼거렸다.

“하긴, 멜도르 네가 한 짓을 생각하면 진절머리 날 만도 하지.”

그 말에 축 처졌던 멜도르가 확 눈을 치켜떴다.

“아글라 공께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습니다!”

“아, 미안. 너무 무심한 말이었나? 난 너도 당연히 아는 줄 알았어.”

시온이 무해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까지 넌 벨라디의 미움을 사든 말든, 본인 마음대로 행동했잖아?”

그 말에 멜도르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멜도르는 힐끔 시온을 쳐다봤다. 시온은 그저 온화하고 평온한 얼굴로 멜도르를 마주할 뿐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 어쩐지 자신이 이제껏 저지른 소행들이 하나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툭하면 벨라디에게 성질을 내고, 무시하고, 감정 쓰레기통 취급을 하던 순간들.

멜도르도 매우 작지만 양심은 있는 사람인지라, 더 이상의 변명은 할 수 없었다.

‘저 말이 맞아.’

사실 벨라디에게 행했던 행동들은 깊게 생각하고 나온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도 가볍게 넘기셨고, 아버지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으니 그게 잘못됐다는 인지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래서…… 벨라디가 자신을 더 싫어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선물을 하나도 받지 못했네.’

눈치채지 못했을 때는 괜찮았는데, 새삼 깨달으니 심장이 술렁였다.

멜도르는 고개를 들어 시온을 바라봤다. 마침 눈앞의 상대는 벨라디를 제일 잘 알고 있을 인물이었다.

거기에 현명하게 빛나는 금안을 보자,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바르게 하고 고해성사하듯 중얼거렸다.

“사실…….”

그 서두에 시온이 따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이 있으면 말해 봐.”

그렇게 말하며 시온이 조용히 손을 허공에 젓자 두 사람 주변으로 투명한 막이 생성되었다. 지금부터 하는 말들이 밖으로 새지 않도록 만드는 방음 마법이었다.

시온의 배려에 멜도르는 더욱 힘을 얻고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누나한테 사과를 하고 싶었는데…….”

“그랬는데?”

“제가 싫다며 거절당했습니다.”

“그랬구나.”

저 두 마디만 들어도 시온은 그때 상황이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분명 멜도르는 제대로 된 사과를 입에 올리지 않았을 테고, 벨라디 역시 그런 멜도르를 칼처럼 잘라 냈을 테지.

‘지금까지 얘를 가만히 놔두었던 건, 아직 어려서 그런 듯싶은데.’

하지만 그 유효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시온의 추측이었다.

현재는 소년에 가깝지만, 앨턴가의 핏줄이 어디 가지 않는 이상 멜도르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할 것이다.

그렇게 성장한 멜도르가 조금이라도 벨라디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면…….

‘음, 너무 극단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

시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멜도르를 바라봤다.

“멜도르, 넌 왜 벨라디에게 사과를 하려고 마음먹었어?”

“……그야, 친해지고 싶었으니까.”

멜도르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우물쭈물 답했다. 저렇게 구니 딱 그 나이 때의 앳된 모습이 돋보였다.

시온은 그런 멜도르를 조금은 도와줘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당연히 시온이 가지고 있는 멜도르의 이미지는 좋지 않았다. 평소 싸움을 싫어하는 그였지만, 멜도르가 벨라디를 못살게 굴 때면 한 대 쥐어박고 싶기도 했으니까.

그래도…….

‘저 모습이 좀 안쓰럽긴 해.’

자신은 동생이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본인이 동생 입장이라서 그런가.

아이는 진심으로 시무룩한 상태였고, 벨라디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도 느껴지니 시온은 멜도르에게 약간의 동정심을 느꼈다.

‘벨라디에게 들키면 혼날지도 모르겠지만…….’

마음 약한 시온은 딱 한 번만 멜도르의 고민을 푸는 것을 거들어 주기로 했다.

“그러니까 넌 벨라디와 친해지고 싶은 거지?”

“네.”

“그런데 벨라디에게 거절당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거고?”

“……그런 셈이죠.”

“사과를 어떻게 했는데?”

그 말에 멜도르는 당당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사과할 테니, 과거는 좀 넘어가라고 말했는데요.”

“하아, 멜도르.”

어쩜 예상보다 더 최악의 말을…….

시온은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아득함이 가득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시온을 보며 멜도르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물었다.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사과를 하겠다고 말했는데?”

그래도 본인에게 개선의 의지가 있어서 다행인 걸까?

시온은 어색하게 웃으며 멜도르의 천진한 푸른 눈을 바라봤다.

“멜도르, 넌 누군가에게 사과한 적 있어?”

“아니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 그럴 것 같았어. 그럼 반대로 사과받은 적은?”

“그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이 너한테 사과할 때 어떻게 말했는지 기억나?”

시온의 물음에 멜도르가 발을 까딱이며 고민했다. 그러다 곧 생각이 난 듯 눈썹을 올렸다.

“자신의 실수를 언급하면서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죄송하다고 말했습니다.”

“넌 그 사람들을 용서했니?”

“흠……. 용서한 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죠.”

“어떤 기준으로 용서를 했는데?”

“진심이 느껴지는 정도? 진심으로 반성한 기색이 보이면 용서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듣지도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말하면 알아들었겠지.

시온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멜도르를 봤다.

하지만 이런 시온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멜도르는 영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이야기 끝난 겁니까?”

그 표정에 시온이 잠시 멈칫하다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아……. 멜도르에게는 더 직접적이고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구나.’

그렇게 판단한 그는 작게 헛기침을 한 후, 쓰고 있던 안경을 치켜올렸다.

“자, 생각해 봐.”

시온은 그렇게 말하며 눈앞의 찻잔을 들었다.

“내가 너한테 이 차를 쏟았어.”

그러고는 멜도르 쪽으로 잔을 휙 쏟았다. 그 행동에 멜도르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찔거렸다.

물론 차는 시온이 진작 다 마셨기에, 잔은 텅 비어 있었다.

시온이 웃으며 말했다.

“내 실수로 네 옷이 전부 젖었는데 내가 이렇게 말한 거야. 이런, 내가 먼저 사과할게. 이 일은 그냥 넘어가 줘.”

그 말에 멜도르의 안색이 대번에 구겨졌다.

“그게 무슨 사과입니까? 웃기지도 않는…….”

불쾌한 얼굴로 말하던 멜도르는 드디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온은 그런 멜도르를 보며 허허 웃었다.

‘혹시 멜도르가 가져야 했을 눈치까지 벨라디가 전부 가지고 태어나 버린 건 아닐까?’

하여튼 시온의 예시 덕분에 멜도르는 본인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걸 깨닫기는 했지만…….

멜도르는 섣불리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그래도 늦었어요. 누나는 이미 나를 싫어합니다. 아니, 싫어하는 걸 넘어서 경멸할지도 몰라요.”

멜도르는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제가 그따위로 사과를 했으니 다신 제 얼굴을 안 볼 겁니다. 누나한테 또 거절당하면…….”

그럼 전보다 더 상처받고 침대에 앓아누울 것이 분명했다.

멜도르가 우울해하자 시온이 부드러운 어투로 물었다.

“벨라디가 너한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뭐였는데?”

“귀찮게 굴지 말라는 말이요.”

그 말에 시온이 방긋 웃었다.

“그 정도면 괜찮아.”

“괜찮다고요?”

“벨라디가 귀찮다고 말한 건 아직 기회가 있다는 뜻이야. 너한테 경멸 수준의 감정을 가졌다면, 어리든 말든 그냥 내쫓았을걸?”

“……그랬을까요?”

“그럼. 그리고 아직 네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잖아. 이번에야말로 진정성 있게 다가가면 벨라디가 널 용서해 줄지도 몰라.”

“정말요?”

“물론이지! 사과한 다음에 아까 그 장갑을 화해의 선물로 주면 딱 좋겠다.”

여기까지 희망찬 목소리로 말하던 시온이 멈칫 입을 다물었다. 시온의 이성이 그의 낙관적인 말을 제지했기 때문이다.

자세를 고친 그는 안경을 올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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