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난 그런 작은 여우를 바라보다 고개를 기울였다.
“아까는 내가 무섭다며.”
“웃으니까 좋아졌어!”
“고작 그런 걸로 좋아져?”
난 그렇게 말하며 아이닝의 이마를 검지로 살살 쓰다듬었다.
아이닝은 눈을 감으며 손길을 받더니 서서히 내 다리 위로 올라왔다.
“난 상냥한 사람이 좋은걸!”
그렇게 말한 아이닝은 아예 내 다리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버렸다.
난 정령이 꺼낸 말을 되새겼다.
‘상냥한 사람이 좋다라…….’
그때 우리를 지켜보던 킬리언이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저를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난 천천히 아이닝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연기를 꽤 잘하시나 봐요. 황태자가 전하께 경계를 나름 놓은 눈치던데.”
“절 살벌하게 감시하지만, 호의적이긴 합니다.”
킬리언은 처음으로 날카로운 눈빛을 띠며 말했다.
“제게 대공의 지위를 줄 테니 자신을 도우라고 지시했으니까요. 아직은 저를 마냥 착하고 어린 동생으로 여기는 모양이죠.”
“잘됐네요.”
내 말에 킬리언이 날 주시했다. 난 그 시선을 맞받으며 말했다.
“황태자를 돕는 척 수중에 들어갈 예정인가요? 그편이 정보를 얻기 수월할 테니.”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남부의 정보 역시 손쉽게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제게 그 정보들을 넘겨주세요.”
“남부의 정보를요?”
“예, 잡다한 것도 좋으니 최대한 많은 것을 내게 물어 와 줘요.”
내가 알고 있는 원작의 정보들과 킬리언이 가지고 오는 새로운 정보들을 합치면, 분명 재미있는 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판은 황태자를 상대해야 하는 킬리언에게도 나쁘지 않은 상황일 것이고.’
나 역시 수월하게 남부의 동의를 얻을 수 있겠지.
난 아까부터 촉감이 궁금했던 아이닝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내 취미가 사냥인 것. 알고 있지요, 킬리언?”
자연스럽게 바뀐 내 호칭에 킬리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윽고 그 입가에 단정한 호선이 그려졌다. 킬리언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벨라디.”
***
멜도르는 요즘 기분이 무척 저조했다.
최근 잠잠해졌던 성질머리가 다시 극에 달했다고 사용인들 사이에서는 말이 많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멜도르는 애꿎은 화단을 발로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진짜 짜증 나.”
정원사들이 나무 뒤에 숨어서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는 것도 모르고, 멜도르는 꽃들을 헤집으며 꿍얼거렸다.
“내가 먼저 사과를 하겠다고 해도 난리야. 그럼 뭐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벨라디에게 대놓고 거절당했던 그날. 생각보다 더한 충격을 받은 멜도르는 그대로 쓰러져 방에서 몇 날 며칠을 앓아야 했다.
그래도 자신이 아프다 하면 신경은 써 줄 줄 알았는데……. 벨라디는 그런 기색을 단 한 톨도 보여 주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은 가주 회의가 있다며 홀라당 황궁으로 가 버렸다! 자신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이다!
로버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멜도르는 아마 벨라디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아픔보다 분함이 더 커졌다.
그 악 덕분일까. 멜도르는 며칠 앓았던 것이 무색하게 곧바로 체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부작용이 있다면 이번에는 답답함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는 것 정도?
멜도르는 그대로 방을 뛰쳐나와 정원을 서성였다.
‘바깥 공기라도 쐬면 좀 나아지겠지.’
그렇게 산책을 하며 괜히 식물에게 화풀이를 하던 멜도르는 자신이 저택 현관 주위만 맴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멜도르가 마구 머리를 헤집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이 다리가 미쳤나! 누가 보면 내가 벨라디 앨턴이라도 기다리고 있는 줄 알 거 아니야!
멜도르는 발을 쾅쾅 구르며 버럭 소리쳤다.
“아무나 나와!”
그 외침에 멜도르의 뒤를 조심히 따르던 하인들이 잽싸게 뛰쳐나왔다.
“부르셨습니까, 소공작님.”
“당장 나갈 거니까 마차를 준비해!”
누구는 어디 못 나가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멜도르는 그렇게 생각하며 준비된 마차에 몸을 실었다. 어디로 향하냐는 하인의 질문에 멜도르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마탑 상점으로 가.”
거기서 마법 물품들과 연구 재료들을 사들이면 단번에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오히려 마법에 집중하느라 벨라디 앨턴 같은 건 생각도 나지 않을걸?
-난 네가 참 가증스럽다고 생각했어.
순간 벨라디가 내뱉었던 말이 멜도르의 귓가에 울렸다.
멜도르는 울컥하며 더욱 크게 소리쳤다.
“얼른 출발하지 않고 뭐 해!”
“예, 옙!”
마부는 멜도르의 닦달에 서둘러 마차를 몰았다. 마차는 앨턴 공작가의 부지를 벗어나 수도 시내로 들어섰다.
시내 한복판에는 마탑과 연계된 마탑 상점이 있었다. 고도의 마법과 마도 기술들을 총동원해 세워진 높다란 건물에는 마법과 관련된 물품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이곳은 멜도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평소에는 룰루랄라거리며 들어섰을 마탑 상점.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도 멜도르의 기분은 영 나아지질 않았다.
멜도르가 마법 상점에 들어서자마자 휘리릭 달려온 상점 관리자는 살짝 진땀을 뺐다.
‘저 도련님, 오늘따라 상태가 안 좋아 보이네.’
멜도르의 성격이 얼마나 까탈스러운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상점 최대 VIP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관리자는 방긋 비즈니스 미소를 장착한 후, 입을 열었다.
“오늘 저희 상점을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앨턴 소공작님. 특별히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멜도르는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한 박자 뒤에야 관리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새로 들어온 제품들 있어?”
“예, 아주 귀하고 재미있는 물건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평소처럼 맨 위층에 전시해 뒀으니, 그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멜도르는 관리자의 안내에 따라 뚜벅뚜벅 발을 옮겼다.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흑발의 미소년. 그것만으로도 시선을 끄는데, 풍기는 기세마저 남달랐다.
멜도르는 범접하기 힘든 위압감과 다가가고 싶은 근사함을 동시에 지닌 소년이었다.
비록 벨라디에게 한참 낮은 취급을 받고 있긴 하지만…….
하여튼 1층에서 물건을 구경 중이던 이들이 힐끔힐끔 멜도르를 주시했다. 멜도르는 거기에 신경도 쓰지 않고 마탑 상점의 승강기에 탑승했다.
승강기는 상점의 제일 위층으로 올라갔다.
마법 상점의 제일 꼭대기 층에는 특별 고객들을 위한 별도의 공간이 존재했다. 그곳에서 간단한 다과를 즐길 수도 있었고, 각종 진귀한 마법 보석 장신구나 발명품들을 구매할 수 있었다.
띠잉-.
승강기가 꼭대기에 도달한 소리가 났다. 멜도르는 익숙하게 승강기에서 내려 앞으로 향했다.
관리자는 그런 멜도르의 뒤를 따르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이곳에 있는 것들이 이번 주에 들어온 신제품들입니다.”
관리자가 가리킨 고급스러운 선반 위에는 마법 보석들과 각종 귀한 서적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관리자는 그중 하나를 조심히 집으며 말했다.
“특히 제가 추천하는 것은 이 연구집입니다. 마탑주님께서 직접 분석하신 마법 보석의 활용성에 대한 논문인데, 복사를 불허하셔서 딱 한 권밖에 없는 귀한 물건이죠. 또한….”
관리자의 말을 끊고, 멜도르가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포장해.”
‘옳다구나!’
저렇게 자세한 설명도 듣지 않고 물건을 산다는 건, 오늘 대박이 터졌다는 뜻이었다.
관리자의 예감대로 멜도르는 선반의 물건들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은 채,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것들 전부 담아.”
그 말에 관리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오늘따라 성질이 장난 아닐 것 같아 각오하고 있었는데, 멜도르는 평소보다 더 쉽게 물건들을 쓸어 담았다.
관리자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예, 소공작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관리자가 신나서 물건들을 포장하러 간 사이, 멜도르는 멍하니 다른 물건들을 바라봤다.
‘왜 여기까지 왔는데 기분이 별로지?’
관리자가 추천해 준 연구 서적은 원래 멜도르의 흥미를 단번에 끌 물건이었다. 하지만 꼭대기 층까지 와서도 멜도르의 답답함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
인상을 팍 쓴 멜도르의 눈에 전시되어 있던 붉은 장갑이 들어왔다.
고급스러움이 물씬 느껴지는 채도 낮은 빨강. 그 색을 보자 자연스럽게 벨라디의 눈이 떠올랐다.
동시에 애써 가라앉혔던 목소리가 머릿속에 불쑥 떠올랐다.
-널 좋아할 이유가 없잖아.
멜도르는 입술을 짓씹으며 비단 장갑을 확 낚아챘다.
이 장갑 따위가 뭐라고, 그런 말을 떠오르게 하는지!
자신의 기분을 망치게 한 그 장갑을 강하게 움켜쥔 멜도르가 바닥에 패대기치려 손을 든 순간이었다.
“어라, 멜도르?”
뒤에서 나름 익숙한 그 목소리가 들렸다.
멜도르는 동작을 멈추고 사납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흔치 않은 보라색 머리가 보였다.
벨라디의 오랜 절친인 시온이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웃으며 다가오는 시온을 보며 멜도르는 치켜들었던 손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평소처럼 지냈습니다.”
다른 이였다면 그냥 무시하고 하던 일을 마저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온은 실력 좋은 마법사였다. 성질 사나운 멜도르도 그런 이들은 나름 존중해 주는 편이었다.
‘능글맞게 웃기만 하는 모스틴 프레도는 어림없지만.’
멜도르가 선호하는 인물 순위는 아래와 같다.
1. 실력이 매우 좋고 카리스마 넘치는 기사.
2. 실력이 매우 좋고 묵묵한 기사.
3. 성격이 어떻든 일단 실력이 좋은 기사.
4. 실력 괜찮은 마법사.
이를 기준으로 따졌을 때, 무난한 검술 실력을 지닌 모스틴은 순위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다행히 4순위 정도는 차지한 시온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차라도 마실래? 이번에 새로 들인 찻잎 향이 무척 좋아.”
마법의 정수인 아글라 공작가와 마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이 상점도 마탑과 아글라 공작가가 제휴하여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중 시온은 상점 제일 꼭대기 층인 특별 고객 구역을 총괄하고 있었고.
그러니 그가 VIP 고객인 멜도르에게 차를 권하는 건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정작, 멜도르는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 보며 뭘 먹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단골 가게의 주인 가문의 일원이 권했으니 거절하기는 그랬다.
멜도르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말한 멜도르는 뒤에서 대기 중이던 하인에게 들고 있던 장갑을 내밀었다.
“이것도 챙겨.”
“예, 소공작님.”
멜도르는 시온을 따라 창가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곧 상점에 고용된 하인이 다가와 주문을 받은 후, 돌아갔다.
차를 기다리며 시온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아까 보니 장갑을 새로 사려고 하는 듯하던데?”
“아……. 그렇죠.”
멜도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이어 들려오는 시온의 말에 그는 당황했다.
“벨라디 선물이야?”